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관악고 학생들(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 제공=서울교육청>
우리나라 수학과 교수들 가운데 수능 수학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사람들이 몇 %가 될까? 모르긴 몰라도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교수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산 A고에 다니는 B군은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다. 그런데 이번 9월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지 못했다. B군은 최선을 다했지만 국어, 수학, 과탐에서 5개를 틀렸다. 하교길 동아리 후배가 물수능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B군은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수능이라고? 수학 시험 만점을 받고나 하는 소리야? 만점도 못 받는 애들이 물수능이라고 하기는.”
전국의 63만 수능 응시자 가운데 99.9%는 만점을 받지 못한다. 63만 명 중에 겨우 30명도 안 되는 학생이 만점자가 되어 이들 중에서 1등부터 30등을 가리지 못했다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성적이 전체적으로 높아졌다고 우리 사회는 '물수능'이란 말로 수능시험을 비하한다.
마치 자신들은 만점을 받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낌없이 수능을 조롱하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63만 수험생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네가 시험 봐 봐. 그래도 물수능이란 말이 나오나.”
수능이 쉬워지면서 물수능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널리 쓰이고 있다. 더군다나 9월 모의고사 역시 쉽게 출제됨에 따라 1~2문제만 틀려도 2등급으로 떨어진다며 수능이 쉬워서는 안 되는 것처럼 대부분의 언론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전공 교수들도 만점을 맞기 어려운 수능시험이 변별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언론에서 물수능이라고 부르니 사람들은 너도 나도 물수능이 맞는 말인 줄 착각하게 된다.
우리는 좀 더 교육을 넓고 깊게 봐야 한다. 이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
2016학년도 정시 선발인원은 서울대 766명, 고려대 1,027명, 한양대 914명 등으로 상위 7개 대학이 6천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선발한다. 올해 수능 응시자는 63만 1,184명으로 6,300등이어야 상위 1%에 든다. 상위권 대학에서 이렇게 줄세워진 학생들 가운데 상위 1% 학생들을 우수한 학생이라고 선발해 온 것이 정시다.
전국에 2,300여개 고등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올인하고 있다. 2015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모두 29명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수시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으며, 11명은 서울대에 진학했다. 수능 만점자가 수시에서 연세대에 떨어지고 정시에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것이 회자되기도 했다.
상위 1% 학생들의 상당수는 의대에 진학하고 있지만, 현직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려운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고 답한다. 이들은 직업이 요구하지 않는 어려운 수학 공부를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불필요한 수학공부에 12년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쏟아 부었다. 오로지 성적 줄 세우기를 위해 필요한 수학 공부에 12년을 낭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
올해 대학 입학정원 63만여 명 가운데 의대 정원은 총 2,800여 명이며, 이 중 절반 조금 넘는 인원을 정시에서 모집한다. 의대와 일부 상위권 대학의 학생 선발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수능을 어렵게 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미래 직업인으로서의 기본 소양과 전문지식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특히 대학은 직업인으로 나서기 직전 단계로 자신이 몸담고자 하는 전공을 택해 전문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이런 대학 입학에서 전공과는 무관한 수학 성적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수학뿐 아니라 영어도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대학교육을 마친 미국인들조차 수능 영어시험에서 만점을 맞기 힘들다고 하니 변별력을 높이는 어려운 시험이 과연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얼마 전 개최된 수학포럼에서 모 박사가 “학생들조차 물수능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 논란을 샀다. 그가 어떤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대상이 상위 1% 학생들이 아니라면 그 말은 완전히 틀렸다. 쉬운 수능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덜고, 여유 시간을 진로탐색과 소질개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니 일반 학생이라면 쉬운 수능을 물수능이라고 비아냥거릴 이유가 없다.
알려진 바와 같이 직업인의 직무능력 가운데 가장 불필요한 능력이 수리능력이다. 가끔 수리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같은 것으로 헷갈리는 학부모들이 있는데, 사실 문제해결능력은 수리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과 창의성에 의해 발달한다. 공식과 문제유형을 달달 외우는 수학 공부는 문제해결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교육계는 광복 이후 엄청난 성장을 해왔다. 교사만 해도 50만 명이 넘고, 사교육 종사자까지 치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교육과 관련한 비즈니스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만큼 교육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그런데 높은 교육열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교육 비즈니스의 난립으로 교수들은 교과목의 학습량으로, 학원은 선행학습과 성적경쟁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으며,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공부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호소하는 실정이다. 일부 학교의 교사는 학원에서 배우라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사도 있다고 하니, 이들 모두가 공교육을 망치는 원인이다.
몇 해 전 모 대기업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매번 서울대 출신 학생들만 선발해 지방 근무지에 보냈더니 2~3개월 후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사직서를 내고 전부 서울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기업 소재 지역의 지방대 관계자가 기업을 설득해 그 학교 졸업생들로 신입사원을 선발하도록 했더니 직무능력도 뛰어나고 일도 잘해서, 결국 그 이듬해부터는 서울대 학생 대신 그 지역 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대학은 지금은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대학으로 거듭나 있다.
이렇듯 직무에 필요한 것은 학벌이나 성적이 아닌 개개인의 직무역량이다. 소위 명문대 출신만을 선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대기업은 여전히 학벌위주의 채용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이는 기업 발전과 나아가 국가 발전에도 큰 저해가 된다.
최근 고용노동부와 대한상공회의소 주최로 '능력중심 채용 트랜드와 변화전략' 컨퍼런스에서 오동근 OPR연구소 부대표는 “정부가 나서서 직무능력 중심의 채용을 하기 위한 자료를 기업에 만들어줘야 기업도 직무능력 중심의 채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 부대표의 말대로 참고할 만한 마땅한 자료가 없다보니 취업준비생은 불필요한 스펙 쌓기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 기업은 여전히 서류전형의 기초가 되는 입사지원서에 직무와 무관한 특성을 서술하라고 강제하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책적, 제도적 대안이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직무능력 중심의 채용이 이루어지지 못해 생기는 문제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어렵게 대기업에 입사하고서도 약 25% 가량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을 그만둔다는 조사가 있다. 기업이 대학 서열이나 성적이 아니라 직무능력을 보고 채용을 했다면 직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이 훨씬 감소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듯 사회가 중요하지 않은 학교 성적으로 학생들을 서열화시키는 것에는 많은 부분 기업에도 그 책임이 있다. 기업이 자신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편하게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상위권 대학생들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직무에 대한 탐색과 학습 대신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공부에 내몰리는 한 그들이 미래 인재로 성장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 사회는 의미 없이 어렵기만 한 공부에 학생들을 내몰아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능이 쉬워야 한다. 그래서 뜻있는 교사들과 연구진들은 수능을 자격고사화하자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물수능이란 말의 저변에는 쉬운 수능기조가 잘못됐다는 가치판단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쉬운 수능기조에 반대를 깔고 있는 이런 말은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을 위해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물수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막상 수능을 어렵게 내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수능이 너무 어렵다며 따지고 들 사람들이다.
적어도 전공 교수들이 쉽게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수능시험이 아니라면 물수능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물수능은 수능 만점을 받지 못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을 무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63만 수험생을 바보로 만드는 물수능이라는 말을 대신할 적절한 단어를 찾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