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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저녁 7시에 한강성당 대성전 2층에서 최승정신부님 구약특강이 시작되었어요. 지난 시간 다니엘서에 이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지? 모두가 느끼고 있는 그런 마음으로,
그리고 요즘 더 무거운 마음으로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라고 하셨어요.
2001년 경에 알고 있던 후배가 법조인이 돼서 신부님께 만남을 청해 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7~8명의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던 검사들과 함께 나왔다고 해요. 당시에 현직 대통령이 자리에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시진 못하지만...
그분들이 얼마 전부터 모여서 함께 성경을 읽고 있는데, 신부님께 지도 신부가 되어주시라고 청했는데, 그때 신부님은 본당 신부하면서 신학교 강의 나가시는 상황이라 정기적인 만남을 가질 시간이 없어서(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 더군다나 검사들에게 못 지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정말 미안한데 그 약속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나중에 시간 여유가 되면 꼭 함께 성경 읽으면서 해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당시에 사제 생활을 하시면서 권력을 갖고 있는 분들과 친하게 지내시는 것은 피하고 싶은 일중에 하나셨는데...
그때 어렵다 하고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요즘에 만약 그 모임을 계속하셨다면은..
정치 지도자들과 사법부의 있는 분들, 권력을 갖고 있는 그들과 함께 하였다면,..... 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셨다고.... 그게 사제가 할 일이었는데....
18세기 철학자 중에 볼테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인데, 그에 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서 "관용"이라는 사상을 이야기합니다. 프랑스어로 똘레랑스(tolerance)
그것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설혹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말할 자유를 나는 함께 지키겠다." 조금 속된 표현으로 "말 같지 않는 소리를 해도 그 사람이 말할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
비상계엄에 관한 여론조사에서도 11%는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이해하고, 84%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의 생각도 굉장히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고, 그런데 내가 84%라 해서 11%의 생각이 나쁜 것이냐?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것 같고, 우리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다른 정보와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나라 사법부가 헌법 재판소가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것이고, 우리도 그것을 존중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이냐?라는 것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있는가? 없는가? 에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신다고
예전에 본당신부님이셨을 때도 "우리 신자들이 정치에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관해서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성서백주간 지도신부를 오래하셨는데, 성서백주간은 성서 묵상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에요. 백주간 묵상 나누기에 규칙이 하나 있는데, "누군가의 나눔에 토를 달지 않기."인데 종종 성서백주간의 모임이 자주 깨지는 이유가, 어떤 사람이 나눔을 했을 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내가 성경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고 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하면은 그 모임은 깨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신문에서 정치이야기를 했을 때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문제에 대해서 명절에도 가족끼리 모였을 때 떠들썩한 정치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 한 사람 한사람 말하고 거기서 끝! 거기서 토론이 시작되면은 인간에게 있는 호승심으로 인해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로 나와 다른 것에 관해서 마무리했으면, 똘레랑스.....
사회적 관용이 얼마나 두터운가? 이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닐까? 같은 문제가 아닐까?로 생각하신다고....
두 번째 반성하고 싶은 것은, 오늘 수산나 이야기와도 관련이 됩니다.
권력이라는 단어인데요, 권력이라는 것은 모든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지금 이 현장에서 누가 권력을 갖고 있을까요? 마이크를 든 사람이 갖고 있어요. ^^
마이크를 들고 있는 신부님은 이 마이크(권력)를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까? 관해서 어젯밤부터 고민을 하셨다고...모든 관계에서 발생하고마는 나에게 주어진 권력이 있어요. 나는 그 권력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 권력이 잘못 사용되는 과정에서 한발자국만 더 나가면 그땐 그 권력이 폭력이 됩니다.
이건 세속적인 관점, 철학적인 관점에서 똘레랑스와 권력에 관한 반성이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야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민주주의의 완성입니까?
아닙니다! 우린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민주주의 최종적인 목적이 권력의 정의로운 사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갑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권력의 정의로운 사용을 넘어서는 것이 복음적인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적가치입니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졌지요?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주신 이 세상, 하느님의 창조 세계도 물질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사회적 사건에도 그것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면과 영적인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오늘 강의에 오신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을 한번 던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비상계엄, 이런 탄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날마다 언론이 떠드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시대의 징표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와 같은 사건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과 함께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질문과 맞닥뜨리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인 사건이니까, 신앙의 문제가 아니야!" 하고 말할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과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서 있는 그 어떤 것도 신앙의 문제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알아듣고 또 어떻게 꿈꾸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합당한가? 라는 것을 보면서 이 질문을 멈추지 않고 던져나가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을 우리들이 함께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지난 시간에 다니엘서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이번에는 성탄시기라서 신부님이 굉장히 빠른 시간에 되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내용을 기억하실 거에요. 기억을 잘 못하시는 분들은 지난 시간에 안온척 하시면 됩니다.
다니엘서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 하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언어적으로 보면 세 가지 언어로 쓰였습니다.
제일 몸통은 아람어로 되어있고,
첫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히브리어로, 12장까지.
오늘 이야기하실 13장 수산나 이야기와 14장 벨과 뱀의 이야기는 하나의 부록같은 이야기인데 그것들은 또 그리스어로
그렇게 세 언어로 쓰였더라.
그리고 다니엘서를 쭈욱 읽어보니
1장~6장 : 지혜문학
아!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고 거기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을 다니엘이 나서서 지혜롭게 해결해 주면서 유배간 비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곳에서 굉장히 높은 지위로 올라갈수 있었다.(이미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라는 인물과 비슷) 여기까지 보면은 어떤 역사적인 설화와 비슷한 내용이더라.
7장부터 묵시문학으로 넘어가고,
묵시문학이라는 것은? 묵시문학이라는 주제로 700페이지 분량의 책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신부님이 두 세문장으로 요약해 본다면?
묵시문학이란, 우선 천상과 지상을 나눈다음 천상의 질서가 지상에서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위해서 천상에서의 신비가 지상에 있는 누군가에게 먼저 묵시적으로 꿈이나 환시나 환청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 그런데 천상에 있는 신비는 너무나 알아듣기 어려워서 그는 그가 본 꿈이나 환시나 환청을 알아듣지 못해서 천상의 누군가가, 바로 천사가 도와줍니다.
"너가 이런것을 봤지? 이건 이런 뜻이고 요건 요런 뜻이야." 라는 도움을 받고 그는 비로서 그것을 알아 듣게 되는 것.
그런데 그것은 이제 천상에 있는 질서가 지상에서 실현될 것이라는...그러므로 매우 자주 묵시문학은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더라.
천상의 이상적인 질서가 지상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천상에 질서가 지상에서 완전히 실현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에스카톨(종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지상의 질서는 불완전한데, 천상의 질서가 지상의 질서로 실현되면 뒤집히게 되고 그것을 신약 성경에서는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 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보아왔던 그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의 시작이야.
이사야서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이야기 했고...
복음서에서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 너 학교에 가서 꼴찌해야해."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런 종말론적인 가르침이더라.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묵시라는 말을 교회 안에서는 계시라고 사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신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신다를,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의미와 묵시라는 말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교리서를 보면 묵시라는 말은 거의 안나오고 계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묵시문학이라는 주제아래, 천상적인 신비가 지상에 어떤식으로 드러나는가? 관해서...
따라서 1장~6장의 다니엘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지혜, 현인의 모범적인 스타일)
하지만 7장부터의 다니엘은 못알아 들어요. 그리고 그것을 못알아 들어서 아파요. 그래서 천사가 그를 도와줍니다. 성경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주석가들은 그 천사를 해석천사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 앙겔로스(Angelos)는 천사라는 의미.
해석은 인터프레스(interpres), 앙겔로스 인터프레스 라고 부르더라. 문학적인 유형에 관해서 기억하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뒤따라 부록처럼 나오는 수산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앞서 다니엘서 7장에보면 '사람의 아들'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표현은 메시아라는 말과 관계되는 표현은 아직은 아니에요. 다니엘서 7장에서 나오는 말은 유일신관인 상태에서 모두에게 종말의 시간이 올텐데 각 나라마다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가 통치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서 내려오는 그 천사가 다니엘서의 세계관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구약에는 성경에 들어와 있는 책들만 있던게 아니라 성경에 들어오지 않는 책들도 있어요.
대표적인게 희년서, 에녹서,우리의 구약성경에는 에즈라기가 있지만, 에즈라2서, 에즈라3서, 에즈라4서와 같은 책들이 있어요. 보통 신자들은 그것을 읽을 기회가 없어요. 하지만 구약 외경에는 그런 책들이 있어요.
그런데 에녹서와 에즈라4서를 보면,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과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메시아니즘을 결합시켰어요. 그래서 에녹서와 에즈라4서에서 "아! 다니엘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 메시아야!"라는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님에게 그 해석을 덧붙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호칭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게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그 호칭이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되는 곳이 마르코복음 13장이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과 함께 다니엘서가 갖고 있던 묵시문학적인 면이 마르코13장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마르코복음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르코복음 13장을 마르코의 묵시록이라고 부릅니다.
마르코의 묵시록인 13장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오면서 올리브 산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중에 하나가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자, 예수님께서 '저 성전은 이제 무너질 것이고 거기에 쌓인 돌 가운데 어느것 하나 얹혀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성전이 더이상 그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고를 하시고,
성전의 파괴가 첫번째 테마라면, 두 번째는 성전의 파괴와 맞물린 세상의 종말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아들'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마르코 13,24절부터 그 내용이 나오는데요.
마르 13,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라는 다니엘서 7장을 연상시키는 그 내용이 나옵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 나중에 14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이 재판을 받아요. 한나스와 카야파에게, 둘 다 대사제인데, 텍스트에 나와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대사제가 어떻게 둘이야?' 하면서 설명하기 어려워하는데,
역사적인 설명을 잠깐 해주시면...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대사제가 종신직이에요. 죽을때까지 더이상 그 사람이 대사제를 할수 없게 되면 다음 대사제가 돼요.
한나스는 장인이고 카야파는 사위였어요. 그런데 예수님 시기에는 로마가 전체를 통치했고, 로마제국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지만(역사적으로 확인된 기록은 없어요) 한나스가 종신직으로 대사제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위였던 카야파가 대사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한나스에게 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한나스에게 재판을 받을 때 예수를 고발하는 내용이 바로 마르코복음 13장의 내용입니다.
마르코복음 14장을 보면 (재판의 내용)이 나오는데ㅡ 고발하는 사람들이 마르코 14,58에 고발합니다.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 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13장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것을 거짓증언으로 얘기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중에 요한복음에 가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세요. 따라서 여기에 관해서는 신학자들의 많은 토론이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과연 이 이야기를 했을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왜 달리 증언을 한걸까? 라는, 하지만 마르코복음서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고 따라서 마르코복음 안에서 보면 그 말씀은 거짓증언이고 예수님이 성전이 허물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마치 "내가 허물어 버릴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성전을 모독했다.라는 첫번째 고발.
두번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 14,62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63 그러자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따라서 한나스의 법정에서 한나스가 예수를 신문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을 바로 마르코복음 13장의 내용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고발당했고, 한나스는 예수가 죽어야 한다는 사형에 관한 판단을 했고, 하지만 예수를 사형시킬 권리가 유다의 법정에는 없어서 예수를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빌라도는 성전을 무너뜨리라고 했는지,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는지 관심이 없어요.
오직 '너가 유다인들의 임금이야?'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이것은 사실 '너가 도적떼의 수령(대장)이야?' 하고 물어보는 것과 같아요.
왜냐면 빌라도가 예수님이 임금인지를 알고자 했다면, 올바른 표현은 '너는 이스라엘의 임금이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을 빌라도가 쓰지 않았어요. '너는 유다인들의 임금이야?'는 마치 '너가 도적떼의 대장이야?' 라는 표현이고, 거기에 관해서 예수와 대화합니다.
빌라도의 모든 관심은 예수가 사회적인 소란과 소요, 내지는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킬 수 인물인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에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갖고 있는 사슬구조입니다.
다니엘서가 갖고 있는 종말론적인 그림 안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구약의 외경에서는 이사야의 메시아니즘과 결합시켰고, 그것을 신약성경 안에서는 예수에게 부여하였고, 그것이 특히 공관복음서 안에 묵시문학적인 종말론적인 예수의 예고에 맞붙어 있었고 결국 그것이 예수 죽음의 죄목이 되었다. 라는 단계적인 그림들을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내용이라고 다시한번 말씀해 주셨어요.
다음과 같은 표를 보시면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곧 가톨릭 교회의 전통입니다. 이 표에서 밑줄 그은 작품은 총 토비트, 유딧, 에스테르, 마카베오 상하....그리고 바룩 9개입니다.
구약성경, 우리에게 전해진 구약성경은 46권인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전통에 따라서 초대그리스도교부터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읽었던 그리스어 번역본을 우리 신앙의 경전으로 인정했어요. 반면에 구약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 말을 사용하던 유다인들은 그들 그 셉뚜아진따로, 그리스말로 번역된 모든 것들 중에서 몇권은 빼고 나머지만을 히브리말로 보존했어요. 그래서 39권입니다. 46-39=7인데, 9권이 적혀있어요.
왜그럴까요? 에스테르와 다니엘서는 부분적으로는 히브리말로 되어있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말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 두권은 히브리말 경전에도 들어가 있어요. 따라서 에스테르와 다니엘서는 히브리말과 그리스말로 함께 번갈아가면서 들어가는 문학작품이라서, 개신교 성경에도 보면, 개신교 성경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전통에 따르지 않고 이상하게 유다교 전통을 따릅니다.
히브리말로 되어있는 것만 구약이다! 라고 따릅니다. 그러다보니까 개신교 전통은 39권인데, 개신교 구약성경을 봐도 에스테르기가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에스테르기보다 훨씬 더 짧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있는 에스테르기는 히브리말과 그리스말고 되어있는데, 그리스말 본문을 개신교에서는 뺏어요.
그리고 다니엘서를 보면 세아이의 노래와 이제부터 보여줄 수산나와 다니엘서 14장의 벨과 뱀의 내용이 개신교 성경에서는 없어요.
하지만 천주교 성경에서는 볼수 있습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그 부분을 경전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오늘 신부님 강의를 듣고서 며칠있다 개신교 친구와 차를 마시다가
"야~~ 내가 지난 번에 다니엘서 13장에 관한 강의의 말씀을 들었거든."
그럼 개신교 친구가 "어??? 다니엘서 12장까지 밖에 없는데!! 너 이상한 강의 들은거 아니야???"😏
구약의 구분 <그리스도교 전통>
모세오경 | 창세, 탈출, 레위, 민수, 신명 |
역사서 | 여호수아, 판관, 룻, 사무엘 상하, 열왕 상하, 역대 상하, 에즈라-느헤미야, 토비트,유딧, 에스테르, 마카베오 상하 |
시서와 지혜서 | 욥, 시편, 잠언, 코헬렛(전도서), 아가, 지혜, 집회 |
예언서 | 대예언서 :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바룩, 에제키엘, 다니엘(세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소예언서 :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 |
라고 이야기하였을 때 지금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설명하시면 됩니다.^^
조금 복잡한 내용인데 이해하셨죠?
개신교 성경에서는 지금부터 하는 다니엘서 13장 수산나와 다니엘서 14장의 벨과 뱀의 내용이 없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수산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가릿의 다닐루 Dan'ilu
= 엘(EL)이 재판/심판한다
바빌론에서, 다니엘도 다니엘서 1장을 보면 거기로 끌려갔다가 지혜로운 사람이 돼죠.
비슷하게 바빌론에서 요아킴이라는 사람이 힐키야의 딸 수산나를 아내로 맞아 들여요. 그런데 당시에 바빌론에 있었던 유다 공동체 안에서 재판관(최고 권력자= 대법관)으로 활동하던 두 원로가 수산나를 협박해서 그녀와 통정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수산나는 두 원로를 "나는 부정한 짓을 하면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거부하자, 그 두 원로가 오히려 그녀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수산나가 탄원하자, 주님은 수산나의 목소리를 듣고 다니엘 안에 있던 거룩한 영을 깨우고, 다니엘은 원로들을 심문하여 그들의 증언이 거짓임을 밝혀 냅니다. 그리고 두 원로들은 처형되고 다니엘은 성서의 말씀 그대로 인용해서
"다니엘은 큰 사람이 되었다."(짧은 수산나 이야기의 결론)
이전 시간의 다니엘서에서도 말씀하셨는데요, 이스라엘보다 조금 북쪽에서 우가릿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굉장히 많은 토판들이 발견되었어요.(1960년대, 1970년대에) 그런데 그때 그 토판 중에 하나에서 다닐루라는 임금이 발견되었는데, 그 토판에는 다닐루라는 임금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가득했어요. 다닐루는 재판을 참 지혜롭게 잘했다고 해요(구약성경에서는 솔로몬의 지혜와 재판)
그런데 그 다니엘이라는 말자체가 한편으로는 우가릿의 다닐루를 닮아 있고 히브리 말에서는 단(소송한다는 뜻입니다)
엘이 재판한다/ 엘이 소송한다/ 엘이 심판한다. 라는 의미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 안에 지혜롭고 정의로운 재판관의 모습이 히브리말로도 써있고 우가릿의 다닐루라는 임금과도 서로 겹치더라는 의미.
그리고 이 수산나 이야기의 중심에는, 모세의 율법과 의로움(+지혜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전에도 지혜문학을 하면서도 이 설명의 말씀을 하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가서 바빌론 문화의 기저에 있는 지혜 사상과 맞닥뜨립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들이 가져온 야훼 신앙과 이들이 갖고 있는 지혜 사상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이스라엘 신학자들(사상가들)은 바빌론의 지혜사상이 이야기는 하는 지혜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는데 거기에서 뱀이 나오는데 그 뱀이 지혜를 상징하는 거야. 그 뱀 이야기를 듣다가 인간은 행복해졌을까? 불행해졌을까?' 이야길 합니다.
그 뱀의 이야기를 듣고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은 얻어 입었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 그런 지혜 사상은 나쁜 거야." 이 표현이 지혜 사상을 대하는 이스라엘 사상가들의 첫번째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는 두 번째 태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문학에서 등장합니다.코헬렛, 잠언, 집회서, 지혜서...
그 지혜문학에서 이스라엘의 사상가들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아~~~~!! 지혜, 그것은 정말 좋은 거야. 그런데 정말 지혜로운 게 뭔지 알아?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을 경외함에 있어." 그것을 끌어오는 논리는 코헬렛에 나옵니다.
코헬렛의 시작에서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말하지만 그게 코헬렛의 결론이 아니에요.
코헬렛의 결론은 "왜? 그 모든 것이 헛된줄 알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기 때문이야. 인간의 노력으로 그 헛됨이 사라지지 않아.따라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달려있으니,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해. 그래서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을 두려워함에 있어." 라는 거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할까요?
하느님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해.(율법에 대한 충실함을 이야기함)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야.
구약에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의로운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곧 의로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혜 사상을 따로 배우러 갈 필요가 있나요? 아니면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됩니까?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됩니다.^^
내가 건강하게 밥이나 반찬을 고루고루 먹으면 건강해질 수 있어. 하고 말하면은 약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요. 하루 세끼 건강하게 먹고 적당히 움직이고 잘웃고 행복하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곧 지혜로운 사람인데, 의로움과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문학에서 붙어다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13,3을 보면 수산나의 의로움, 지혜로움을 이야기해요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날에도 탈무드를 보면 부모의 의무가 나옵니다.
첫째 토라를 가르칠 것.
둘째 생계의 수단을 가르칠 것.(고기를 주는게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그런데 그것보다 앞선 것이 토라를 가르쳐라. 우리들이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육신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리 다음 세대의 육신을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생존해 나갈지를 한편으로 가르쳐줘야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느님의 신앙과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쳐 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의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셨죠?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부모로서 같은 의무를 가지고 있어요.
다니엘 13,48-49에서는 두 원로가 오히려 수산나가 자신들을 유혹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면서 수산나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법정에서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법정에서 증언하면 그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 됩니다. 더군다나 이 둘은 대법관이에요. 그러면 수산나는 율법에 따라서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러자 수산나가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수산나가 사형당할 그 행렬을 막아선 다니엘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또는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두 원로를 따로따로 신문을 하는데 일치하지 않았어요. 결국 두 원로들의 잘못이 밝혀지고 수산나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수산나가 돋보이는 점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토라의 가르침을 지켰다는 것.이 수산나의 지혜로움과 의로움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강의를 준비하시면서 어쩌면 수산나의 이야기가 2024년 12월 대한민국 현실과 비슷하고, 여기서 말하는 두 원로는 권력자이고 수산나는 토라를 지키려는 사람, 바꾸어서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를 어떤 권력을 지닌 사람이 훼손하려고 했을 때, 결국 지켜내는 다니엘의 이야기가,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보내는 그 이야기가, 오늘날 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시대에는 수산나 시대의 다니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이 안에서 지혜롭게 어떤식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길을 발견해 내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우리 다음 세대의 미래가 달려있는 것이겠죠. 더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떻게 알아듣고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관해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입으로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과 나의 선택 안에서 기도가 우리 삶에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바라보는 것이 수산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닐까?하고 말씀하셨어요.
에제 14,13 "사람의 아들아, 어떤 나라가 배신하여 나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손을 뻗어 그 나라의 양식을 끊어 버리고 그 나라에 굶주림을 보내어, 거기에서 사람과 짐승을 잘라 낸다고 하자.(하느님 심판의 순간)
14,14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우선 한가지 우리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에제키엘서 14장의 저자의 눈에 의로운 사람 셋에는 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나올 것 같은데, 오경에서는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아니라
유배중에 예언자인 에제키엘은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의로운 사람은 노아, 욥, 다니엘을 꼽더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14,19 에서 또 반복됩니다.
그 나라에 흑사병을 보내어 피로써 내 화를 그 나라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잘라 낸다고 하자.
14,20 거기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아들도 딸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은 의인만 구하고 죄인은 심판하신다)
왜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 전에 한번 설명하셨어요. 에제키엘서는 너무나도 과장된 신명기 신학과 맞서고 있습니다. 상선벌악의 신학인데, 연대적이에요. 아버지가 잘못을 하면 그 벌을 한 4대쯤 내려가서 받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가장 악한 임금이 므나쎄였는데, 므나쎄에서 4대 내려와서 유다가 망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삼대 사대에 걸쳐서는 누군가의 죄를 기억하시고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배를 온 이스라엘이 신명기 신학을 가지고 과장되게 해석하는 겁니다. 신학에 잘못된 해석으로,
"어, 우리가 유배와서 이렇게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조상때문이래." 그러자 에제키엘 예언자가 화가나서 이야기합니다.
"단지 조상들의 잘못일까? 아닐껄? 그러면 너희는 잘하고 있어?"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시지,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은 항상 정확히 셈하시는 분이시다. 어느정도로 정확하냐? 지금 이시대에 하느님이 심판하신다고 해도 의인인 노아, 다니엘, 욥은 분명히 구원하실 거야. 하지만 그 노아와 다니엘, 욥의 아들이래도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야."
따라서 상선벌악의 신학이 지나치게 과장되서 해석되는 것, "조상의 죄때문에 자손들이 벌을 받아."라는 것을, 이제 자손들이 모든 것을 조상탓하는 그런 모습에 대해서 에제키엘은 옳지 않다는 이야길 하고 있습니다. 그때 등장한 노아, 다니엘, 욥^^
다니엘이라는 그 이름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친숙하고 알려진 이름이었더라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볼수 있어요.
뒤따르는 내용은 다니엘서 14장(벨과 뱀)
다니 14,1-22 벨= 마르둑 우상
벨이라는 우상이 나오는데 그 우상의 모양을 잘모르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벨의 모양을 하늘의 임금님의 모양이 아닌가? 라고 하는데, 신부님은 임금이 자기 모습을 형상화 시킨게 아닌가? 라는 학자들의 의견도 읽어보셨다고 해요.(신부님은 잘 모르시겠다고...)
아무튼 그 마르둑의 우상이라고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우상이라고 했을 때 다니엘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황제의 신상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마르둑의 신상이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가능성을 우리들이 열어둘 수 있을것 같다고 하셨어요.
마르둑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다니엘은 그것들을 통해서 우선...
다니 14,1-22절 다니엘은 키루스와의 대화에서 살아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손으로 만든 벨을 대조하면서 다니엘은 벨의 사제 70명과 대결합니다. 비슷한 얘기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다니엘은 지혜로움을 통해 벨의 사제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벨과 그의 신전을 부수어 버립니다.(우상에 관한 테마)
다니14,23-32 뱀= (마르둑의) 지혜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뱀이 마르둑의 지혜
다니엘은 자신의 지혜로움(다니엘은 의로운 사람이었죠?!), 따라서 토라의 지혜로움을 통해 뱀을 죽게 하자, 바빌론인들이 임금에게 다니엘을 넘겨받아 사자굴에 던져버립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무사하였고,
하바꾹 예언자가 천사의 명령에 따라 다니엘에게 음식을 가져가는데, 그리고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해요. 그러자 다니엘의 무사함을 본 임금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주(야훼) 다니엘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위대하십니다. 당신 말고 다른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다니 14,41)" 이 고백은 바로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 페르시아의 황제 키루스가 이스라엘의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하게 되었다. 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서 14장의 내용은 둘로 나뉘는데 둘 모두 우상과 관련이 됩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하는데, 고대 세계 특히 다니엘서가 쓰여진 주전 2세기에서 3세기, 4세기 까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이때 유다인들은 주변 세계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그 대표적인 문제가 "우상 숭배" 내지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변 세계와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하는데, 왜 유다인들은 하지 않지???" 라고 말하면서 그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랬을때 그들이 주변 세계와 타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에 문제에서 다니엘서 14장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야훼 하느님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고, 다른신의 우상을 만드는 것조차 우리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몸짓을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할, 거부해야할 우상은 많이 있습니다.
"어? 그런거 없는 것 같은데요?"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음 문장을 완성해 보십시오.
"나는 ...... 없이는 못살아." 그 무엇무엇이 다 우상인거죠. "나는 드라마 없이는 못살아." "나는 스마트폰 없이는 못살아." "나는 돈 없이는 못살아."
우리 마음의 가장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서 뜻밖에 돈과 권력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서, 우리들은 너무나 잔인하고 너무나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노벨상 수상식이 있었죠? 노벨상 수상식에 앞서서 한강이라는 작가가 강연을 스웨덴에 가서 했는데, 신부님에게는 큰 위로가 되셨다고 해요.
그 강연 중에 작가가 "이 세상은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한지...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폭력적이고,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또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인지..."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어요.
신부님이 갖고 있는 인간학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바다위에 떠있는 빙산의 꼭대기에요. 그 밑에는 빙산의 아랫면이 있어요. 그 아랫면에는 아직 위로 올라오지 않은 많은 것들이 수면 아래 담겨있어요. 그 안에는 굉장히 악한 모습도 있구요. 그 안에는 정말 천사같이 착한 모습도 있습니다. 근데 그것들이 어느순간 발현되죠. 관계 안에서 ....발현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돼준다는 것. 우리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는 것. 우리가 누군가에게 밝은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좋은 면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사람의 악한 면이 세상으로 돌출되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몇년 전에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이야기하면서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왜 헬조선이죠? 날씨가 안좋습니까? 기후가 어둡습니까? 우리나라가 헬조선인 이유는요,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상처주는 그와 같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아까 말씀하신 관용적인 태도,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너무나 자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이런 우상과 맞서는 다니엘의 모습 안에서 우리들이 무엇과 맞서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또 다른 질문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림의 시기안에서 다니엘서 13장 수산나의 이야기, 다니엘서 14장 벨과 뱀에 관한 이야기 다시 한번 성찰하면서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 안에 다시금 태어나실 수 있고 또 우리 안에, 이 사회 안에서 다시 한번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용기와 지혜를 주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이 시기를 보냈으면 합니다.
강의 말씀 마무리하시면서, "성탄 잘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