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시인5편.hwp
안개꽃 추억
김호정
바람 찬 골목어귀
저 만큼에서
가슴에 안개꽃 한 아름안고
하얗게 걸어왔지
추억은 세월을 역류하는 꽃 이파리
꽃잎에 묻혀
꽃향기에 취해
밤은 사정없이 출렁거리고
밤새워 안개비는 줄줄이 내렸지
줄줄이 내리는 안개비를 맞으며
추억은 안개꽃처럼 하얗게 피어났지
어머니의 젖무덤이
무던히도 생각나던 그 밤에
가을이 있는 풍경 3
김호정
천생 연분 두터운 정
차마 잊을 수 없어
이 가을 오기를 학수고대하다가
목이 길어진 들국화 한 송이
드디어 고개를 살짝 들고 수줍게 웃었다
산지사방
들꽃 내음 풀풀 날리고
한 무리 고추잠자리
가을 길 아침 햇살 속으로
편대지어 날아갔다
들판 어딘가에 둥지 틀고
풀 바람소리에
밤잠 설친 들새 한 마리
갑자기 나타나서
초음속 저공비행을 시작하면
혼비백산
고추잠자리 뿔뿔이 흩어진다
산들바람 잠시 걸음 멈춘 사이
건들거리며 패션쇼를 준비하던
코스모스 꽃잎위로
고추잠자리 한 마리
곤두박질치며 추락한다
오군단의 대란
김호정
변화무쌍한 칼라 옷 지어 입고 소형 로켓으로
중무장한 군사들이
파도를 굴리며 대장정에 오른 오군단의 긴 여정에 I
빨간 불이 켜졌다
북극해의 이상 기온으로 심한 난류(亂流)가
오군단의 적정 온도에 채 미치지 못하자
예측 불허의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
오군단의 절대불문율에 구멍이 뚫리고
생존을 위한 비상 탈출 작전이
동해 바다 깊은 물속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었다
가난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흉어기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르던 어촌 가계부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망연자실한 오군단 산하의 어부들은 하나 둘 빈촌을 떠나
대처로 나가기 시작했다
연 근해로 뿔뿔이 흩어진 오군단의 잔챙이 새끼들이
어쩌다 간간이 낱마리로 잡혀와
겨우 끼니를 연명하는 어민들의 수심 가득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골을 파고 지나갔다
흥청거리던 옛 풍어의 시절을 추억하며
촌로들은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불끈 솟은 힘줄
거무틱틱한 팔뚝으로
느슨해진 닻줄을 힘껏 당겨본다
선물 이야기
김호정
명절이 오면
우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주어서 좋고
받아서 고마운
한 바가지 냉수 같은 선물
후한 인심 이웃하고
오손도손 동그랗게 모여
사람 사는 재미에 푹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살고 싶다
잘 주고 잘 받으면 선물이 되고
잘 못 주고 잘 못 받으면
뇌물이 되어 뒤가 구리니
양 질 따질 것 없이
엽서 한 장에
정성만을 주고받으면 안 될까
뿌리 깊은 나무
김호정
빛바랜 얼룩무늬
회색 낡은 예비군복을
몸에 걸치고
혹한기
동계 훈련에 참가한 병사처럼
도심의 가로에 줄지어 서있다
환경 미화원의 손으로
사정없이 잘려나간 뭉그러진 몸뚱어리
송곳 같은 겨울바람이
후비고 지나간다
황사와 매연과 미세 먼지가
한데 어우러져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이 숨 막히는 어두컴컴한 도심의 네거리에
나무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부활의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재생의 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