관계존재론과 세계철학 ①
오랫동안 써 온 『관계존재론과 세계철학』을 이제 한 편씩 세상에 내놓으려 합니다.
출판을 목적으로 쓴 글을 앞서 페이스북에 먼저 나누어 실습니다.
앞으로 약 60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플라톤에서 화이트헤드까지, 노자와 장자에서 원효·다산·수운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관계존재론의 눈으로 새롭게 읽어 보려 합니다.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우주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 물음의 길을 페이스북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고자 합니다.
머리말 / 왜 관계존재론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존재를 물어왔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무엇이 진짜인가.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
무엇이 모든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가.
철학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양 철학의 거대한 전통은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해 전개되었다.
그 답은 실체(Substance)였다.
변하는 것들 뒤에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흐르는 강물 뒤에 강의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수많은 인간들 뒤에 인간의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태어나고 죽는 존재들 뒤에 영원한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서양 철학은 오랫동안 이 믿음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플라톤
변하는 세계 뒤의 영원한 이데아
플라톤은 현실 세계를 불완전한 그림자로 보았다.
우리가 보는 꽃은 진짜 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아름다움은 진짜 아름다움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이데아의 모사(模寫)일 뿐이다.
현실은 그림자다.
본질은 저 너머에 있다.
존재는 변화 속에 있지 않다.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곳에 있다.
서양 존재론의 첫 번째 거대한 기둥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실체라는 왕좌
플라톤이 이데아를 하늘에 올려놓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실체를 버리지 않았다.
사물은 속성이 아니라 실체를 통해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실체를 가진다.
나무는 나무라는 실체를 가진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관계는 부차적이다.
실체가 먼저다.
이 생각은 이후 2천 년 동안 서양 문명의 뼈대가 되었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에 들어와 실체는 새로운 옷을 입는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러나 끝내 의심할 수 없는 하나를 발견했다.
생각하는 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의 중심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자아가 되었다.
실체는 외부 세계에서 내부 의식으로 이동했다.
근대는 자아의 시대가 되었다.
칸트
인간 인식의 감옥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인간 인식이 구성한 세계일 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인과성도
인간 인식이 만들어낸 형식이다.
칸트는 실체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물자체(Ding an sich).
존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손에 닿지 않았다.
헤겔
존재는 운동이다
헤겔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존재는 끊임없이 운동한다.
정(正)은 반(反)을 낳고
반은 다시 합(合)을 낳는다.
존재는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이 점에서 헤겔은 관계존재론의 문턱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거대한 절대정신을 남겨 두었다.
관계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하이데거
존재를 다시 묻다
20세기에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를 다시 질문했다.
존재자는 많다.
그러나 존재는 무엇인가.
그는 존재를 하나의 물건처럼 보지 않았다.
존재는 드러남이다.
열림이다.
사건이다.
이 통찰은 존재론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하이데거 역시 관계 자체를 존재의 근원으로 삼지는 않았다.
실체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는 이상한 세계를 만나고 있다.
양자역학은 입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 없다고 말한다.
생태학은 모든 생명이 서로 얽혀 있다고 말한다.
뇌과학은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인간 지능마저 관계망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존재들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관계의 우주 속에 살고 있다.
연기
모든 것은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불교는 오래전에 말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연기(緣起)는 관계존재론의 가장 오래된 언어이다.
공(空)
실체는 없다
연기의 철학은 공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독립된 본질은 없다.
실체는 없다.
고정된 자아도 없다.
고정된 세계도 없다.
공은 허무가 아니다.
관계의 충만함이다.
화엄
우주는 거대한 인드라망이다
화엄은 연기를 우주적 규모로 확장한다.
하나가 곧 전체다.
전체가 곧 하나다.
하나의 꽃 속에 우주가 있고
우주 속에 하나의 꽃이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춘다.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관계존재론은 화엄의 이 통찰을 현대 철학의 언어로 다시 말하려는 시도다.
화이트헤드
존재는 사건이다
화이트헤드는 실체를 버렸다.
세상은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다.
사건들의 흐름이다.
존재는 생성이다.
존재는 과정이다.
이 생각은 관계존재론의 현대적 토대가 된다.
들뢰즈
존재는 차이와 생성이다
들뢰즈는 존재를 고정된 동일성으로 보지 않았다.
존재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존재는 생성한다.
존재는 흐른다.
존재는 관계 속에서 변형된다.
그에게 세계는 완성된 구조가 아니라 생성의 장이었다.
현대 물리학
우주는 관계다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해체했다.
양자역학은 독립된 입자를 해체했다.
양자 얽힘은 멀리 떨어진 존재들조차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물리학은 놀랍게도 불교의 연기와 화엄의 인드라망을 연상시키는 세계상을 드러내고 있다.
물질은 관계의 패턴이 되고,
입자는 사건이 되며,
우주는 거대한 상호작용의 장으로 나타난다.
관계존재론의 출발
이 책은 새로운 존재론을 제안한다.
존재는 실체가 아니다.
존재는 관계다.
존재는 명사가 아니다.
존재는 동사다.
존재는 고정된 물건이 아니다.
존재는 사건이다.
인간은 관계다.
생명은 관계다.
사회는 관계다.
우주는 관계다.
그리고 시간마저 관계의 한 표현이다.
실체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제 우리는 관계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관계존재론은 그 시대를 위한 존재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