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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2> 서장 (書狀)
유통판에 대한 답서(1)
“이렇게 두루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고 범행(梵行)을 잘 닦아서 불도(佛道)를 얻을 수 있을까?”
그 무리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스승님의 정진(精進)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겠습니까?”
사야다 존자가 말했습니다. “너희 스승은 도(道)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설사 무수한 세월 동안 고행(苦行)을 하더라도 모두가 헛됨과 망념됨의 뿌리가 될 뿐이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안색을 바꾸고 성난 목소리로 사야다 존자에게 말했습니다. “존자께서는 어떤 덕을 쌓았기에 우리 스승을 나무라십니까?”
사야다 존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도(道)를 찾지도 않지만 또한 전도(顚倒)되지도 않는다. 나는 부처를 예경(禮敬)하지도 않지만 또한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장좌불와(長坐不臥)하지도 않지만 또한 게으르지도 않다. 나는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이것 저것 마구 먹지도 않는다. 나는 족함을 알지도 못하지만 또한 탐욕스럽지도 않다.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고 한다.”
바수반두는 이 말을 듣고서 무루지(無漏智)를 일으켰습니다.
중생에게는 광란(狂亂)이 바로 병이므로 부처가 적정바라밀(寂靜波羅蜜)이라는 약으로써 그것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병이 사라졌는데도 약을 그대로 쓴다면, 그러한 병은 더 큰 병입니다. 하나는 집어들고 하나는 놓아버리니 어느 때에 끝마치겠습니까?
생사(生死)의 문제가 도래하면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양 변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많음도 아니고 적음도 아니며, 고요함도 아니고 시끄러움도 아니며, 얻음도 아니고 잃음도 아닌 곳으로 즐겨 나아가, 단순히‘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주의를 기울여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 공부에서 바른 길을 가기 위하여 주의할 점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의할 점은 미리 목표를 정해 놓고 그곳으로 가는 일정한 과정을 밟아가거나 특정한 노력을 쌓아가는 것을 공부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표나 과정이나 노력은 전부 분별심으로 헤아려서 둘로 나누고, 의욕을 앞세워 만들고 조작하는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결국 전도된 망상으로 이끌 뿐이다. 아직 마음을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성스럽고 행복하고 위대한 목표를 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은 모두 분별망상에서 나온 전도된 견해일 뿐이다.
또 눕지 않고 앉아만 지낸다든지 입을 봉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식사를 줄이고 호흡을 조절한다든지,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여 고요히 앉아 있다든지, 사람들과의 만남을 끊고 홀로 지낸다든지 하는 등의 고행(苦行)은 특정한 병에 대한 일시적 약처방으로 유효한 것일 뿐, 이러한 행위들 역시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바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마음공부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마음은 지금 있는 이대로 완전하여 병들거나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유위행(有爲行)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유위행은 상(相)을 따라서 둘로 나누어 취하고 버리는 분별심의 소산이다. 마음은 본래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나누어서 취하고 버리는 분별심에 머문다면 이것은 전도몽상이다.
전도몽상에 끌려가지 않으면 지금 이대로가 바로 본래 마음이요 깨달음이요 부처이므로 달리 해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본래 마음은 시끄럽거나 고요하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모든 경우에 한결같다. 공부인은 이 한결같은 마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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