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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양희은
출생 : 1952년 8월 13일
학력 : 서강대학교 사학과
직업 : 가수
취미 : 기타연주
데뷔 : 1971년 아침이슬
대표곡 : 하얀목련, 내 나이 마흔살에는, 아침이슬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양희은이 갖는 무게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곡을 나열할 필요는 없다. 김민기가 작곡한 ‘아침이슬’ 한 곡만으로도 그의 목소리는 당대 젊은이들의 ‘생각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암울하고 혼란스런 군사독재 시절을 답답한 호흡으로 살아간 1970~80년대의 청춘들에게 ‘아침이슬’은 ‘낭만적 청년문화’를 넘어,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비판적 시대정신’의 음악적 상징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상당 부분은 곡조와 노랫말을 주조해낸 김민기에게 돌아가겠지만, 이를 낭랑한 목소리로 전달해준 양희은이 없었더라면 ‘아침이슬’은 결코 국민가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김민기가 ‘금관의 예수’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으로 대중의 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면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진 사람은 바로 양희은이었다.
팬들이 창조자 이상으로 ‘전달자’ 양희은을 좋아했다는 것은 양희은이 김민기 아닌 다른 작곡자와 만들어 부른 노래들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이주원의 곡인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한 사람’, 김희갑 곡인 ‘하얀 목련’, 하덕규의 ‘한계령’, 이병우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도 양희은이 불렀기에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곡들이다. 김민기가 쓴 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들 또한 TV 인기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오래도록 되새김질되었다.
남자가수들이 장악하고 있던 한국 포크음악 판에 그는 거의 유일한 ‘우먼파워’였다. 그 영향력과 대중적 흡수력은 보브 딜런 시대에 맹활약한 미국 포크 여가수 존 바에즈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70~80년대 포크음악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가 양희은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통기타를 메고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한 지 어언 30년, 나이도 올해로 만 쉰 살이다. 이제 그를 ‘인기가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무대에 올라서 기염을 토하는 그는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특히 그의 공연은 ‘아줌마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새 그는 ‘포크의 대변자’에서 ‘아줌마 문화의 기수’로 변해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아줌마
인터뷰를 위해 일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의 녹화를 막 마친 뒤였다. “녹화하면서 만든 거예요. 1년이면 300날 손님 맞이하면서 터득한 음식 솜씨지” 하며 약과를 내놓는 모습이며, 인터뷰 중간중간 차와 과일을 대접한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곤 하는 모양이 영락없는 아줌마다.
“때로는 노래만 아니라면 뭐든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노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운명이 돼버렸다”는 게 인터뷰의 첫마디였다. 방송을 통해 그의 당당한 언변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지나간 30년 음악인생을 회상하는 그의 눈가에는 간혹 이슬이 맺혀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여장부’ 양희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언젠가 어느 기사에서 양희은씨를 수줍은 성격으로 묘사한 게 기억납니다.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긴데요. 왜 그런 차이가 생긴 걸까요? “저는 제가 봐도 낯을 잘 가리고, 수줍음 많고,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셨던 그늘이 상처가 된 탓도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열린 직업이 갖는 의외의 폐쇄성 탓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더러 생각 밖으로 여리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양희은씨 공연은 언제나 흥행이 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배가수들도 공연이 성공하는 선배가수로 양희은씨를 첫 손에 꼽습니다. 왜 공연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보십니까? “제 공연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줌마들이 많아요. 처음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는 공연장에 들어오지 못해 화난 아줌마들로부터 공연관계자가 뺨을 맞는 해프닝도 있었지요. 공연기획사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하더군요. 1994년 귀국했을 때 체중이 20㎏이나 늘어난 살찐 아줌마가 되어 나타나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전 ‘여자가 좋아하는 여자’인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다수인 공연장이 얼마나 각별한지 아세요? 여자들만 치는 박수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무엇이 있습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제 공연에는 아줌마를 상대로 한 ‘얘기’가 많습니다. 노래가 아니라 그 얘기를 들으러 오는 아줌마들도 있으니까요.”
양희은의 공연장에서는 가수와 객석이 주고받는 흥겨운 대화를 들을 수 있다. 그가 사설을 펴면 객석 이곳저곳에서 질문이 날아든다. 한 아줌마의 엉뚱한 질문. “양희은씨는 옷을 어떻게 마련합니까?” 양희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큰 목소리로 응수한다. “아니, 연예인이라고 특별하게 옷을 입는 줄 아세요? 저요, 남자 옷 입어요. 지금 이 옷 말이죠, 투엑스 라지예요.” 한바탕 폭소가 터진다.
웃음 못지않은 비장함도 있다. 겨울 공연 때면 그는 가끔 캐럴의 고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른다. “생전에 아버지가 잘 부르시던 곡이에요. 그렇게 죽도록 미워한 아버진데, 지금은 저도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 할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양희은도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만다.
공연에 온 중년 여성들이 양희은씨 얘기에 공감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 아줌마가 갖는 보편적인 정서를 확인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 정서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학창시절에 돈이 없어서 등록금을 못 내고 학교를 다녔어요. 당시 교실에는 지독하게 가난하거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말하자면 ‘거름’이었던 학생들이 꼭 있었어요. 제 얘기를 통해 아줌마들은 그 시절 ‘경제성장기의 고통’을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반에서 잘나가지 못하던 아이들을 가리키던 ‘깍뚜기’나 ‘버스회수권’ 같은 그때 용어들이 제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니 반갑지 않겠어요?”
-조금 도식적인 구분일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경기여중, 경기여고, 서강대 사학과라는 학력을 비롯해 양희은씨가 갖고 있는 조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줌마와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기획상품이 아니냐’는 지적도 들립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보니 아예 ‘아줌마게시판’ 코너가 있더군요.
“아줌마 느낌을 가진 인물도 아닌데 일부러 아줌마의 이미지로 몰아가는 게 아니냐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요. 친구들이 더러 그렇게 이야기하면 전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날 봐, 아줌마잖아? 내가 아줌만데 뭘 그래.’ 기획이나 컨셉트가 어디 있습니까? 전 무엇이든 억지로는 못하는 체질입니다.”
송창식, 김민기와의 만남
양희은은 서울 종로 가회동에서 1952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아버지 양정길씨와 어머니 윤순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클래식광(狂)이었던 아버지와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불렀던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물려받은 그는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는다. 1960년대 당시의 이혼이란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다.
1969년 여고시절에는 디자이너로 겨우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의 가게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우환이 잇따랐다. 당장 홀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꾸리고 두 여동생(바로 밑이 방송인 양희경씨)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그에게 학업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몰락한 집안의 장녀요 소녀가장’이었다. 유독 부잣집이 많은 가회동 한가운데 사는 동안 집안 형편이 기울어진 것을 두고 그는 “그때 우리 집이 가회동 물을 흐렸다”고 이야기한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양재학원에 다니려고 생각했던 그를 뜯어말린 것은 동창생들이었다. 학교에서 응원단장으로 인기를 누릴 만큼 친구들과 사이가 좋았던 그는 결국 여고시절의 우수한 성적과 영어웅변대회 최우수상 수상자라는 프리미엄으로 서강대에 입학한다. 일단 학교에는 들어갔지만 길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트윈폴리오의 송창식을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송창식과는 고교 2학년 때 속해 있던 영어회화클럽을 통해 당시 포크의 메카였던 YWCA의 ‘청개구리’에서 얼굴을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통기타무대 ‘금수강산’에 출연중이던 그에게 양희은은 대뜸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포크는 물론 가요를 전혀 몰랐던 양희은은 그 곳에서 동요 ‘따오기’와 서양민요 ‘클레멘타인’을 부르고는 ‘오늘 노래한 것을 가불로 달라’고 송창식을 졸랐다. 신문기자나 방송PD가 꿈이었던 대학 초년생은 이 엉뚱하기 그지없는 사건을 계기로 뜻하지 않은 가수의 길을 가게 된다. 그에게 필생의 음악 동반자로 남아 있는 ‘포크의 기린아’ 김민기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양희은과 김민기의 만남은 한국 포크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김민기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겁니까? 미리부터 알고 있었나요? “김민기씨도 YWCA의 청개구리에서 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는 도비두(도깨비 두 사람)라는 이름의 듀엣으로 활동하고 있었죠. 언젠가 무대에서 미국 포크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난 로큰롤 음악이 좋아(I dig rock and roll music)’를 부르는 걸 봤는데 기타를 굉장히 잘 친다고 생각했어요.
그를 직접 찾아간 것은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사은 리사이틀’을 준비하던 때였어요. 기타 반주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죠. 물어물어 공연장 무대 뒤로 찾아갔더니 직감적으로 절 알아보더군요. 대뜸 얼굴을 쳐다보면서 ‘너 아버지 없지?’ 하고 묻는 거예요. 아무튼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저와 김민기 김윤태 임문일이 4인방이 되어 늘 붙어 쏘다녔지요.”
아침이슬이 첫 곡인 것은 슬픈 일”
1970년대 초반 김민기(왼쪽)와 함께 활동하던 시절의 양희은
-‘아침이슬’을 녹음하던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김민기씨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서 대중들과는 달리 그 곡에 그다지 애정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 바 있습니다. 그 곡에 대한 당시 두 사람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김민기씨는 처음부터 ‘아침이슬’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연습이 끝나고 악보를 버렸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가 처음 부르던 순간 그 노래에 끌리듯 빠져버렸어요. 그가 버린 악보 종이를 주워 연습했고 언젠가 꼭 녹음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작자보다 먼저 ‘아침이슬’을 취입하게 된 거죠. 4개 방송사 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어렵사리 레코딩이 이뤄졌습니다.”
-김민기씨와는 1971년 첫 앨범과 이듬해 앨범, 1978년의 앨범까지 모두 세 차례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희은씨 노래인생 전체를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하나로 묶인 ‘역사적 동체(同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음악적 측면에서 양희은씨는 김민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김민기씨는 양희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민기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를 천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의 작업은 제 음악인생의 처음인 동시에 절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감수성은 당시 기준에서 볼 때 너무도 맑았으니까요. 다른 음악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서정성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지요.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곡들이 시대상황 덕분에 이름을 얻게 된 부분도 있겠지만, 노래가 오래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손을 보면서) 노래도 사람의 손금처럼 생명선이 있다고 전 믿어요. 1년짜리가 있는가 하면, 10년짜리 노래도 있고 50년 가는 노래가 있는 법이죠. 오래 가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저에 대해 ‘희은이는 노래를 못해. 그게 노래냐?’ 하고 말하곤 하죠. 그 사람 맘에 드는 게 세상에 뭐 있나요?”
-사실 양희은씨는 그의 음악을 충실히 전달한 이른바 ‘김민기의 페르소나’로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침이슬’이 그런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겠지요. 하나의 인상이 강렬하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건 저나 김민기씨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김민기는 사석에서 좋게는 ‘양희은이란 큰 우산이 있어서 나는 뒤에 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아침이슬이 양희은의 첫 곡이 된 건 슬픈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발 ‘아침이슬’말고 ‘상록수’를 부르라고 주문하기도 하지요. 저에게도 ‘아침이슬’이 주는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어요. 그건 벌써 그 곡이 맘에 드느냐 안 드느냐를 떠난 문제지요. 한 곡의 노래로 캐릭터가 규정되는 것을 좋아할 음악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밖에 할 얘기가 없나
양희은은 대통령선거로 뜨겁던 1971년 ‘아침이슬’이 수록된 첫 앨범과 함께 홀연히 등장했다.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지배하던, 포크음악도 ‘낭만’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시절이었다. 포크 본연의 ‘비판성’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노래가 순식간에 시대와 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무 살 여대생의 꾸밈없이 낭랑한 보이스 톤은 여가수를 낮추어보던 일반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리며 시대를 흔들었다.
1974년 김민기에서 이주원으로 음악 파트너를 바꿨지만, 그래도 그의 위풍당당하고 결연함을 잃지 않은 노래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 시절 그가 발표한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한 사람’ 등의 노래가 김민기 시절의 ‘아침이슬’ ‘금관의 예수’ ‘백구’에 비해 로맨틱한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상투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강한 소구력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가수와 달리 양희은은 좀처럼 사랑과 이별타령의 늪에 젖어들지 않았다. 설령 가사에 사랑을 표현하더라도 통속적 허위가 아닌 단호함의 요소가 배어 있었다. 맹렬히 활동하던 시기에 사랑노래를 의도적으로 꺼린 것은 ‘도대체 노래로 사랑밖에 할 얘기가 없냐’는 확고한 자의식 때문이었다는 회고다. 달콤한 사랑노래를 불러달라는 주위의 요청이 계속됐지만 그는 대중가요의 일반 틀에 동승하기를 거부했다.
양희은의 음악이 후배가수나 팬들의 생각과 삶노래 그만두기 위해 노래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양희은은 1981년 돌연 유럽 배낭여행의 길을 떠나면서 잠시 음악계에서 사라진다. 이듬해 여름 한국에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두 번에 걸쳐 암 수술을 받는 중대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일그러진 시대의 대항마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팬들에 의해 ‘하얀 목련’은 198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1985년 단 한번의 녹음으로 취입했다는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5년이 흐른 1990년 전국민의 가요로 사랑을 받기에 이른다. 그의 노래 생명선은 그렇게 질기고도 길었다.
-1981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한창 가수와 방송활동을 병행하던 시기에 외국으로 떠나기는 힘들었을 텐데요. 시기적으로는 신군부의 권력장악이나 5공화국 출범과 맞물리는데 그런 상황과 연관이 있었던가요?
“직접적으로는 아닙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 심정이 답답해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1970년대 중반 포크의 흐름이 막혀버린 상황이었고, 라디오 DJ를 하는 순간에도 방송국에는 정보부 요원이 2인1조로 배치되어 절 감시하곤 했으니까요. 가끔 ‘김민기 언제 봤어?’ ‘그 친구 어디 있는지 모르나?’ 하고 묻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게 아니어도 전 저대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썩은 나이’ 서른이 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어요. 타성에 젖는 게 싫어서 가수를 그만두고 전업을 고려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 아는 분의 도움으로 보세의류회사 의류기획실장으로 적을 두고 있었고, 덕분에 여권을 얻을 수 있었어요.”
-14개월 뒤 유럽에서 돌아온 것은 병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병은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어요. 잘 알던 여고선배 의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진단하기도 전에 제 얼굴만 보고는 ‘말기 암 환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는 거예요. 몸에 세 군데나 종양이 있었죠.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스트레스와 가난’이 누적됐기 때문일 겁니다. (빙그레 웃으며) 남자를 모르고 산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두 번에 걸쳐 수술을 받은 것은 첫 수술 후 제가 몸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에요. 그때 제 병을 알지 못했다면 오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가난이라면 전성기에도 전혀 돈을 벌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양희은씨 음반은 상당히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까?
“전성기라…. 저한테 과연 전성기가 있었던가요? 전 한번도 인기가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음반 판매고는 상당했다지만, 그 시절은 레코드사가 돈을 벌었지 가수는 돈을 구경도 못하던 때였어요. 방송 DJ로 그나마 수입을 채웠을 뿐입니다. 자매 셋이 대학을 다니니 등록금 대기가 쉽지 않았죠. 제가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했으니 말 다했죠. 전 ‘돈 없는 가수’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1987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사업가 조중문씨와 결혼한 양희은은 남편이 사업을 하고 있는 미국으로 떠나 새 삶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7년이 지난 1993년 남편의 사업장이 한국으로 옮겨오고, 또한 ‘늙어서는 서울 가서 살고 싶다’는 남편의 희망에 따라 양희은은 귀국길에 오른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래를 위해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돌아왔으니 그냥 다시 노래하게 됐을 따름이었다.
-30년 기념 라이브 앨범 속지를 보니 ‘나의 원래 꿈은 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30년 넘게 노래를 하고 있다’고 쓰셨더군요. 다른 가수들은 노래를 목숨으로 여기는 데 비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현재도 노래보다 라디오 진행에 더 에너지를 쏟는 듯하고요.
“그래서 음악을 계속하려고 하는 겁니다. 속지의 다음 문장을 보세요. 꾸준히 노래를 했지만 목숨 걸고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이 노래를 그만둘 수 없는 겁니다. 뭔가 목숨을 걸고 보란 듯이 해놓고 나서야 그만둘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노래를 그만두기 위해 노래를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생각보다 미련하고 우직한 성격입니다. (껄껄 웃으며) 그래서 별명도 ‘양미련 여사’ 아닙니까? 라디오 진행은 제가 욕심이 많기 때문에, 노래하면서도 같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게 전부는 절대로 아닙니다.”에 깊은 자국을 남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로 포크음악에 족쇄가 채워지면서 그의 활동에도 제약이 가
40대, 라이브 가수로 돌아오다
양희은이 발표한 앨범들. (왼쪽부터 1971, 1974, 1996년)
-지금까지 낸 앨범은 모두 몇 장인가요? 그 중 어떤 곡들이 맘에 드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앨범으로는 스물한 장이고 찬송가를 포함하면 스물여덟 장일 겁니다. 곡으로는 400여 곡 될 거구요. 좋아하는 곡은 아무래도 김민기씨 작품인 ‘백구’ ‘금관의 예수’ ‘늙은 군인의 노래’고요, 후반기 곡으로는 김의철의 곡인 ‘나 떠난 후에라도’가 맘에 듭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침이슬’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양희은씨는 노래도 노래지만 작곡자 선택에 대단한 안목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민기부터 이주원 하덕규 이병우 그리고 최근의 김의철씨까지 같이 작업한 사람들은 양희은의 음악에 품격과 새로움을 불어넣었습니다. 작곡자를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골랐다기보다는 모두 새 앨범제작을 앞두고 주변에서 소개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주원씨는 서로 속속들이 알면서 동고동락하던 사이였고, 하덕규는 조동진 선배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어떤 날’이란 듀엣으로 활동한 이병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눈여겨봤던 후배였어요. 그리고 6년에 걸쳐 저의 발성을 개발하는 데 힘써준 기타 연주자 김의철씨는 이제 저의 음악스승이지요. 살면서 만난 음악선생 가운데 으뜸은 김의철씨가 아닌가 합니다.”
30년에 걸친 긴 음악 여정에서 양희은이 가장 흡족해하는 것은 귀국 이후 공연으로 새로운 위상을 개척해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됐어도 꾸준히 공연장을 찾아와준다는 것은 가수에겐 견줄 수 없는 기쁨이다.
게다가 그는 대형무대나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이벤트 행사장에 서는 다른 고참 가수들과는 달리 대학로의 소규모 라이브 무대를 고집한다. 1994년 대학로에 ‘라이브 극장’이 생겼을 때, 그는 생애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단 콘서트를 열면서 가요사에 드문 ‘노장 콘서트가수’로 부활했다. “1990년대 들어 물결을 이룬 라이브 문화의 실질적 기폭제는 양희은”이라고 말하는 가요 관계자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추억으로 퇴화하지 않고 여전히 무게를 갖는 것 또한 콘서트문화의 개척자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요즘 젊은 가수들은 과거에 비해 수명이 짧습니다. 신세대 가수 중에서 양희은씨처럼 30년을 견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고요. 선배로서 그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까?
“전 돈을 버리고 ‘롱런’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와 돈의 관계는 기묘해서 노래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이미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수는 인기든 위세든 내려갈 때 돈이 벌린다는 거예요. 또한 제가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은 ‘보여주는 게’ 뜸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게 TV는 언제나 낯선 물건이었습니다. 뭐든 그렇지만 많이 보여주면 나중에는 보고 싶지 않은 법이죠.”
그는 또한 “가수는 메시지의 전달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반드시 ‘자기 얘기’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획이 판치는 근래 음악계 풍토에서 가수는 남 얘기를 충실하게 전하기만 하는 존재가 돼버렸는데, 그래서는 유통기한에 쫓기는 상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일침이다.
“양희은의 음악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했다고 보느냐”며 마지막 질문을 꺼내들었다. 인터뷰 내내 유려하게 대답해나가던 그가 잠시 입을 닫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낮은 톤으로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마도 제 노래는 동시대를 살아간 같은 연배 사람들의 가슴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성장의 고단함과 가혹한 군사독재에 신음하며 살던 제 또래 사람들에게는 무언지 모를 응어리가 가슴에 맺혀 있었지요. 김민기를 비롯한 작곡자들의 메시지를 제가 대신 전달하면서 그 쓰라린 마음을 일정 부분 해소해주었다고 봅니다. 또한 팬들이 제 노래와 목소리에서 틀에서 벗어나는 싱그러움을 느꼈다면 다행이겠지요. 한마디로 타성에 젖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때문이었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노래할 거야!”
그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중장년과 아이들을 위한 노래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후반에는 그간 꼭 만들고 싶었다는 동요음반도 출시할 계획이다. 고민이 있다면 신곡을 계속 내놓고 있는데도 관객들은 여전히 30년 전의 감수성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꺼내며 “팬들이 신곡을 싫어해도 신곡을 내놓는 게 옳은 것일까” 자문(自問)하던 그는 이내 단호한 어조로 “그래도 해야 돼!” 하고 자답(自答)했다.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바로 ‘타성’ ‘신곡’ ‘공연’ 같은 어휘들이었다.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단단한 결심이었다. “과거를 복제하는 것은 가수로서 끝이죠. 타성에 젖지 않으려면 공연에 매진하고 줄기차게 신곡을 발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필자를 문 밖까지 배웅하면서 양희은은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나, 죽을 때까지 노래할 거야!” 해졌지만, ‘고립된 섬’ 같은 그의 존재는 음악대중들의 지원사격을 통해 도리어 빛을 발했다.
김민기의 "아침 이슬"로 한국 대중가요사에 대표 여성 포크싱어로 인정받고 있는 양희은는 1971년 첫 정규앨범 "양희은 고은 노래 모음"으로 가요계에 데뷰 합니다.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던 양희은은 선배인 송창식의 도움을 받아 송창식이 노래를 부르고있던 호프집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가수라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1971년 "양희은 고은 노래모음"으로 앨범을 발매하게 되는데 앨범속에는 70`~90년 격변에 시기를 지나 지금까지도 대학교나 집회시에 그렇게도 많이 불리우는 김민기의 명곡 "아침 이슬" 수록 되어 있습니다. 송창식과 더블어 유난히 금지곡이 많았던 가수이기도 합니다. "아침 이슬","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작은 연못"등이 금지곡이었고 금지곡이 되었던 이유를 알게되면 70~80`s 시절 박정희 정권 때에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기도 합니다.
1982년 난소암을 진단받고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어머님의 병간호로 완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건강에 큰 문제없이 가수 활동을 하고 계시며 요즘 TV에 다양한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셔서 가수로써가 아닌 일반인 양희은의 모습도 보여 주고 계십니다.
가수 양희은에 대해서 말해보면 그 당시 비슷한 시기에 데뷰했던 다른 포크 여가수인 "뚜에와 무와" 출신인 박인희나 "라나에로스포" 출신의 은희등이 있는데 그들과의 차이점은 박은희나 은희는 70년대 히트곡을 발표하고 그 이후로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가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 추억의 가수로 생각되고 있지만 양희은 같은 경우는 7080`S 시대를 지나 현재까지도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고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뷰한지 10년이상 지난 가수들에게 신곡이 담겨 있는 앨범을 내는 것도 의미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 추가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해당 가수를 평가하는데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에 해당하는 가수가 양희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포크의 전성기를 보내 이후 그녀의 히트곡을 보면 1983년 "하얀 목련",1985년 "찔레꽃 피면"."한계령",1991년 "사랑,그 쓸쓸함에 대하여"등 데뷰한지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계속해서 히트곡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한국 가요사에 데뷰 20년이 지난 후에도 히트곡을 만들어낸 가수를 보자면 트롯트가수가 아닌 가수로는 남녀 가수 통틀어 이문세정도 밖에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데뷰 때부터 그녀의 목소리는 이쁘고 섬세한 보컬하고는 거리가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맑고 청아하지만 심지있는 목소리로 그녀에 노래들은 가볍게 즐기기 보다는 해당 시대적 상황을 노래하는 무게감과 깊이가 있는 노래들이었으며 그녀가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고 조금씩 변하는 모습과 그 변하는 세월속에서 뭍어나는 목소리로 팬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들은 세월에 깊이 만큼 더한 감동을 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7080`s 대표하는 최고 남성가수로 송창식이 있다면 최고의 여성 가수로는 양희은이 그 맨 위에 있다고 할 수있습니다. 현재 "뜻밖에 만남"이란 주제로 싱글을 여러 후배 가수들과 계속 발표하고 있습니다.그렇게 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기에 이제 할만큼 했어..가 아닌 아직도 후배들과 새로운 곡작업을 하는 양희은이란 가수를 보면 역시 대단한 가수다라고 밖에 할말이 없습니다.
현재 신곡을 발표하는 7080` 가수가 거의 없기에 더욱 더 빛이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쉽게도 아직 라이브로 양희은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네요. 언제고 라이브 공연을 하면 이번에는 꼬옥 찾아가서 들어보고 싶네요
가수에게 책은 이야기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시즌 2 '전문가&책'에서는 전문 영역에서 활동하는 직업인을 만나 그들의 삶과 직업 그리고 직업과 관련된 추천 책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매일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겨운 오프닝 곡과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친근하다. 양희은. 언제부턴가 사람들에게 있어 그녀는 단순히 노래 잘하는 가수나 목소리 좋은 DJ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그녀가 그저 무대 위에서만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었기에, 시대를 불문하고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인 이야기를 풀어내준 좋은 이야기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올해로 48년 차 가수이자 라디오 DJ가 된다는 양희은에게 있어 책은 이야기다. 삶도, 노래도, 책도 모두 발라드 즉 시대를 담은 이야기라고 말하는 그녀를 만나 가수의 길을 걷게 된 사연과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LP 1971 아침이슬(1971), 서울로 가는 길(1972), 1973 가난한 마음(1973), 행복의 나라로(1974), 한 사람, 들길 따라서(1975), 네 꿈을 펼쳐라(1976), 크리스마스 캐롤 모음(1977), 부모(흘러간 노래)(1977), 상록수(1978), 노병(1978), 하얀 목련(1983), 한계령(1985), 숲, 이별그후(1987), 1991(사랑-그 쓸쓸함에 대하여)
앨범 <양희은 1995>, <양희은 1997>, <양희은 1998>, <양희은 1999>, <양희은·30>, <양희은·35>, <2014 양희은>
디지털 싱글 컬래버래이션 프로젝트 <뜻밖의 만남 1-8>
아버지께서 월남을 하셨고 저는 딸 셋 중에 맏이로 태어났어요. 아버지 속에도 아들에 대한 선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딸아이였으니까. 재미있는 건 제가 굉장히 말괄량이였다는 거예요. 그냥 소꿉놀이하고 놀았던 적이 없어요. 동네 남자아이들을 다 몰고 산으로 들로 막 뛰어다니면서 나무를 타고 신나게 놀았어요. 그러다가 수가 틀리면 남자아이들을 막 패고 다니기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셨어요. (웃음)
노래는 특별히 좋아하고 말 것이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늘 우리 자매들에게 노래를 시키셨거든요. 특히 집에 손님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수정과나 식혜, 약과 같은 걸 내놓으시고는 그렇게 노래를 시키셨죠. 케 세라 세라나 동요 이런 걸 희경이랑 둘이서 레퍼토리까지 열심히 연습했어요. 일단 제가 노래를 하면 희경이가 이중창을 했는데 좋고 싫고도 없고, 아버지가 하라면 하고 그만 두라 하실 때까지 했어요.
그러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몰락하던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선견지명으로 아셨던 건가. 살아생전에 그렇게 노래를 시키셨거든요. 사람들만 모이면 얘가 우리 딸인데 얘 노래 한번 들어보라고. 자기가 일찍 갈 줄 알고 우리한테 연습시킨 건 스스로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려던 일종의 내공 닦기는 아니었나 싶은 그런 생각이요. 그냥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날 때가 있었어요.
사실 목소리는 어머니께 물려받은 거예요. 어머니가 절대음감이었거든요. 엄마는 아버지가 성악 공부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시집왔대요. 우리 엄마가 1930년생이니까. 그땐 여자는 여고 나왔으면 공부 다 했다 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아버지 꼬임에 넘어가 시집온 뒤엔 제가 생긴 거예요.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머니처럼 목소리가 좋거나 노래 잘하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1964년 제 나이 열 세 살, 아버지 나이 서른아홉에 돌아가셨으니 저는 여태껏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화하고 알 기회가 없었어요.
가수가 된 건 어떤 결심보다는 상황에 의해서였어요. 참 뻔한 스토리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서서 온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었거든요. 의지가지없이 집안에 쌀 한 톨 살 돈이 없었을 때 기타를 매고 명동으로 나와 오디션을 봤어요. 제 나이 만 열아홉이 되기도 전이었죠. 집에 먹을 것도 없고 연탄도 없고 상황이 굉장히 심각했는데, 오히려 그땐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서 그 상황이 썩 슬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코믹하더라고요. ‘엇? 집에 돈이 없다네?’, ‘쌀이 없어?’하며 다같이 웃고 그랬죠.
고등학교 2학년 때 되지도 않는 기타 혼자서 배워 몇 곡 치는 걸 가지고 정말 용기 있게 오디션을 봤어요. 사실 기타 연주라고 할 줄 아는 곡이 대 여섯 곡뿐이었는데 그걸로 오션를 했으니 생각해보면 저도 진짜 당돌한 애였죠. 그러다 송창식 선배가 자기 스테이지 시간을 10분 내주면서 이종환 선배한테 “형 얘 노래 좀 들어보라”고 했는데 그때 부른 노래가 따오기였어요. (웃음) 보일 듯이~ 보일 듯이~ 그 노래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로 붙었어요. 다음 날부터 업소에서 일했죠. 그런데 업소 분위기가 저와 잘 맞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일하고 싶은 업소는 따로 있었거든요. 오비스캐빈. 그곳이 당시 통기타 음악의 메카였거든요. 다시 오디션을 봤어요. 그곳 상무님이 제 노래를 듣더니 일을 시켜주더라고요. 그렇게 그곳에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1978년 디스코 붐이 일기 전까지 일을 했어요. 제가 1971년에 데뷔를 했으니 데뷔도 하기 전에 취직을 한 셈이죠. 그러다 업소를 자주 찾던 방송사 PD들이 “너는 음반을 내야 한다”며 저한테 한 음반 업자를 소개하셨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씁쓸한 일을 겪었지만 그 덕에 앨범도 낼 수 있었죠.
1971년 여름에 앨범 작업을 했고, 그 해 9월 1일에 음반이 나왔어요. 그중 아침이슬이라는 곡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어요.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그때가 1972~3년경이었을 거예요. 학교에 있는데 애들이 우르르 뛰어나가더라고요. 저도 따라나갔는데 데모 현장이었어요. 저를 본 교수님께서 “너 왜 여기 있냐”며 “빨리 저리로 가라!”고 소리치셨는데 그때 애들이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부른 그 노래가 아니더라고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잊히지 않아요. 당시엔 잘 몰랐지만 크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게 바로 노래의 사회성이었어요.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한 저작권자 또 노래를 부른 저작인접권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노래가 어떻게 불리느냐는 별개의 일이었던 거죠. 11년 정도의 시간 동안 제 노래는 금지곡으로 묶여있었지만 저는 그 사실을 크게 실감 못했어요. 간혹 대학 축제 현장에서 누군가 제게 노래를 하지 말라고 적힌 쪽지를 건네는 일도 있었지만 객석에서 어떤 노래를 청하면 저는 불렀어요. 방송 출연을 금지 당했을 뿐 현장에서는 금한 적이 없었던 거죠. 참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배우고 불렀어요.
제가 처음 통기타 음악에 관심을 가진 건 아마 초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아요. 당시 대중음악은 트로트가 주였는데 어느 날 포클로버스라고 굉장히 참신한 그룹이 등장한 거예요. 최희준, 위키 리, 유주용, 박형준 이렇게 네 분의 대학생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모두 미 8군 출신이었어요. 옷 태부터 달랐던 데다 미 8군에서 다져진 발성과 매너도 참 멋있었죠. 물론 가장 좋았던 건 통기타를 베이스로 한 음악이었어요. 1절은 번역한 우리 말로 2절은 영어로 불러주던 그 노래는 우리가 주로 듣던 트로트와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가서 트윈폴리오를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바람이 불었어요. 음악 프로그램에서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Joan Baez),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나 피트 시가(Pete Seeger) 이런 사람들이 나올 때면 ‘와, 이게 정말 우리의 음악이 아닌가!’, ‘젊은 사람들의 음악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때 당시가 1960년대 후반이었으니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였어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제가 좋아했던 음악은 크게 보면 모두 통기타 음악이었던 거고요.
통기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트로트의 비브라토 발성을 싫어하는데 저도 그랬던 게 아닌가 싶어요. 또 우리는 기성세대와 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트로트와 달리 통기타 가수들 노랫말엔 사랑 타령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운동권 노래로 불리기도 했고요. 저 역시 학창시절에 브라더스 포 (Brothers Four)나 킹스톤 트리오(Kingston Trio) 노래를 항상 들었고, 그런 부분들이 제 음반 활동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어요.
실은 노래보다 라디오를 더 좋아했어요. 어릴 때 꼭 재봉틀처럼 생긴 진공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배웠지요. TV가 없던 시절 우리가 상상으로 즐길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라디오로부터 배운 셈이죠. 고등학교 때 민속춤경연대회라고 전교생이 모두 참가하는 대회가 있었는데, 필리핀 음악이 꼭 필요해서 무작정 방송국을 찾은 적이 있어요. 교복 입은 학생들이 필리핀 음악이 필요해서 왔다고 하니 한 방송 관계자가 릴 테이프에 우리가 찾던 음악을 녹음해주었는데요. 그때 라디오 편성국 분위기를 느끼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 이런 곳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
그러니까 사실상 가수보다는 라디오에 대한 꿈이 더 컸던 건데, 1971년 가을학기에 처음 라디오 DJ를 맡았으니 실은 가수 데뷔 시점과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죠. 라디오를 하러 가는 길은 늘 발걸음이 가벼웠어요. 물론 라디오 DJ는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운 적이 없는 만큼 첫 프로그램을 방송한 첫날 해고가 되는 굴욕도 겪었지만 그런 사건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프로그램 모니터링을 하며 라디오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덕분에 청소년들이 많이 듣는 시간대나 심야 방송 프로그램 DJ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고요.
방송국 입장에서 보면 제가 통기타 노래를 하는 가수였던 데다 말주변도 괜찮다고 느꼈기에 방송국에서도 저를 DJ로 키웠던 것 같아요. 데뷔 앨범부터 금지곡 판정을 받았던 만큼 한 90년대까지도 한 해에 몇 번 TV에 나갈까 말까 한 가수였지만 그럼에도 잊히지 않았던 건 다 라디오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 라디오를 듣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날을 생각할 때 제 목소리를 떠올리고 당시에 제가 배달한 숱한 서양 노래와 아름다운 통기타 음악들을 함께 떠올리게 된 거죠.
제가 생각하는 노래는 발라드 즉 이야기예요. 그 시절을 풀어가는 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가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고인 얘기를 노래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해요. 고여 있는 얘기에 마음을 실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듯 잘 풀어낼 수 있다면 좋은 가수라고 볼 수 있죠. 노래에 마음이 실리면 기교는 필요 없어요. 가령 지독히 말주변이 없는 어떤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버벅거리고 더듬으며 말을 한다 해도 그 이야기가 진실되면 더욱 우리 마음에 잘 와닿는 걸 느낄 때가 있잖아요.
오랜 시간 라디오 DJ로 활동하며 얻은 특권이 있어요. 그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인 이야기를 누구보다 먼저 들을 수 있다는 거죠. 그 시간들이 제가 음반 활동을 하며 가사를 쓰는 데도 참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가수가 무대 위에서만 살다 보면 현실과 동떨어지기 십상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기독교 방송에서 라디오를 할 때면 늘 가까운 동대문 시장을 쏘다녔고, 심야 프로그램을 할 때면 방송국에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며 걸었어요. 일용직 노동자들이 군불을 때고 서 있는 모습이라든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무대 밖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슬럼프도 있었어요. 라디오를 하면서 지난 20년 동안 무겁고 진지한 책을 잘 안 읽었던 것 같아요. 매일 300여 통에 달하는 편지 속에 담긴 온갖 우울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우리가 받는 편지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거든요. 아무런 꾸밈도 의도도 없죠. 한 번은 여성시대 코너 중 ‘가슴으로 쓰는 편지’의 사연을 읽다 제대로 슬럼프가 왔어요. 고작 10분, 15분 사연을 읽어주는 일이 이 사람들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지. 더 이상 폭력에 시달리지 않을까. 갑자기 취직이 돼서 돈이 생기나. 대체 뭐가 달라지지. 당시엔 저도 갱년기를 앓고 있던 터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세상엔 이런 편지조차 못 쓰는 사람들도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 길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쉼터를 찾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요. 잠자코 앉아있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랬더니 그곳에서 저를 만난 분들이 또다시 편지를 보내왔어요. 아, 이런 반향이 울리고 퍼져서 세상의 거대한 어깨동무가 되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최근에는 악동뮤지션과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했어요. 넉넉한 시간을 갖진 못했지만 참 재미있었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사실 저는 옛날 사람이니까, 추억에 파묻혀서 70년대 초반 노래만 부르게 돼요. 제 공연에 온 사람들이 그런 노래만 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스스로에게 굉장히 싫증이 나더라고요. 나는 왜 맨날 똑같이 이 노래만 부르나 싶었죠. 그 상황에서 탈피하고 싶어 대안을 찾을 때 제 음악을 도와주는 친구들이 디지털 싱글이나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추천했어요. 또 막상 해보니 괜찮은 대안이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다양한 가수들과 컬래버레이션 앨범을 발표해 왔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도 있어요. 대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가수 양희은으로 봐주시지만 누군가는 저를 라디오 DJ라든지, 가끔 어린이들은 개그를 하는데 노래도 잘하는 아줌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런데, 어찌 됐건 제 본업은 가수잖아요. 그러니 가수로서 마무리를 짓는 이 시점에 내가 뭔가 했다 스스로 인정해야 기분 좋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그래 좋아! 대포알 장전해서 신나게 쏘아보고 장렬히 전사하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섭게 노는 거예요. 저는 너무 어린 날부터 일을 해서 놀지를 못했으니까요. 더 늦기 전에 여행도 가고 친한 사람도 자주 만나 놀 생각이에요.
간혹 주변에 가수하겠다는 친구들에게 묻곤 해요. “가수는 왜 되려고 하니?”. 세상이 참 불공평한 게 저는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잖아요. 그런 제가 감히 조언을 한다는 게 마땅치 않은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우리 때는 하고 싶지 않은 걸 안 할 자유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시스템이 다르잖아요. 대형 기획사에서 콘셉트에 따라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들어내죠. 즉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렇게 해서라도 가수가 되고 싶은지, 누군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면 순순히 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럼에도 꼭 가수가 되고 싶다면 모든 면에서 열어놓고 활동하길 바라요. 어떤 상황에서든 마침표 찍지 말고. 혹시나 가수가 된 후에 무대를 떠나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해도 그 시간을 오롯이 즐겼으면 좋겠어요. 가수가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황에 된다는 건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길게 보면 훨씬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될 거예요. 의사도 본인이 수술을 받아본 경우에 더욱 환자 마음을 어루만지는 능력이 생기듯 가수도 똑같아요. 그러니 당장 꿈이 꺾인 것 같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네이버 지식백과] 가수 양희은 - 가수에게 책은 이야기다 (지식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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