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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종주 22 – 속리산권역 >
봉황산구간 - 견훤의 전설이 서린 숲의 간격 사이를 걷다
< 일정 및 자료 >
[산행지 안내]
백두대간학교 제82강 2018년 7월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 그 스물 두번째 산행입니다. 산행일은 7월 21일(토) <백두대간 속리산권역 봉황산구간>입니다. 백두대간 구간 중 가장 고도가 낮은 중화지구권역을 지나 속리산 권역 첫 구간입니다. 화령을 지나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백두대간은 봉황의 전설을 품은 봉황산을 내려서며 역시 봉황의 전설과 연관이 있는 비재(비조령)에서 잠시 숨을 고릅니다. 봉황산 구간은 암릉 구간이 많습니다. 암릉의 사면을 지나거나 로프를 잡고 통과해야합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두르지 않고 조심조심 지나야 합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전설이 담긴 못제를 지나 갈령삼거리에서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내려서며 우측 갈령으로 하산합니다.
☛ 자연스런 숲의 간격 사이로 이어진 백두대간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 구간 소개 ]
-. 산행월일 : 2018년 7월 21일(토)
-. 산행출발 : 2018년 7월 20일(금) 오후 11시
-. 산행코스 : 화령재-봉황산-비재-못제-갈령삼거리-갈령
-. 산행거리 : 약 13.1km
-. 소요시간 : 약 8시간 30분(충분한휴식 시간 포함)
-. 난 이 도 : 중상(★★)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단순히 산길만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자연과 교감합니다. 나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도반들과 함께 합니다. 백두대간 곳곳에 산재한 문화와 함께 합니다. 인문학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인문학의 보고 백두대간을 걸으며 우리의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백두대간은 우리의 공동체 정신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백두대간은 유기체로 우리를 하나로 이어줍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하나를 모두로, 모두를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이자 통로입니다.
우리 문화의 보고이자 인문학의 산실 백두대간은 봉황산구간에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화령에서 봉황의 전설을 품고 있는 봉황산의 이야기를 비롯해 새가 나는 형국의 비조령 등입니다. 백두대간 상의 유일한 습지인 못제(천지)는 후백제 견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백두대간 봉황산 구간으로 우리 인문학의 정수를 찾아 들어갑니다.
추풍령에서 화령까지의 고개를 낮추며 마을로 동내 뒷산으로 스며들었던 백두대간은 화령을 지나며 낮추었던 머리를 서서히 높이기 시작합니다. 봉황산 구간 산행의 출발점은 커다란 백두대간 화령표지석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수청삼거리에서 우측의 산길로 들어섭니다. 쓸쓸함이 감도는 황폐한 묘지를 몇 기 지납니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시골마을을 보며 걷습니다. 그사이 마루금은 시나브로 고도를 높입니다.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던 마루금은 450봉을 지나고 갑자기 숨을 헐떡이게 만듭니다. 거친 쉼을 몰아쉬며 한참을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조망합니다.
☛ 표시가 바람에 날리는 봉황산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산불감시초를 지나며 암릉 구간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와 하송리를 이어주는 작은 고개 안부를 지나며 봉황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때로는 바위 암릉으로 때로는 경사가 심한 오르막으로 맞아줍니다. 이번 구간 중 가장 난이도가 심한 곳입니다. 혹시 백두대간을 남진하는 종주 산악회와 교우하게 되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곳입니다. 암릉 구간이 길이 좁아 서로 양보하며 교행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심조심 오르다 보면 수많은 표시기가 나불거리는 나무 뒤로 원형 의자와 아담하고 귀여운 표지석이 보입니다. 바로 740.8m의 봉황산입니다. 멀리 속리산의 주능선이 산그리메의 맨 뒤로 아스라하게 보이고 49번 지방도로 연결된 비재가 산 아래 실처럼 보입니다.
봉황산에서 비재로 내려서는 마루금도 계속 암릉이 이어집니다. 암릉 사면으로 위회도 하고 암릉 사이를 통과도 하면서 660봉을 지납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안온한 숲길이 이어집니다. 숲은 밖에서 바라볼 때와 숲속에 있을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바람이 심한 날 숲 속은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줘 온화하며,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숲은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과 솔바람으로 시원합니다. 또한 숲의 나무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습니다. 키가 작은 잡목이나 키가 큰 나무들이 서로 배려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인 안도현은 이러한 숲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간격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시인의 노래처럼 숲은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습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간격이 있습니다.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창한 숲이 되는 것입니다.
숲의 간격사이로 이어진 마루금은 울창한 소나무 사이를 지납니다. 곧 계단길이 보입니다. 비재가 가까워 졌다는 표시입니다. 예전에는 계단을 내려서 화서면 동관리와 화남면을 연결하는 도로를 지났습니다. 지금은 터널 위로 만들어진 생태통로를 지납니다. 생태통로를 위를 지나 나무계단길은 형제봉으로 향합니다. 다시 커다란 암릉이 나타나고 우측 사면으로 돌아서서 올라섭니다. 조망바위입니다. 바로 앞에 형제봉 우뚝 솟아있고 약간 우측으로 속리산의 주능선이 또렷합니다. 조망바위를 내려서면 숲은 다시 안온하게 이어집니다. 서로의 간격을 지키며 울창하게 숲을 키워 갑니다.
☛ 봉황산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삼형제봉 갈림길을 지나면 못제입니다. 천지라고도합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유일한 못입니다. 평소에는 물을 담지 않고 있으며 비가 오면 연못이 생겨납니다. 못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담고 있습니다.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이 보은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싸움을 했는데 전투마다 다 이겼다. 전투마다 족족 패한 황충은 견훤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비밀리에 캐내어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솟다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이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라고 전해집니다.
견훤의 못 다한 건국의 꿈을 담은 못제를 지나면 마루금은 예의 날카로움을 드러냅니다. 암릉과 암릉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갈령삼거리까지 계속됩니다. 앞에서 손잡아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도반들과 함께 헤쳐 나갑니다.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도반들과 함께라면 문제없습니다. 너른 공터가 보이고 원형의 의자가 보이면 갈령삼거리입니다. 속리산 천왕봉까지는 6.6km입니다.
갈령삼거리에서 우측 갈령으로 내려섭니다. 능선으로 이어진 길은 소나무와 기암들의 어울림이 수묵화를 보는 듯합니다. 소나무 사이로 천왕봉에서 문장대로 이어진 속리산의 주능선이 수묵화의 배경입니다. 능선을 내려서면 가파른 비탈입니다. 미끄러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칡이 많은 고개인 갈령에는 덩그렇게 큰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작고 아담한 봉황산의 표지석과 비교됩니다. 갈령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다시한번 생각하며 백두대간과 다음을 기약합니다.
함께 걷는 백두대간학교는 도반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학교입니다. 혼자 걸으면 나만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 산행 계획 ]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여러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 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7월 20일(금) 오후 11시
23: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23: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 승차장
7월 21일(토)
00: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 승차장
< 산행일정 >
04:40 화령재 도착 / 산행 준비 & 스트레칭
05:00 화령재 출발 – 산행 시작
06:40 산불감시초소
07:00 안부에서 아침식사
08:00 봉황산
09:50 비재 - 생태터널
10:50 500봉 아래 안부 - 점심식사
12:00 못제
12:40 갈령삼거리
13:30 갈령 – 산행 마감/버스이동
돌고래송어장(상주시 화서면 문장로 503-7/054-536-4567) 송어회로 뒤풀이
15:00 화서 출발
17: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산행 준비물 ]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자켓, 우모복(다운자켓),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버프, 아침, 점심-도시락 등
[ 2018년 8월 백두대간 종주 23구간 산행 안내 ]
-. 산 행 지 : 백두대간 속리산권역 천왕봉구간
-. 산행일시 : 2018년 8월 18(토) - 무박 산행
-. 출발일시 : 2018년 8월 17일(금) 오후 11시
-. 산행코스 : 시어동-문장대-천왕봉-형제봉-갈령삼거리-갈령
-. 산행거리 : 약15.4km
-. 소요시간 : 약9시간
-. 난 이 도 : 상중(★★☆)
*.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 산행 자료 ] 속리산권역 봉황산구간
◆[화령재] 320m
화령재는 火嶺으로 표기하는데 옛 지명은 化寧이다. 火嶺이란 이름에 대해선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많이 일어난 국경지역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시 여겼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한국전쟁 때에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여 불火자를 붙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화동면, 화서면, 화남면, 화북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 부른다 한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으며 지금도 상주에서는 옛날의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중화 (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백두대간 1,425km 중 상주 구간은 69.5km이며 화령은 고려 때 이곳 일대를 관할하던 화령현(化寧縣)의 지명이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여 백두대간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조령, 남으로 추풍령과 연하여 화령으로 불려 왔다고 전한다. 신라 때는 연비군(蓮匕郡), 경덕왕 때에는 화령군(化寧郡), 화령이란 지명은 고개 이름인 火嶺에서 연유된다. 고려 때에는 화령현으로 지금은 화서면이다. 북쪽은 봉황산을 거쳐 속리산 문장대로 남쪽은 국수봉으로 이어지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達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오일장 유명하다.
◆[속리산국립공원]
속리산 천왕봉(1.057M)이 주봉이며 많은 봉우리들이 기암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천왕봉에서 가지 친 한남금북정맥은 충청남도 서산시 안흥진으로 갈래치는 금북정맥과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으로 갈래친 한남정맥의 분기점이요 시발점이다. 또한 속리산은 해동팔경의 하나이며 전에는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속리산 서북릉 최고의 위엄을 갖춘 문장대-문수봉-청법대-경업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석문지나 천왕봉까지 1.000m의 봉우리 들이 줄지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의연하게 서있는 암릉 아래 고산의 조릿대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다.
속리산은 선유동계곡을 경계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월악산으로 넘겨준다. 산세가 지리산이나 설악산만큼 크지는 않지만 암릉과 암장의 연속으로 그 위엄을 남다르다. 중부 내륙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크게 속리산 주능선과 대야, 청화산 능선 등 두 개의 산괴로 형성되어 있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 대부분이 속리산 주능선에 주변에 집중돼 있으며, 대야산 지역의 봉우리들은 900미터를 넘나드는 정도이지만 산세가 자못 험난하다.
법주사(法住寺)를 중심으로 4km 가량의 반경으로 호를 그리면서, 북쪽에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이어 문장대(文藏臺)·신선대(神仙臺)·입석대(立石臺)·비로봉(毘盧峰)·경업대(慶業臺)·천왕봉(天皇峰:1,058m) 등이 병풍처럼 회뤼하고 있는 형세이다. 속리산국립공원의 입구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舍乃里)이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발달하였다. 이 사하촌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옛 마을이 철거되고 청주 나들이골이라는 곳에 새로이 관광촌이 조성되었다.
속리산은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산의 이름은 원래 아흔아홉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구봉산 혹은 소금강으로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들어 지금의 속리산이 되었다.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인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다.’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제2금강(金剛),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 워 왔다.
속리산은 ‘세속이(을) 떠난 산’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곳도 이 산이고,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즉 태종이 왕권을 쟁취하게 위해 형제를 둘씩이나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이곳이다. 이뿐이 아니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瀑)과 그 때마다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등 가장 세속적인 얘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속리산 명칭의 유래는 첫째로 신라의 승려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그 전 이름)에 오르기 위해 보은에 다다랐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으며 이를 본 농부들이 줄줄이 ‘속세를 떠나’(俗離) 출가해 여기서 ‘속리산’이 되었다 하며,
다른 하나는 최치원의 시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한다.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구나/ 산은 사람(俗)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속리산이 속한 보은군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쯤 되는 ‘금(金)돼지’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최치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백호 임제의 것이다.
분방이 지나쳐 스무 살이 넘도록 스승을 구하지 않던 임제는,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어느 날 벼슬을 멀리하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1497-1579)을 만나 3년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따라서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 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고 한 데서 차운(次韻)을 한 것 같다.
임제의 이 시는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이고, 근년에 간행된 백호집(白湖集)의 번역본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속리산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위의 시를 최치원의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최치원도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문을 쓰면서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새길 수 있겠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돌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처음 피는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이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처럼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이라 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속리산 팔봉팔석문팔대 (八峰八石門八臺)
*. 여덟개의 봉우리 : 천왕봉(天王峰, 1,058m), 비로봉(毘盧峰, 1,032m),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1,031m),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982m), 묘봉(妙峰, 874m), 수정봉(水晶峰, 566m)
*. 여덟개의 돌문 :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
*. 여덟개의 돌 : 문장대(文藏臺, 1,054m),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
◆[봉황산] 704.8m
봉황산은 말 그대로 봉황이 살았다는 유래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전설에 의하면 1300년 전에 봉황이 한 30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또한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일설에는 봉황산 장군이 싸움에 이겨서 봉황산, 반면 싸움에 진 장군이 있는 산은 원통산(596.9m)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봉황산과 구병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峰)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峯)산,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峯)산은 구봉(峰)산(=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싸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 「산경표」에도 남는다.
◆[비재] 427m
비재는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재, 비조령이라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 비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못제]
비재에서 갈령 삼거리 가는 길에는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습지인 못제가 있다. 못제의 크기는 300-500평 정도, 10평 정도의 넓이에 물이 고이는데 유입수는 없고 빗물에 의해서만 못이 생기기 때문에 실제 물을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지도상에는 식수표시가 되어 있지만 사실 여름 장마철에만 물을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은 못제가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다고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제 전설_삼국유사(일연지음/권순형편역/출판타임기획)>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매일 싸움을 벌여 이겼다. 싸움을 벌이는 족족 패하는 황충이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비밀리에 캐내어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이는, 광주의 한 처녀가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얘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산(해발 873m인 두루봉을 상주시 화서면 청계 마을 사람들이 대궐터라고 부르는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임.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청계산이라 함.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임)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이 모두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였던 견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갈령 삼거리]
형제봉 오르는 중에 1Km 떨어진 곳의 ‘갈령’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갈령은 ‘칡고개’라는 뜻이다.
◉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협), 백두대간학교, 국리공원관리공단, 한민족문화백과 등
☛ 봉황산구간 산행지도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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