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로 가을을 먹다
여름을 관통하는 땡볕의 위세에 등목으로 버티던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덧 추석을 앞둔 가을의 문턱이다. 바야흐로 무더위에 지쳐 잃어버렸던 입맛을 되찾는 계절이자 풍성한 결실로 온갖 산해진미가 전국에 펼쳐지는 시기이다. 때문에 그 어떤 때보다 풍성한 맛으로 미식가들이 행복해지는 가을, 특히 9월에 꼭 맛봐야 할 우리 부산의 대표 음식 중 놓치면 후회할 음식이 있다. 좋은 사람들과 소주잔 곁들인 정담을 나누기에 제격인 음식, 바로 가을의 별미인 ‘전어’의 참맛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을에 먹는 전어의 맛이 일품이란 뜻이다. 봄에 산란한 전어는 부지런히 살을 찌워 가을이면 그 맛이 절정에 이르는데 씹을 때 고소하고 감칠맛이 감도는 것이 특징이다. 제철 먹을거리는 잘 지은 보약 한 첩에 버금간다고 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바다를 옆에 끼고 살아가는 우리 부산 사람들에게 있어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친근한 음식이 싱싱한 생선을 재료로 한 음식이 아니던가.
‘집 나간 며느리도 전어 굽는 냄새 맡고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많은 생선구이집이 별다른 호객 행위 없이도 가게 앞에 가득한 냄새만으로 손님의 발길을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가을 전어 머리엔 참깨가 서 말’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머리 맛 예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과연 돈(錢)이 아깝지 않은 고기라는 의미를 가진 전어, 이런 전어도 한때 너무 흔해 남 주기 미안한 고기로 분류될 만큼 천대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가는 언젠가 드러나는 법, 우리 부산·경남 지방을 선두로 전어만의 특별한 맛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는 음식이 되었다. 또한 해마다 전국 여러 지역에서 성대한 전어축제가 열려 여행을 겸한 미식가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질 정도로 급 상세를 타고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비린 듯 고소하고, 담백한 듯 풍부한 맛이 넘치는 전어는 다양한 조리법으로 즐길 수 있다. 얇게 뜬 회는 손님 접대 시에 부담 없이 권할 수 있어 좋고, 온갖 야채를 넣고 새콤달콤하게 버무린 무침은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입가를 벌겋게 물들여가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진정한 회 애호가들이 즐기는 뼈째 얇게 저미듯 썰어낸 전어회(새꼬시)는 오드득오드득 씹히는 맛이 제격이고, 아직 전어회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슷하게 칼집을 내고 왕소금을 살짝 뿌린 뒤 숯불이나 연탄불 위에 구워먹는 전어구이의 고소한 매력에 흠뻑 빠지면 된다. 가격도 다른 활어에 비해서 저렴한 편이라서 부담 없이 전어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음식의 맛은 풍경과 분위기와 함께 하는 사람이 맞아 떨어질 때 배가 된다. 기웃거리는 갈매기와 출렁거리는 물결을 앞에 둔 자갈치 시장 한쪽 노점이어도 좋고, 통유리 가득 바다가 들어오는 어느 분위기 좋은 송정이나 광안리 해변 쪽이어도 좋다. 성글성글 썰어 낸 전어회 한 점을 깻잎에 턱하니 올려놓고 마늘 한쪽과 맵싸한 고추 한쪽에 쌈장을 곁들여 슥슥 오무려 입에 넣으면 쫄깃쫄깃 달보드래한 그 맛이 다른 회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맛의 경지가 아니던가. 아, 그전에 캬~~목 줄기를 넘어가는 알싸한 소주 한 잔의 맛을 챙기는 건 필수! 풍부한 회 맛을 선두로 아낌없이 가을을 나누는 정겨운 시간, 서로의 얼굴에 새겨지는 고운 노을마저 아름답다.
전어는 회도 좋지만 진한 맛이 일품인 전어매운탕과 뜨거운 밥에 넣고 비벼먹는 돔배젖 또한 전어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비장의 별미이기도 하다. 신선한 회가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면 뜨끈한 매운탕과 돔배젖은 늘 아랫목 이불 밑에 밥주발을 넣어두던 어머님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전어의 내장으로 만든 돔배젖의 쌉싸름하고 짭쪼름한 맛은 밥 위에 놓이는 순간 밥까지 달게 만드는 ‘맛의 상승효과’를 낸다.
맛있는 음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업무상 접대 건, 회사 직원들의 회식 자리 건 맛깔스런 음식이 눈앞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 집에서 찬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울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물고물한 아이들도 떠오른다. 호기 있게 앞자리엔 아내를 앉혀 두고, 옆에 앉은 아이에겐 “꼭꼭 씹어 먹어야 돼..꼭꼭 씹어 삼켜야 돼 알았지..?” 하며 입에 한 점 한 점씩 쏘옥 넣어주고 싶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어렵던 시절 머릿수 많은 자식들에게 어쩌다 한 번 전어 풍년에 고기 맛 보여주고 “에민 고기 싫어한다..난 비린내 나는 것 싫더라..”하시던 어머님이 생각나 왈칵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우리 부산의 다대포축제를 비롯한 광양축제 서천홍원항축제 등 이 가을, 전어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갈치를 비롯한 부산만의 차별화된 전어 축제가 기획되어 외국여행객들을 비롯한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 구별되지 않는 식상한 행사라면 관광객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가을,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가을을 선물하고 우리 부산을 더욱 빛내 줄 다양한 전어축제를 기대해본다.
더불어 ‘가을에 전어를 못 먹으면 한겨울에도 가슴 시리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 인한 가슴시림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먹을거리로 가슴시릴 일은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 시인, 프리랜서 작가
첫댓글 우리 언제 전어 먹고... 명지에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