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의 벌판에 홀로 서라.
세계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된다.
길인 듯 길이 아닌 곳에 선,
잘 아는데도 뚫고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뱅뱅이질 하는 그 두려움과 낯설음.
사실은 내 삶이 혹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진행되어 온 것이다.
겁나는 세상, 늘 낯설은 사람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싶어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했다.
지상에 눈이 두터워지면
더 이상 먹이를 찾을 수 없는 노루 한 마리.
드문드문 저녁연기 피워 올리는 인가가 있는 들판으로
겁먹은 채 내려오는 노루 한 마리.
허기지고 지쳐 아니 오직 목숨줄인 먹이를 위해, 살고 싶어,
죽음을 겁내면서 막막하게 설원을 걸어온 노루 한 마리.
그 노루가 나였다.
먹장 같은 죽음의 커다란 아가리가
나를 덥썩 삼킬까 봐 염불처럼 외워댔다.
살고 싶어, 살아야 해, 살아 남아야 해.
인생의 맛은 참 지랄 같았다.
달콤새콤하거나 다달보드레한 어린 시절은 잠깐,
헛물켜게 들쩍지근하거나 시큼떨떠름해졌지.
지금에야 물론 무맛의 신선함과 담백함을 알 만하지만
인생은 아직도 타분하거나 짐짐하다.
솜사탕처럼 눈을 한 움큼 퍼서 먹는다.
개운하고 시원하다.
한 움큼 퍼서 머리 위로 던진다.
면사포가 아니라 하이얀 고풀이 띠다.
활개치며 눈사진도 찍고
얼굴을 깊이 눈 속에 묻어 마스크도 찍어낸다.
그 위로 눈발이 쌓여 희미해진다.
그렇게 나는 사라져 갈 것이다 흔적도 없이.
그래도 나는 포근하다.
눈밭에 서서. 꼭꼭 처닫은 마음을 열어 주니까.
가벼워지니까. 작아지니까. 비워지니까.
설경에는 아름다운 시학(詩學),
깊은 미학(美學)이 있다.
김용옥:
중앙대학교 영어 영문과 졸업. 전북문학 등단
수필집 『생놀이』,『틈』,『아무것도 아닌 것들』,
시집: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세상에 용서 해야 할 것이 많다』,『그리운 상처』.
이 글은 백지로 시작해서 백지로 끝이난다.
그 백지는 폭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 폭설은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지친 노루를 생산하기도 한다.
그 백지는 과거의 기록이 지워진 것이고,
또한 새로운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과거의 기록은 개인을 향한 사랑이고
새로운 기록은 세상을 향한 사랑이다.
눈 덮힌 허허 벌판에 혼자서 서서
그 아름다움 과
험난함 속의 과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글평: 오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