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발문 등(跋文等)
* 해설 : 발문 등의 배경 설명.
(2) 연촌최선생가전시문록후서. 이식(李植)
(3) 연촌선생유사발. 송시열(宋時烈)
(4) 답이계주임술팔월칠일별지. 송시열(宋時烈)
(5) 연촌최선생가록후발. 이단하(李端夏)
(6) 제연촌선생유사후. 박세채(朴世采)
위에 나열한 5건의 문헌은 내용을 분석해보면 하나의 세트(set)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답이계주임술팔월칠일별지>는 원래 <연촌유사>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송자대전>을 원전으로 번역하여 여기에 포함하였다.
<연촌최선생가전시문록후서>는 임진왜란 이후 기정(棄井) 최정(1)이 전쟁으로 흩어져버린 문헌을 다시 수집 정리하여 <연촌유사>로 만든 1636년(인조 14)에 이식(2)이 지은 발문이고, 그 외 나머지 문헌들은 기정공이 정리한 <연촌유사>를 양정재(養正齋) 최방언(3)이 재정비할 때 추가된 발문으로 송시열(4)이 지은 <연촌선생유사발>은 1678년(숙종 4), <답이계주임술팔월칠일별지>는 1682년, 박세채(5)가 지은 <제연촌선생유사후>는 1683년, 이단하(6)가 지은 <연촌최선생가록후발>은 1684년에 각각 저술되었다.
저술 시점으로 볼 때 약 50년 정도 차이를 보이는 이 문헌들이 어떤 이유에서 하나의 세트로 구성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이식이 <연촌최선생가전시문록후서>에서
돌이켜 보면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신 것은 1451년(문종 1)인데, 1453년(단종 1)과 1456년(세조 2)에 나라에 재앙이 연달아 일어나 서로 뜻을 같이하던 많은 벼슬아치들이 해(害)를 당하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기미를 미리 알고 매우 적당한 시기에 벼슬을 버리므로 인하여 신체와 명예를 함께 보전할 수 있었다(炳幾保身)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 밝은 지혜로 미래를 미리 알고 닥쳐오는 계유정난을 피했다고 말한다.
라고 기록한 것을 두고 송시열이 <연촌선생유사발>에서
다만 그 중에서 “기미를 알고 어쩌고(知幾云者)”하는 택당(이식)의 말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여 마치 선생을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어찌 <주역>에 이르기를 “기미를 아는 것은 신(神)이다.”라고 했겠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택당에게 깊은 뜻이 숨어 있었을 것이니 몽여가 택당의 아들 계주에게 물어보면 다행이겠다.
라고 논평하였는데, 얼핏 보기에 “이식이 연촌공에게 부족함이 있다고 평가하였다.”라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일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하여 이식의 아들 이단하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으므로 논란이 확산되었다. 논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연촌공의 은퇴가 계유정난을 미리 알고 취한 명철보신인가?
② 현인이라 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는가?
③ 연촌공이 미래를 알았다함은 실제는 비웃은 것 아닌가?
등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송시열(1607~1689)은 참판(參判) 최세영(7, 1613~1686)의 친구로서 아들 양정재공(1634∼1724)의 스승이며, 이식(1584~1647)의 아들 이단하(1625~1689) 또한 송시열의 제자이다. 등장인물들은 충남 이산(논산)과 회덕(대전)에서 활동한 이른바 기호학파(8) 즉, 서인(西人)으로 같은 학통이라 할 수 있었는데, 송시열과 참판공은 비슷한 연배(年輩) 이지만 이식은 한 세대 위 어른으로 당시에 이미 죽고 없었다.
연촌공에 대한 평가 논란이 일어나자 위의 내용에 대하여 참판공은 양정재공을 통하여 이단하에게 질문하였고, 질문을 받은 이단하는 스승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질문하게 되었는데, 질문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이 <답이계주임술팔월칠일별지>이고 이단하가 송시열의 답장을 받아 보고 저술한 글이 <연촌최선생가록후발>이다. <답이계주임술팔월칠일별지>는 <연촌유사>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송자대전>에서 발췌하여 여기에 수록한 것이다.
한편 연촌공 평가 논란이 일어나자 참판공은 아들 양정재공에게 명령하여 같은 기호학파 이지만 송시열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박세채(1631~1695)에게 질문하였으므로 박세채가 <제연촌선생유사후>를 저술하게 되었다.
박세채는 김상헌(10)의 제자로 송시열과 친하게 지냈지만 훗날 서인이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으로 나누어질 때 소론의 영수가 되어 노론과 대립하였는데, <제연촌선생유사후>를 저술한 시점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무렵이다.
연촌공파는 대체로 서인으로 노론으로 이어 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위에 나열된 전주최씨 인물들은 모두 의령공파에 속한다.
그 외 연촌공 8세손으로 호참공파 처사(處士) 최기만(11) 또한 회덕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권시(12)의 제자로 송시열, 윤증(13)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른바 회니시비(14)를 기회로 송시열과 윤증의 관계가 악화되고,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설 때 윤증이 처사공에게 편지를 보내서 송시열을 멀리하고 자기편에 서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 <답최주일기만(答崔主一基萬)>이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明齋遺稿)>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어서 함께 읽어 보면 참고가 될 것 같다.
* 각주 --------------------------------
(1) 최정(崔珽, 1568~?) : 기정공(棄井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2세. 생원공(生員公) 휘 응봉(應鳳)의 아들(몽응공 휘 응룡(應龍)의 조카)로 정유재란 때 불타고 흩어져버린 문헌을 모으고 정리하여 <참의공유사>와 <연촌유사>를 만들었고 영암읍에 존양사(녹동서원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2) 이식(李植, 1584~1647) : 덕수이씨. 자 여고(汝固), 호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3) 최방언(崔邦彦, 1634∼1724) : 양정재공(養正齋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4세. 자 미백(美伯). <강희보>를 만든 참판공(參判公) 휘 세영(世榮)의 장남. <강희보 경보>는 양정재공의 글씨이다. 기정공(棄井公) 휘 정(珽)이 만든 <연촌유사>를 보완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저명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4) 송시열(宋時烈, 1607~1689) : 은진송씨.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菴), 우재(尤齋).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5) 박세채(朴世采, 1631~1695) : 반남박씨.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 남계(南溪). 탕평책의 기반을 제공한 황극탕평설을 구체화한 성리학자. 주요 저서인 <동유사우록>을 통해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7) 이단하(李端夏, 1625~1689) : 덕수이씨. 자 계주(季周). 호 외재(畏齋), 송간(松磵). 홍문관 제학으로 <현종개수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예조 판서로 <사창절목>, <선묘보감>을 찬진하였다. 저서에 <외재집>이 있다.
(8) 최세영(崔世榮, 1613~1686) : 참판공(參判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3세. 휘 세영(世榮). 자 몽여(夢與). 문성공계 전주최씨 최초의 대동보 <강희보(康熙譜)>를 만들었다.
(9) 기호학파(畿湖學派) : 율곡 이이(李珥)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가진 성리학의 학파.
(10) 김상헌(金尙憲, 1570~1652) : 안동김씨.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척화신(斥和臣).
(11) 최기만(崔基萬) : 처사공(處士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병참공파 13세. 자 주일(主一). 찰방(察訪) 휘 경(璥)의 아들.
(12) 권시(權諰, 1604~1672) : 안동권씨. 자 사성(思誠), 호 탄옹(炭翁). 기호학파로 예론에 밝았으며 문집 <탄옹집>이 있다.
(13) 윤증(尹拯, 1629~1714) : 파평윤씨.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 유봉(酉峰). 송시열의 제자로서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 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스승을 비판하여 소론의 사상체계를 만들었다.
(14) 회니시비(懷尼是非) : 회덕(대전)에 살았던 송시열과 이산(논산)에 살았던 윤증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西人) 간의 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