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4. 신라 혜초스님과 ‘왕오천축국전’ ①
1200년만에 세상 알려진 ‘왕오천축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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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전경> |
사진설명: 유식학에 독보적 자취를 남긴 원측스님. 낙양과 인연이 깊다. 사진은 낙양에 위치한 용문석굴 전경. |
고구려에 불교가 공인되고(372년), 백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眞髓)를 배우기 위해” 중국과 인도에 들어갔다.〈한중불교문화교류사〉(까치출판사 펴냄)에 의하면, 남조 양(梁)나(502~557) 때부터 북송(960~1126) 전반기까지 중국에 건너간 구법승은 223명, 명나라 초까지 포함시키면 모두 244명이나 된다. 중국만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수 천리 멀리 떨어진, 험하고 험한 타클라마칸 사막과 총령을 넘어 천축(天竺. 인도)에 입국, 습하고 더운 날씨와 싸우며 진리를 위해 목숨 바친 스님들도 여럿 있었다. 신라의 아리야발마, 혜업, 현조, 현각스님, 고구려의 구본, 현유스님 등 15명의 스님이 그들인데, 천축(天竺) 구도승들은 대보리사와 나란다 대학 등에서 인도불교의 정수를 배웠다.
〈해동고승전〉,〈삼국유사〉,〈대당서역구법고승전〉등에 인도까지 간 우리나라 스님들의 구도행이 기록돼 있지만, 인도에 간 대부분의 스님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외진 곳에서” 입적하고 말았다. 이름모를 ‘모래 언덕(砂丘)’에 기대어, 실크로드의 구석진 길에서 아무도 모르게, “마치 시간의 모래밭에 남긴 자국이 바람에 쓸려 사라지듯” 그렇게 입적(入寂)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명멸해간 무수한 사람들에 휩쓸려” 사라져 간 것이다.
‘역사 속의 구법승들을 가슴에 안고’ 2002년 3월4일부터 시작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 취재 도중, 인도의 대지에서, 타클라마칸 일대에서, 천축구법승들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고자 노심초사했으나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인도 칸헤리, 바쟈, 베드사, 엘로라, 아잔타석굴에서, 영취산과 대보리사에서, 쉬라바스티(기원정사 있는 곳)와 나란다 대학에서,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에서 그분들을 되새기며 흔적을 뒤졌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굴과 카불에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에서, 중국 카슈가르와 호탄에서, 미란유적과 쿠차에서, 투르판과 우루무치에서도 그 분들을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아쉽게도 기록에서만 자취를 어렴풋이 찾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佛학자가 1908년 돈황 천불동 17굴서 발견
목숨 바쳐 천축에 간 스님들이 ‘적지 않은 업적’을 불교사에 남긴 것처럼, 해동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구법승들은 중국불교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중국 삼론종 발전에 큰 흔적을 남긴 고구려 승랑(僧朗)스님, 유식학 연구에 독보적 자취를 남긴 원측스님, 중국 화엄종을 완성시킨 법장스님이 교리를 자문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던 신라 의상스님, 중국 천태학을 부흥시킨 고려의 체관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중국불교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중국에 들어간 스님들은 장안의 화엄사(현재 폐사), 흥교사, 종남산 지상사, 정업사(淨業寺. 도선율사가 주석했던 곳), 초당사 등에 머물며 교학을 연찬하고, 자신을 탁마했다. 이들 중 원측스님은 낙양과 특히 인연이 깊다. 장안의 흥교사와 서명사에서 교학을 연찬하던 원측스님이 입적한 곳은 낙양의 불수기사(佛授記寺). 입적 후 스님의 다비식은 낙양 향산사(용문석굴 맞은편에 있음)에서 치러졌고, 그곳에 묻혔다. 후일 신라인 제자 승장(勝莊)스님과 서명사 주지 자선(慈善)스님에 의해 원측스님의 유골 일부가 서안 종남산 풍덕사에 이장됐고, 사리탑이 세워졌다. 종남산에 있던 유골 일부를 분골해 송나라 때 흥교사에 다시 기념탑을 세웠고, 현재 흥교사에 있는 원측스님탑은 당시 건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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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정면에서 본 엘로라 석굴 제12굴 모습. <왕오천축국전>에 보이는 "바위를 찍어서 기둥을 만들고 3층의 다락을 만들었다"는 사찰이 엘로라 석굴인지도 모른다. |
중국과 인도로 구법여행에 오른 모든 스님들이 다 위대하지만,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스님 가운데 한 분이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 혜초(慧超)스님이라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스님이 태어난 연대는 안타깝게도 미상이다. 700년이라는 사람도 있고, 704년이라는 학자도 있다. 16살 때인 신라 성덕왕 18년(719) 중국에 건너간 혜초스님은 광주(廣州)에서 남천축 출신 밀교승 금강지(金剛智) 삼장, 금강지 삼장(671~741)의 제자 불공(不空)스님(705~774)을 만나 밀교에 대해 배웠다. 당시 금강지, 불공스님은 사자국(스리랑카)과 수마트라를 거쳐 719년 중국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에 머물던 그들은 얼마 후 낙양과 장안에 가 밀교를 전파했는데, 혜초스님은 금강지스님과 불공스님이 낙양과 장안에 가기 전 그들을 만나 밀교에 관해 익혔다.
배우는 도중 혜초스님은 천축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 나라 천축에 가고픈 원력과 남천축 출신 스승 금강지스님의 권유에 따라 혜초스님은 신라 성덕왕 22년(개원 11. 723) 광주를 떠나 해로로 도축(渡竺), 4년간 천축 각지와 서역 각국을 순방하고 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 당시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를 거쳐 장안에 도착했다. (혜초스님의 천축구법여행도 참조). 혜초스님의 목숨을 건 구법여행은 안타깝게도 1200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 돈황 천불동 제17굴에서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자 혜초스님의 구법행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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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석굴 17굴(장경동)> |
사진설명: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돈황석굴 제17굴. 일명 '장경동'이라고도 한다. |
오렐 스타인이 돈황석굴 제17굴(장경동)을 발견한 왕원록을 꾀어 수많은 전적(典籍)들을 싣고 간 다음해인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도 돈황에 도착해 왕원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타인과 달리 한문과 중국 문헌에 정통했던 그는 왕도사를 달래는데 성공, 17동에 남아있던 나머지 필사본들을 얼마든지 골라낼 수 있었다. 당나라, 송나라 이래의 진귀한 불경을 포함한 중요한 사본 5,000여종을 구해 프랑스로 가져갔다. 펠리오가 갖고 간 사본들은 현재 프랑스 국민도서관과 기메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왕오천축국전〉도 그 안에 들어있었다.
당나라 시대 사본이 그러하듯 〈왕오천축국전〉 사본도 두루마리 모양으로, 첫머리도 끝머리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책이름도 저자도 알 수 없는 사본이었다. 다만 지질과 필적에 의해 9세기경의 것으로 판단됐다. 박식한 펠리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필사본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펠리오는 일찍이 당나라 혜림스님(慧琳. 768~820)이 쓴 〈일체경음의〉(100권. 810년 편찬)를 - 〈일체경음의〉는 “여러 가지 불교 관계 서적에 대한 주석서이자, 어려운 문구나 고유명사 등의 음이나 뜻을 풀어놓은 일종의 어휘사전”격인 책 - 이용한 적이 있었는데,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어휘들을 〈일체경음의〉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日불교학자 다까쿠스에 의해 ‘신라인 혜초’밝혀져
1904년 발표한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간 두 여행가’라는 논문에서 펠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혜초스님에 관해 나는 불행히도 아무런 실마리를 발견치 못했다. 〈일체경음의〉의 저자 혜림스님이 주석붙인 어휘들의 순서로 보아 이제는 없어진 이 여행기는 3권으로 되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여행기는 중국으로부터 남해를 거쳐 인도로 가, 거기서 투르키스탄을 지나 중국으로 돌아온 기록임을 알 수 있다. 혜림스님의 〈일체경음의〉가 810년에 저작됐기에 혜초스님의 여행기는 그 이전 기록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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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동 문서를 뒤지는 이방인 > |
사진설명: 장경동에서 작업하고 있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 |
이처럼 평소 혜초스님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펠리오에게, 돈황석굴은 뜻밖의 선물을 했다.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펠리오는 1908년 쓴 논문 ‘중국 감숙성에서 발견된 중세기의 한 서고’에서 - 길지만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옮겼다 -이렇게 썼다. “마침내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하나의 새로운 여행기를 찾아냈다. 이는 의정(義淨)스님과 오공(悟空)스님과의 중간 시기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 책은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나 나는 책이름과 저자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일체경음의〉에는 법현스님의 〈불국기〉대한 간단한 주석이 있고, 바로 그 옆에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좀 더 긴 주석이 있다. 수년 전 나는 혜초스님이 중국을 떠나 남해를 거쳐 서북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나로서 더 첨가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혜초스님의 여행은 서기 700년 이전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년(紀年)으로는 도시 한 군데 밖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지극히 정밀하게 나온다. 즉 그는 안서도호부에 개원 15년(729)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혜초스님은 거기서 절도대사(節度大使)인 조(趙)를 만났는데, 우리는 다른 사료를 통해 조가 실제 그 때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리하여 내가 발견한 이 무명의 여행기는 그 주요 부분이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임을 알 수 있게 됐다(〈혜초의 길따라〉에서 다시 인용).”
펠리오가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은 중국인 학자 나진옥(羅振玉)이 1909년 검토, 교감해 그의 저서 〈돈황석실유서〉에 수록, 발간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어 1911년 일본인 학자 후지다(藤田豊八)가 ‘본문에 자세한 주석을 붙인’ 〈혜초왕오천축국전〉을 펴내, 혜초스님이 실지로 어느 지방을 어떻게 다녔는지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혜초스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1915년 일본인 불교학자 다까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혜초전고(慧超傳考)〉가 발표되자, ‘혜초스님이 신라인’이라는 것을 포함한 제반 사실이 비로소 밝혀졌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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