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諱珽字大圭號棄井又號東園崔氏系出全州始祖諱阿高麗門下侍中歷三世有諱霮入我朝官集賢殿提學有四子皆貴季諱德之顯陵初以藝文館直提學致仕退臥靈巖之永保村扁其樓曰存養後鄕人立祠而祀之世稱烟村先生云生諱淑生員無子以仲兄司勇公仲子諱智成爲之子以蔭補宜寧縣監有學行容齋李公荇撰墓碣生諱浩文司直寔爲公高祖曾祖諱彦淸生員濟用監奉事性孝友累世同爨人稱小一蠹盖公爲鄭一蠹外孫而權遂菴先生撰墓表云祖諱樂壽生員考諱應鳳配全州李氏進士惕女廣平大君後有子二人公其長也公以隆慶戊辰三月六日生于京第及長天姿魁偉才氣卓犖文思沛然下筆成章尤長於詞賦爲時所推重①萬曆辛卯遭母夫人憂翌年値倭寇奉偏親南歸桑鄕②至乙巳赴增廣司馬試生進俱中宣廟朝姪筮蔭官光海初歷昌陵參奉③戊午移除司饔奉事④時仁穆大妃錮處西宮本院歲有葦魚進供而邦禁至嚴敢通西宮者論以逆律公慨然封進曰人而無母安得爲人於是凶黨豚怒禍將不測公之姑母爲都元帥申公砬夫人而其壻李大燁爾瞻之子也爲之解於爾瞻事遂寢然而公皆不能省世人益誦其素操焉公卽日南歸聞白沙李公卒于北謫槥而還乃跋涉千里漬綿以吊語在鄭錦南北還錄⑤癸亥仁祖改玉復授公司饔奉事供職一年有餘托以哀老解官歸鄕次歸以來辭以寓意⑥改粧烟村影幀建祠奉之卜築于存養樓舊址扁其齋曰獨樂繞之以竹石花木每時節逍遙其間家貧妻子不能自給公無所經意處之悠然以詩酒自娛飮則隨量輒醉醉則揮毫盈篇不刻意而成天啓丁卯虜亂鶴駕南下公在鄕聞報馳到公州得陪扈轉詣完山留六十餘日轉入江都五月乃退歸其後丙子虜再寇大駕駐南漢公年已六十有九老不能從然蹈海之烈溢於吟詠忠憤所激燁如電光改所謂詩可以觀焉崇禎己卯十二月十七日以疾終于家享年七十有二葬于羅州可的洞背甲之原夫人平山申氏監役礏女贈領議政華國孫生二男二女長基遠宣敎郞次基進女適李鼎養柳廷衍基遠生五男二女長宣錫隱德不仕號草堂次聖錫佑錫河錫保錫女適曺夏全姜逵基進一女李弘基李鼎養子紞女李陽敷柳廷衍二子涑潗內外孫若干人鳴呼當群凶之內訌天彛絶矣獨頴飯之繄遺人始知其有母一節卓然固己震耀靑史而逮夫大龍升天世運休明委身供職稍復淬勵將以展其懷蘊及見勳貴勢張不樂跪趨決意歛跡遯于衡泌自玆以往虜氣日强東噬且急而秉義尊周獨抱麟經畢命田間不復念當世事豈非所謂志士不忘在丘壑者歟今去公已遠門戶衰替遺跡且漸泯惜哉其七世孫穆欽摭取公譜帖及墓碣陰記暨夫遺集所錄撰次槩略千里踵門徵狀德之文於鍾永余何敢贅鳴呼公之淸名峻節百世炳然可與日星齊光則區區文字之未曷足以增損公之萬一也謹撮其出處之彰明較大者敍錄如是以竢立言之君子焉
崇禎紀元後四戊子
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世子右賓奎章閣檢校直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趙鍾永謹狀
공의 휘는 정이요 자는 대규이며 호는 기정 또는 동원이다.
전주최씨로 시조 휘 아는 고려 문하시중이며 3세대를 내려와 휘 담은 조선에서 집현전제학이 되었으며 아들 4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막내아들 휘 덕지는 문종 초 예문관직제학이었으나 나이가 많다 아뢰고 벼슬에서 물러나 영암 영보촌에 서루를 짓고 편액을 존양루라 하였다.
훗날 시골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모셨으니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마지않는 이른바 연촌 선생 바로 그 분이시다.
연촌공이 휘 숙을 낳았으니 생원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둘째 형님 사용공 둘째 아들 휘 지성을 아들로 삼았는데 음보로 의령현감이 되었고 학행이 있었는데 용재공 이행이 묘갈명을 지었다.
의령공이 휘 호문을 낳았으니 벼슬은 사직인데 이상은 공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다.
휘 언청은 생원으로 제용감 봉사인데 타고난 성품으로 효성과 우애가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칭찬하기를 작은 일두라 했는데 일두 정여창의 외손자이기 때문이라고 수암 권상하 선생이 지은 묘표에 적혀 있다.
할아버지 휘 낙수는 생원이며 아버지는 휘 응봉이고 어머니 전주이씨는 진사 척의 딸로 광평대군 후손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공은 그 중 장자로 1568년(선조 1) 3월 6일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걸출하게 성장하여 재기가 탁월하고 문사는 폭포가 쏟아지듯 장쾌했으며 붓을 들면 아름다운 문장이 만들어 졌고 한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주변으로부터 존경 받았다.
①1591년(선조 24)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홀로되신 아버님을 모시고 남쪽 고향으로 피난하였다.
②1605년(선조 38) 증광시에서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급제하여 선조 때 음직으로 벼슬에 나가 광해군 초(1608)에 창릉참봉을 역임하였다.
③1618년(광해 10) 사옹원봉사로 옮겨 제수 되었다. 그때
④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에 감금당하자 이전부터 사옹원에서 해마다 웅어를 바치던 것을 왕명으로 못하게 금지하고 또 인목대비와 내통하는 자는 반역죄로서 다스린다 했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 웅어를 밀봉하여 서궁에 올리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어미를 모른다할 수 있으리오.
그런 사람은 흉악한 무리 아니겠는가?
했는데 그 말을 전해들은 광해군이 크게 진노하여 장차 공에게 어떤 화가 미칠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의 고모는 도원수 신립의 부인인데 신립의 사위 이대엽은 당시 집권당 대북의 영수 이이첨의 아들이었으므로 이이첨이 손을 써서 간신히 사건을 해결하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공은 그에 굽히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공의 깨끗한 지조를 더욱 높이 칭송하였다. 공께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소문을 들으니 백사 이항복공이 북청에 귀양 가서 죽었다하므로 발걸음을 돌려 천리 먼 길을 달려가 지면(1)으로 조문했는데 그 사실이 금남 정충신이 지은 <북환록>에 적혀 있다.
⑤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공은 사옹원봉사로 복직되어 1년 남짓 머물다가 늙었다고 아뢰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벼슬을 사양하고
⑥연촌공 초상화를 개장한 다음 존양루 옛터에 영당을 세우고 봉안하였는데 편액을 독락당이라 하고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돌을 배치하며 꽃과 나무를 심어 놓고 계절에 맞추어 소요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아내와 자식들은 끼니를 걱정했으나 공은 태연하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시와 술을 친구 삼아 즐기면서 돈이 생기면 모두 술을 마셔버리고 글을 써서 책 만드는 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소현세자 가마가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공주로 달려가서 소현세자를 모시고 호위하며 전주에 도착하여 60여일을 머물렀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다가 5월이 되어서야 적군이 물러가므로 서울로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공은 이미 나이가 69세나 되어 늙어서 더 이상 임금을 모실 수 없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 같은 열의가 넘치는 충분을 시로서 읊었는데 기세가 세차고 왕성하기가 벼락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1639년(인조 17) 12월 17일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2세로 나주 가적동 뒤편에 서쪽을 향해 장사 지냈다.
부인 평산신씨는 감역 업의 딸이며 영의정에 증직된 화국의 손녀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는데 장자 기원은 선교랑이며 차자는 기진이다.
딸은 이정양 그리고 유정연과 각각 혼인하였다.
기원은 5남 2녀를 낳았으니 장자 선석은 덕을 숨기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호를 초당이라 했고 그 다음은 성석, 우석, 하석, 보석이다. 딸은 조하전, 강규와 각각 혼인했다.
기진은 딸을 하나 낳았는데 이홍기와 혼인했다. 이정양의 아들은 이담이고 딸은 이양부와 혼인했다.
유정연은 아들이 둘인데 유속과 유집이다.
그 외에도 친손과 외손 몇 명이 더 있다.
오호라! 흉악한자들이 일으킨 내홍으로 인목대비께서 어려움을 겪으셨으나 하늘이 내린 천륜을 끊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나서지 못할 때 대비께 합당한 음식을 올림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처음으로 공이 충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대비를 위해 지킨 절조가 특별히 뛰어나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무릇 큰 용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 운세는 뛰어나고 분명하다.
공직에 몸을 맡겨 점차 적응하여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고 공을 세워 귀하게 되려할 즈음 나라에서 윤리를 무너트리는 일이 일어나니(2)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허술한 싸리문과 숨겨진 우물(3)이 있는 시골로 돌아와서 숨었다.
그 후 오랑캐들이 나날이 강성해가고 우리나라 또한 위급해지는지라(4) 중화의 올바른 의리를 부여잡고 홀로『춘추』를 끌어안은 채(5) 밭고랑 사이에 숨어서 일생을 마쳤다.
그 때 일을 돌이켜 생각할 수 없으니 이른바 뜻있는 선비가 살았던 언덕과 골짜기를 잊지 않으려고 하지만 공이 살았던 시대는 아득히 멀어지고 가문은 쇠퇴하였으며 유적 또한 점차 스러져 묻혀 가니 애석한 일이로다.
공의 7세손 목흠이 공의 족보와 묘갈 음기 등을 거두어 모아가지고 무릇 유집으로 만들었고 또 개략적인 것을 정리한 글을 가지고 천리 먼 길을 마다하고 친히 나에게 찾아와서 행장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만 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공의 청렴한 명망과 높고 고상한 절조는 영원히 찬란하게 해와 별과 함께 빛나게 될 것이니 구구절절 문자로 적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의 실적 중에서 만에 하나라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아니할 것이다.
삼가 공의 출처를 들어내는 자료를 모아서 밝혀 비교하여 큰 것들만 추려 수록한 것이 이와 같으니 공은 세상에 교훈을 줄만 한 군자이시다.
1828년(순조 28)
숭정대부 행 예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동지성균관사 세자우빈 규장각 검교 직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조종영 삼가 행장을 지음.
*** 각주 -------------------
(1) 漬綿 : 멀리 있는 무덤을 찾아가 조문하려면 술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솜을 술에 담갔다가 말려 가지고 가서 다시 물에 담궈 술기운이 우러나게 하여 잔을 올리는 것. 친구 무덤에 제사를 올리는 뜻으로 쓰인다.
(2)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일을 말한다.
(3) 공(公)의 호(號) 기정(棄井)은 버려진 우물이라는 뜻이다.
(4) 청나라가 흥기하면서 명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말한다.
(5) 성리학의 가르침을 지킨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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