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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여신상을 조각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결국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신상을 완성한 그는 그 조각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조각상이 사람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각상과의 사랑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그는, 어느 날 신을 찾아가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조각상과 사랑을 이루어달라니, 그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렇게 공허한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룰 수 없는 자기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조각상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각상에게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다시 조각상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보았습니다. 역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각상을 끌어안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조각상의 심장소리가 느껴졌습니다. 그의 사랑에 감동한 신이 조각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간절한 소원을 이룬 그는 조각상과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 중 하나로, 조각가는 피그마리온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피그마리온 효과”라는 전문용어가 탄생하였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한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상대로 학력 테스트를 마친 그는 2%의 어린이들에게 “매우 우수하여서 발전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성적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좋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다음 시험에 놀라운 학업 성취도를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념이란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해서 형성된 주관적 확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신념이란 한 개인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는 믿음, 또는 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념에 따라 공부를 하기도하고, 사업을 하기도 하며, 정치를 하기도 합니다. 이때 신념이 확고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대로, 우연의 일치를 통해서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념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근거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확신이기 때문에 영원한 약속이나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지로부터 시작하는 신념에는 영적인 요소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고행이나 수행을 통한 자기 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결국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은 “신념(信念)과 신용(信用)과 신앙(信仰)” 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념은 이미 언급한 대로 자신에 대한 확신 또는 믿음입니다. 신용은 인간 상호간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이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념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고 성령의 감동 없이도 가질 수 있는 자기 확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념과 달리 믿음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약속과 보장이 있습니다.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지만 약속과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약속과 보장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사는 동안 잠시 환난과 시험, 곧 시련을 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영원히 실패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의 사상이나, 관념이나, 교리나, 신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체험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또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허락하시는 복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신념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믿음입니까? 반복하지만 신념과 믿음은 분명히 다릅니다. 신념은 인간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인 반면,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념이 아무리 고상하고, 순수하고, 깨끗하다 할지라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신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며, 헌신짝처럼 여기더라도 그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신념 사이에서 헛갈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대인들과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는 바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광신적 종교 신념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마게도냐 지역을 돌며, 흉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모금한 바울은 헬라에서 배타고 수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바울을 따라다니며 박해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배에 탔을 때를 이용해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빠른 뱃길을 포기하고, 다시 마게도냐 지역을 도는 육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바울을 죽일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결사대가 조직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40명이 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40”이라는 숫자는 “많다,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모두 광신적인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끄는 리더십은 광신적인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가졌던 바로 그 신념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예수 믿는 자들을 잔해 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전체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졌던 반면,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들을 이끄는 리더십은 광신적인 열정, 곧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광신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과 열정으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 생각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자기들 생각이 어디 하나님 말씀이라도 된 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냥 웃고 넘어갈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의 권위를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얼마나 큰 권위를 부여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 따라오지 않으면 사정없이 판단합니다. 정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상대방을 섬깁니다.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할 때는 정말로 완곡하게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하면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 하셔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바울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신념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타락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4-15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무리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안토니오 성안에서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울에게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민하던 무리들이 마침내 생각해 낸 것은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도 상당한 적개심을 가진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무리들은 바울을 지지했던 바리새인들보다는 사두개인들이 자기들의 뜻에 확실한 지지를 보내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무리들은 공회가 천부장에게 재심을 요구하여 바울을 데리고 나오는 순간 죽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재심을 요구해달라고 구하기 위해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무리들에 의해 소집된 종교지도자들에게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관원으로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죽이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무도한 무리들의 요구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바울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겠습니까? 미움 때문이었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안에도 종교적인 열정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종교적 신념이 분명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정부와의 정치적인 마찰을 충분히 예견하면서도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들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열정, 곧 신념은 마치 양날의 칼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종교적 열심은 자신의 종교를 전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신념에 불과한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열정을 사도 바울을 죽이는 일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종교적 열정, 곧 신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종교적 열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무리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에 뜻을 합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언제나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숨겨놓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16절입니다.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그는 바울의 조카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 때 왜 예루살렘에 있었는지, 어떻게 암살계획을 알게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단서를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몹시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그 동안 자신을 믿고 따라 주었던 많은 신하들이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다윗이 가장 아끼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아히도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다윗의 모사로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우리아와 밧세바의 일로 반역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군사 일만 이천 명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그들을 데리고 다윗이 숨어 있는 곳으로 가서 겁을 주면, 다윗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도망을 갈 것이니, 바로 그 때 혼자 남은 다윗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압살롬을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아히도벨 자신에게는 개인적인 복수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기막힌 작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작전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압살롬은 갑자기 다윗의 신복 중 하나였던 후새의 이야기도 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후새는 “① 몹시 화가 난 다윗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② 다윗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용사라서 섣불리 접근 할 수 없고, ③ 다윗은 병법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만약 압살롬의 사람 중에서 몇 명만 죽여도 압살롬이 완전히 패했다는 소문을 내어 전세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작전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후새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압살롬은 훨씬 좋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물리치고 대신 후새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 이유를 삼하17:14절은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역사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후새는 제사장인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주면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강을 건너 피하게 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성안에 숨겨져 있는 여자아이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때까지 이름 없는 여자아이는 성안의 정보를 다윗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소식을 전하기 전에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후림 지역으로 도망간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한 마을의 어떤 집 우물 속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여인은 우물 덮개를 덮고, 그 위에 곡식을 깔아 두었습니다. 잠시 후 들이닥친 압살롬의 군사들은 “그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태연히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압살롬의 군사들이 돌아간 후, 거기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윗에게로 가서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요단을 건너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아히도벨은 자신의 작전이 실패한 것을 알고,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물 덮은 여인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여인이 한 일은 지극히 작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여인의 행동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다윗이 망하고 압살롬이 승리를 했다면 메시아의 왕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속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조상인 다윗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정말 이름도 없는 한 무명의 여인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인의 믿음의 행동은 두 사람을 살렸고, 나아가서는 다윗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왕국의 정통성을 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물을 덮은 여인의 행동을 결코 작고 쉬운 일이었다고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여인은 물론 온 가족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때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작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바로 이곳에 두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두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지극히 작게 여겨지는 그 일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당신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게 여겨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로 만족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약속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00살이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을 때에는 “독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열국의 아비가 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신념을 포기했습니다. 이스마엘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버렸고,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는 바쳤습니다. 그는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역시 아브라함처럼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앞둔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자기 경험으로 볼 때,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들은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접고 순종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신앙인 것입니다. 광신적 신념에 사로잡혔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은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 바울을 구워하시기 위해서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예배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원수들의 신념을 철저히 깨뜨리시고, 바울의 믿음을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세워질 때, 인간의 신념은 철저히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신념의 사람입니까? 개인의 신념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신념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신념을 철저히 포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더라도 철저히 순종하십시오. 그렇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실 뿐만 아니라, 그 체험을 바탕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