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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은 식스토 4세의 명을 받은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 바치오 폰텔리(Baccio Pontelli, 1450~1492)의 설계로 1477년에 착공해 1481년에 완공되었다. ‘시스티나’라는 이름은 ‘식스토’ 교황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 성당 터에 새로 지은 이 건물은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을 본떠 설계되었다. 가로 13미터, 세로 40미터에 높이 20미터인 이 ‘새로운 솔로몬 신전’은 종교적 역할뿐 아니라 유사시에 교황과 그 측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요새 같은 역할도 겸했으며, 훗날엔 감옥으로까지 사용되기도 했다.
이 시스티나 예배당은 1475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의 주문으로 착공하여 1483년 8월 15일에 완성되었다. ‘시스티나’라는 말은 이 성당을 만든 식스투스 4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시스티나 예배당은 추기경 회의를 하는 곳으로 교황을 뽑기도 하며 피신처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밖에서 보면 요새 형태의 모습을 띤다. 이 예배당은 원래 당시 토스카나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있는 메디치 가문이 혹시 침략할 경우를 대비해서, 혹은 당시 이탈리아까지 원정을 다니던 오스만투르크의 마호멧 2세의 침략을 대비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바치오 폰텔리가 설계를 했고 조반니 데 돌치가 건축했다. 예배당은 길이가 40.23m, 폭은 13.40m, 그리고 높이는 20.70m로 고대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파괴한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크기다.
시스티나 성당 내부에서는 원칙적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몰래 찍다가 들키면 카메라에 사진을 다 삭제해야 한다고 한다.
할수 없이 아래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올린 사진이다.
성당의 내부 장식은 피렌체에서 온 거장 화가들의 손에 맡겨졌다. 성당을 준공할 시점에 다다른 1480년, 피렌체의 실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 1449~1492)가 교황청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청산하고자 당대 유수의 화가들을 보내 교황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성당의 벽은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를 비롯해 보티첼리,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잠시 가르쳤던 도미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 또 코시모 로셀리(Cosimo Rosselli, 1439~1507) 등의 주도 아래 장식되기 시작했고 핀투리키오(Pinturicchio, 1454~1513),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50~1523), 피에로 디 코시모(Piero di Cosimo, 1462~1521) 등이 보조 화가로 참여했다. 이들은 3년이라는 세월 동안 32명의 역대 교황을 그려 넣었고, 예수의 일생과 모세의 일생을 담은 총 12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피렌체의 거장들은 이를 위해 각자의 개성을 가급적 억제하고, 그림 속 인물들의 크기와 구도에서 상당 부분 통일감이 느껴지도록 협력했다. 둥그스레한 천장은 피에르 마테오 다멜리아(Pier Matteo d’Amelia, ?~1503?)가 그린 어여쁜 금색 별과 짙푸른 색 하늘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배수와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서 균열이 생기고, 덧칠을 해도 흉측함을 가릴 수 없게 되자, 1508년에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새롭게 천장을 장식하도록 명했다. 4년간의 작업 끝에 미켈란젤로는 그 유명한 천장화를 완성했다. 그는 이후 교황 클레멘스 7세와 그 뒤를 이은 바오로 3세의 명에 의해 1535년부터 1540년까지 만 6년의 세월을 성당의 정면 제단화 〈최후의 심판〉에 매달리게 된다.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
1541 년에 완성된 최후의 심판은 천장화의 완성 22년 후인 그의 나이 6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부름을 받아 제작하였다.
미켈란젤로가 1534-1541년 완성한 걸작으로 교황 바올로3세 파르네세로부터 위임받아 그린 만년의 걸작이다. 세상의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가 최후의 심판을 위해 재림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부활하고 이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모두 391명의 인물이 그려져있는데 가운데 예수를 중심으로 꼭대기의 천상계, 튜바를 부는 천사, 죽은 자의 부활, 지옥의로의추락등으로 구성되있다. 그림속의 인물은 원래 모두 나체였으며 예수의 몸은 뮤즈방에 있는 토루소를 본 떠 만들었고 얼굴은 벨베데레의 아폴로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전 나체로 그렸으나 거듭된 종교회의의 결과 미켈란젤로가 죽기 1년 전 덧칠로서 옷을 입히기로 결정하여 그의 제자에 의해 다시 꾸며졌다. 이로 인해 미켈란젤로는 종교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예수의 재림과 끝을 그린 프레스코(1536-1541)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예배당의 벽에 그린 프레스코이다. 천장화와 달리 〈최후의 심판〉은 매우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분노에 찬 그리스도 앞에서 죄를 빌고 있는 인물들의 고통스럽고 공포에 떠는 모습은 작가 자신이 최후의 날을 예감한 듯하다. 그리스도의 아래쪽에 그려진 수염을 가진 노인은 순교자 바르톨로메오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얼굴가죽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이라고 한다. 말년에 점점 종교에 귀의하며 자신의 지상의 과업이 한낱 무가치한 것임을 자책했던 미켈란젤로는 여기서부터 그러한 고백을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Volta, 천지창조)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최고의 작품이라 일컬어지는 작품,
800평방미터, 약 18m의 높이에서 1508~1512년까지 4년간 그렸다는 작품으로 미켈란젤로가 성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중앙 부분은 구약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 한 것으로서 빛과 어두움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과 이브의 창조,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노아의 대홍수 등 아홉 개의 그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그림들의 좌우 부분과 구석의 삼각형 부분들을 비롯하여 창문들의 위 반원형 부분에는 그리스도의 선조들과 다윗왕조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고, 또한 그 이외의 공간에는 예언자들과 무녀들의 인물화들이 그려져 있다
9개의 패널에 첫째부터 천지창조와 아담과 이브의 창조, 노아의 방주가 묘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아담과 이브의 창조를 그린작품엔 처음 창조된 남자에게 나나님이 팔을 펼쳐 손가락 끝을 대며 생명을 불어넣는 그 유명한 『아담의창조』가 그려져 있다.
그림을 그릴때 그는 배가 턱에 닿을 만큼 웅크린 채 일을 하다 온몸에 종기가 생기기도 하고, 고개를 젖히고 작업을 하다가 물감 세례를 받은것도 한두번이 아니라고한다. 이 작품에는 343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어느 하나도 엑스트라가 없다고 한다.
원죄
여기서는 두 가지의 장면이 동일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중앙의 지혜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나무를 감고 있는 뱀에 유혹되어 이브와 함께 나무 열매를 따려는 아담, 오른쪽에는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열매를 따려는 아담의 뻗은 파로가 유혹하는 뱀의 팔, 그리고 천사의 검 (劍)을 피하려는 아담의 뻗은 팔에서 다시 양 면(面)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균 제감과 나무를 이중(二重)으로 감고 있는 여자 얼굴의 뱀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천사로 두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오른편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는 브란카시(Brancasi) 예배당의, 울면서 쫓겨나는 마사치오(Masaccio)의 같은 주제의 상을 방불케 하는 바 없지 않다.
아담의 창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있는 프레스코화 〈천지창조〉의 한 부분이다. 〈천지창조〉가 천장 위를 장식하고 있고, 그 주위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기둥과 천장의 삼각 부분 8개에 〈예수의 조상들〉이 배치돼 있고, 네 모서리의 삼각 부분에 〈이스라엘의 영웅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아홉 폭의 〈천지창조〉는 창조의 첫날 빛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술 취한 노아로 끝난다. 〈아담의 창조〉는 〈천지창조〉 중에서 네 번째 그림이다.
성 베드로 광장/산 피에토르 광장
바티칸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의 하나는 성 베드로 성당 앞의 광장이다. 이 광장은 알렉산드로 7세 재위 시(1665~1667)에 베르니니가 1667년까지 12년의 공사 기간 동안 완성한 것이다. 이 광장은 우선 완만하게 경사가 지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성당 앞에서 거행되는 여러 종교 의식을 잘 보이게 함과 미켈란젤로의 돔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전체적으로 팔을 벌려 모든 신도를 감싸 안는 모양을 지니고 있다.
가장 넓은 곳의 크기는 240×340m이고 양 좌우에 15m 높이의 기둥이 총 284개가 들어서 있다. 그 위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높이 3.2m 크기의 성인상이 140개가 있다. 또한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네로 전차 경기장에 있던 것으로 1585년에 도메니코 폰타나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오벨리스크는 전형적인 해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직도 광장 바닥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분수가 두 개 있는데 광장 입구에서 성당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분수는 마데르노에 의해 1613년에 제작되었고 왼쪽의 분수는 베르니니에 의해 1675년에 제작되었다. 이 광장을 만든 베르니니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모형을 가져왔다.
성베드로 성당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광장
♣성베드로 성당/산 피에트로 대성당( Basilca di San Pietro)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무덤에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성당의 내부는 1506년 브라만테에 의하여 건축이 시작되어 미켈란젤로, 1600년대의 마데르노에 의해 내부 공사가 계속되어 공식적으로는 1626년에 완공, 약 120년에 걸쳐 완성이 되었다고 하며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마르테노,베로니니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작품들은 아주 하려하며 바로크 풍의 모자이크와 거대한 조각들은 ‘이 성당이 과연 가톨릭의 본산답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끔 한다.
베드로 성당은 50개의 제단과 500개의 기둥, 450개의 조각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5개의 문이 있다. 성당의 길이는 총 187m이며, 폭은 58m이다. 벽 사이 사이에는 총 39인의 성인들과 수도회의 창설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1780년에 도금된 천장도 볼 수가 있다. 성당 앞에 있는 베드로 광장은 이태리 바로코 양식으로써 베로니니가 설계해서 12년만인 1667년 완공했다고 한다.
광장의 모양은 타원형으로 284개의 원 기둥이 있고 상부에 140개의 성인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분수가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일명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도 하며 성베드로 성당은 성당이라기 보다는 이태리의 종합 예술 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성 베드로 성당 전경
바티칸에 있는 대성당으로 유명한 산 피에트로 대 성당, 일명 성베드로대성당 이라고도 한다.
르네상스를 바탕으로 베르니니가 건축주임을 맡았다고 한다.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곳은 그 역사가 깊어 성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을 거슬러 오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고 한다.
베드로 성당(Vaticani Pietro) 입구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교황 교회법으로 이제 이 성당보다 더 크게 지을수 없다고 한다.
13세기 이전 T자 모양의 성당이 있었으나 율리우스가 +자 형태로 바꿨다고 한다.
보이는 황금색 문은 천국의 문이라는 건데 성문이라고 하며 성문은 교황의 지시 하에 특별한 때에만 열리며 문이 열렸을때 이 문을 지나가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것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시 하에 열린 것이며 2016년까지 약 1년간 열려있었다
피에타(Pieta)
1499년, 미켈란젤로는〈피에타〉를 완성했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 어로 ‘슬픔’ 혹은 ‘비탄’을 뜻하는 말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비애를 표현하는 주제이다. 프랑스 추기경 장 빌레르 드 라그롤라가 주문한 것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성 예로니모의 제단 (Altar of St. Jerome).
그림은 17세기 이태리 화가인 도메니키노(Domenichino)가 그린 성 예로니모의 마지막 성찬식이다. 사진에서는 잘 안보일수도 있는데 제단 아래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의 발다키노(Baldacchino)
교황제단이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더불어 손꼽히는 작품이며,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베르니니의 교황
제단의 조화가 실로 할말을 잃게 한다. 과다한 청동금속을 사용하였기에 당시에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팡테옹신전 내부 천장의 청동을 떼어 와야할 정도였다고 한다.지금은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교황제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녀 베로니카
베로니카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자신의 수건으로 닦아주었다고 전해지는 예루살렘의 어느 한 여인이다. 기독교의 성녀로, 축일은 7월 12일이다. 중세 유럽때 때 그녀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승리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의 베레니케와 연관시켰다. 미술 작품에서의 그녀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베일을 들고 펼쳐 보이는 슬픔에 젖은 여인으로 묘사된다. 옷장 일꾼과 청소부·포목상인·사진가·자수를 놓는 사람의 수호 성녀이다.
사도 베드로의 성좌
로마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을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5세기경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흰 상아로 장식하여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것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가 베르니니를 시켜 다시 그 위를 청동으로 장식케 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쨌든 고고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과연 이 의자에 앉았었느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초세기 때부터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그 위에 세웠던 기념비와 함께 내려온 사도의 유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해 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곳은 보물실 입구라고 한다.
성 베드로 성당내 여러개의 성 베드로 제단 중 거짓의 제단 (Altar of the Lie). 아나니와 삽비라 부부는 재산을 팔아 일부만 기부하면서도 전부를 기부한다고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했다가 둘다 벌을 받고 죽는데 이 장면을 크리스토포로 론칼리(Cristoforo Roncalli)라는 화가가 17세기에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스위스 용병
1506년부터 교황의 근위대로 바티칸의 군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왔다. 지금도 교황의 경호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정면
지붕 위의 동상들은 예수님과 사도요한 및 가롯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
원주위에 있는 140인의 성인들의 조각품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
이집트에서 가져온 기원전 1835년짜리 오벨리스크다.
마데르노의 분수(16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