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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핑크빛 사랑
구순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옵니다.
숲속에는 복수초와 바람꽃이 피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직 잔설이 얕게 남아 있지만 무거운 겨울은 이제 곧 가벼운 봄바람에 밀리어 갈 것입니다.
엄마곰과 아기 곰은 함께 나들이를 합니다. 아직 숲속의 바람은 좀 쌀쌀 맞기도 합니다. 햇빛 속으로 걸어가는 엄마곰과 아기 곰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엄마!”
“왜. 아기 곰아!”
“햇빛이 좋아요. 여기에서 좀 쉬었다 가요.”
“그럴까,”
엄마 곰은 심심하여 89번째 느티나무 나이테를 펼쳐봅니다.
시골 마을 한 초가지붕 아래에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있었습니다. 맏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도 딸이었고 셋째~다섯째까지는 아들이었지만 맏아들은 홍역으로 안타깝게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별 하나가 반짝반짝 더 유난스럽게 빛을 발하는데 하늘나라에 잘 도착하였다는 아기의 웃음별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또 다섯째부터 아홉째까지는 딸이었지만 일곱째 딸은 연화교 물에 빠져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할머니 가슴에는 일찍부터 두 개의 무덤이 생겨 할머니는 늘 가슴을 쥐어짜듯이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말해야만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가슴속이 뜨거워서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한 말씀을 또 하시고, 한 말씀을 또 하시고 이런 날들을 계속 살고 계셨습니다.
3남 6녀 중 맏딸인 엄마는 살림 밑천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계속하여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동생들 보살피는 일과 살림을 도맡아 일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쌀장사를 하셨고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징용 가서 일하시다가 허리를 다쳐서 일은 못하셨으나 낚시를 하러 다니셨습니다.
맏딸인 엄마는 같은 마을에 사는 얼굴 예쁘시고 일 잘 하시는 사나이를 맘속에 담고 있었나 봅니다. 엄마의 가슴에는 하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설렘과 두근거림이 항상 가슴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삽을 들거나 괭이를 들거나 쇠스랑을 들고 집을 나설 때에는 더욱 그 사람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구씨 집안에 맏아들로 태어난 승자 아버지는 아래로 남동생 셋이 있는데 승자 아버지까지는 사형제였습니다. 승자 친할머니께서는 삼촌 젖먹이 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막내삼촌은 돌아가신 할머니 곁으로 가서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처럼 가슴을 헤치고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승자아빠는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학교는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승자 엄마 가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엄마는는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반해서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마침 마을에 중매쟁이 할머니에게 중매를 넣었습니다. 중매가 잘 되어 아버지 나이 스물다섯에 열아홉 꽃다운 소녀인 엄마는 그렇게 어려운 중에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서로 도우며 논밭을 일구어 열심히 사셨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을 때에 할머니도 아이를 낳아 오빠와 이모는 친구가 되었고 승자를 낳을 때 막내 이모를 낳은 할머니!
그래서 요즘 언니는 없지만 언니 같은 이모가 있어서 승자는 기쁩니다.
엄마는 시동생 셋을 자식처럼 키우며 오빠와 승자와 남동생을 낳았습니다. 엄마는 오빠를 낳은 후에 산후 조리를 못하여 감기 증세를 보였습니다.
엄마의 삶은 희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동생 세 명을 살뜰히 보살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자식을 키워 보지도 못한 엄마께서는 친정에서 동생들을 키워 본 일을 기억하면서 삼촌들을 키웠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요. 사랑이 깊어가는 만큼 고생도 고난도 많았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승자 외할머니의 고생은 논에 갈 때나, 밭에 갈 때나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열차 안에서 쌀장사하고 허리에 돈을 두르고 너무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할머니의 돈을 모두 가져가서 할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며 집으로 오셨습니다. 할머니는 가슴에 뜨거운 열(화)을 발산하느라 날이면 날마다 말이 더 많아졌습니다. 화가 들어 거의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발을 하셨고 큰 외삼촌도 이발을 하셨으며 또 시간만 있으면 신문지에 항상 붓글씨로 한문을 쓰셨습니다. 작은 외삼촌은 장사를 하러 다니셨고 나중에는 여산에 땅을 사서 크게 과수원도 하셨습니다. 이런 집에서 엄마는 태어나셨으니 학교도 다니지 못 하였고 글씨는 나무로 땅에 썼다고 했습니다. 맏딸인 엄마는 날마다 할머니 대신 할머니가 하는 모든 일들을 도맡아 해야 했고 밭일이든 땔감이든 해야만 했습니다. 엄마는 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세 번만 들으면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집안에서 아빠친구 분들이 오시거나 집 안에 사람들이 오시면 엄마는 거침없이 노래를 잘 하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고생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만 아빠를 사랑한 만큼 힘은 들었어도 행복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빠는 부모님을 모두 잃고 사형제의 맏이로써 삶을 살아야 했으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땅을 파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시집 와서 이처럼 남편의 세 동생들을 자식같이 키우셨으며 엄마는 자식 셋을 두고 오빠와 남동생과 승자를 두고 땀범벅이 되게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밤을 낮처럼 일하셨고 밤에는 깻잎을 개고, 묶고 고구마 순을 늦은 밤까지 껍질을 벗겨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엄마의 일은 그렇게 사랑처럼 깊어갔습니다.
때로는 허리 병이 도져서 용안 이모 댁에 가서 요양을 하고 오시기도 했습니다.
승자가 열 살 때에 있었던 일 이었습니다. 엄마는 없고 새벽에 아빠가 나를 깨워 밥을 하라고 했는데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밖을 보니 보름달이 승자를 보고 함께 놀자고 밝게 웃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쇠스랑을 어깨에 메고 논으로 향하셨습니다.
승자는 시인이 되고 나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허리 아파 용안 이모 댁에 가시고
새벽달이 문 앞에 와서 아버지를 부르네
아버지는 깊이 잠든 나를 깨워 밥하라 이르시고
등을 보이며 쇠스랑 들고 논으로 향하시네
열 살인 난 눈 비비고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려는데
달빛이 먼저 잘 잤느냐 나와 함께 놀자 밝게 웃네.
-<새벽달이 아버지를> 전문
엄마는 놉을 얻어 일을 할 때면 반찬을 만드느라 아주 바쁘셨습니다. 김치며 깻잎김치며 두부조림, 게장, 양념장, 조기구이 등 식사 시간이 되면 일하시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더, 더, 더 달라고 말씀 하시면 늘 행복한 얼굴을 하며 네, 네, 했지요.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일 년에 열 두 번이나 제사를 모셨습니다. 거기에 산제사까지 모셨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낮에 힘들게 일하고 오셔서 밤에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는 꼭 밤 열 두 시쯤 드렸습니다. 엄마는 너무 피곤하여 잠이 잠깐 든 사이에 떡시루를 도둑맞은 적이 있어서 떡 없이 제사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 때는 오촌까지 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면 이웃에게 떡을 돌리고는 했는데 그 일은 오빠와 제가 날랐습니다. 마을 구성원이 거의 씨족 사회로 이루어진 대부분 구씨와 정씨가 사는 마을이어서 저희들이 매우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강경에서 생선을 머리에 이고 오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늘 단골 아주머니로서 생선이며 필요한 물품을 대 주셨습니다.
엄마는 같은 동네에서 결혼식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천 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슬픈 일, 기쁜 일, 어려운 일, 괴로운 일도 겪으며 살아갑니다. 삼촌은 월남으로 파병을 가시고 오빠는 이리 중학교를, 승자는 초등학교를, 남동생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젖을 빨던 막내 삼촌은 월남으로 파병을 가셨는데 그곳에서 베트콩을 잡았다고 훈장을 받으셨고 다음에는 베트공에게 당해 턱뼈가 부러져 대구통합병원으로 이송(다른 데로 옮겨 보냄)되어 엉덩이뼈를 떼어 턱뼈를 만들어 치료 중 이었으며 막내 삼촌에게 온 모든 짐들은 아버지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승자는 삼촌의 물건 중에 펜팔 했던 편지들이 한 묶음 있었는데 승자의 관심은 온통 그 편지에 가 있었습니다. 막내삼촌의 연애편지를 읽고 또 읽고 했어도 자꾸만 읽고 싶었습니다. 그 때는 책도 구하기가 힘들었던 시절이었고 이렇게 편지를 읽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삼촌에게 한동안 위문편지가 왔던 그 때 그 연애편지의 상대가 숙명 여대생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인데도 그게 그렇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막내삼촌은 퇴원해서 집으로 오시게 되었고, 큰 숙부랑 작은 숙부랑은 출가(집을 떠나감)를 해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으며 막내삼촌은 신탁은행에 취직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군대 입대 전에 승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엄마는 결핵을 앓고 있을 때였습니다. 엄마 병이 위중하여 제가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회의를 했지만 군에도 다녀오지 않은 오빠에게 시집 올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하다가 제가 학교를 휴학 하겠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처음에는 보건소로 다니다가 병이 깊어져 나중에는 예수병원까지 와서 마이암 부톨 등 여러 가지 약으로 치료를 해 많이 좋아지셨는데 완전히 나았어도 육 개월 이상 약을 더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시골 살림이 그리 여유가 없었나 봅니다.
승자는 다시 복학을 했으나 다시 엄마의 병이 재발하게 되어 두 번째로 고 3학년 사월에 다시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이리 상고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였고 남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엄마는 정말이지 눈만 감으면 시체 같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한약과 일반 약에 개고기 등 고단백을 잡수시고 엄마 또한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셨습니다.
아빠는 술과 담배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하루하루 나쁜 길로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아픈 엄마를 괴롭히고 돈을 달라 떼쓰고 철이 없어도 한참 없었습니다.
오빠는 제대하고 나와서 하루는 못자리를 하러 갔는데 야무지게 못 한다고 아버지한테 혼이 난 오빠는 앞으로 농사 안 짓고 살겠다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오빠가 시험보기 전날에 어머니는 꿈을 꾸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현몽(꿈에 나타남)하신 걸까요. 돼지가 꿀, 꿀, 꿀 여러 마리가 들어와서 집 안으로 들였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오빠는 한국주택은행에 당당하게 합격하여 은행 직원이 되었습니다. 집에 오면 날마다 돈의 크기로 된 A4를 날마다 세고 또 세고 연습을 하던 오빠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돈도 기계에 넣기만 하면 돈이 세어서 나오지만 그 때에는 일일이 돈을 손으로 세었으니까요. 또 구두는 날마다 방 안에 들여 놓는 거였습니다.
동네에서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인서 아들이 은행에 합격했다네. 아버지는 동네 어르신들 인사받기 바빴고 아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빠는 글자도 모르고 사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장남으로 태어나서 부모님 일찍 여의시고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아빠는 피나는 노력으로 근검절약에 힘썼으며 잘살기를 소망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막내삼촌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재테크를 잘 하신 분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막내 삼촌이 결혼 하고 나서 서울에 딱 한 번 다녀가셨는데 글씨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 오셨는지 궁금하다고 네 아버지가 보통분이 아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행히 소원을 이루셨던 아빠와 엄마! 존경합니다.
오빠는 선을 33번을 보았습니다. 키 작아서 싫다, 안경 써서 싫다 하며 마지막에 본 언니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삼촌은 아예 서울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엄마는 오빠네 집에 가셨을 때 쓰러지셔서 인천 길 병원에 입원 하시고 승자는 엄마가 내려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엄마가 내려오자 둘째 작은아버지께서는 엄마를 밤새도록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밥도 못 드셔서 쌀을 죽 끓이듯이 끓여 미음처럼 마시게 했으며 기침이 날 때면 새벽에는 계란을 삶아 드시게 했고, 그 뒤로도 한약이며 고단백을 주로 드셨습니다.
밤이면 잠을 못 이루고 이불을 쌓아놓고 눕지도 못하고 이불에 기대어 잠을 청했습니다. 기침을 하면 온 몸에서 땀이 나 옷이 촉촉하게 젖어서 서너 벌씩 갈아입어야 했으며 그 많은 날들을 고생하며 사셨습니다. 승자는 날마다 그릇을 삶아야 했으며 서툴지만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아프신 뒤로는 외출 한 번 제대로 못하셨습니다.
엄마의 젊은 날은 일 년에 딱 한 번 쉬는 날이 있었으니 그 날은 사월 초파일 이었습니다. 함열에서 익산 배산까지 걸어가셔서 그날 하루 즐겁게 노시다가 오셨습니다.
걸어가신 이유는 시내버스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제 생일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가장 즐거워하는 휴일, 바로 그날 하루였습니다. 엄마보다 일찍 아빠는 62살에 진갑을 지내시고 폐암으로 이 세상을 등지셨고 엄마는 그 뒤 10년을 더 사시다가 결핵으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엄마의 유품은 제게 십자목걸이 하나를 남겨 주셨습니다. 승자는 그 목걸이를 엄마의 사랑처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승자는 이 세상 하직할 때 딸에게 할머니의 사랑을 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승자는 시인이 되어 이글을 쓰고 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기 곰은 엄마곰과 함께 햇빛을 받으며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승자는 이 땅에 엄마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자식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희생을 하며 살아가는지 깨닫게 됩니다. 승자는 엄마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랑을 위하여 온 맘과 몸을 바쳐 한 가정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며, 어떻게 남편을 내조하며 살아가는지 죽음의 순간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세월을 아기 곰에게 들려줍니다.
동백꽃이 단번에 지는 것처럼 엄마도 그렇게 자신의 잎을 지웠습니다.
엄마는 세상을 살아갈 때도 열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셨습니다.
작은 일을 사랑하지 않고 큰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듯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나라에 충성을 다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해 보지 않으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 수 없듯이 무엇이든지 처음에는 어렵고 서툴러도 하다보면 방법을 차츰 깨닫게 되며 알아가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방법입니다.
엄마곰과 아기 곰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들이 아름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엄마곰과 아기 곰은 좋은 나라 아름다운 동산에 자신들도 살고 있음을 감사하며 나란히 길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