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교시금 강 경 강 의♥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약부유인 문차경전 신심불역 기복 승피
何況書寫 受持讀誦 爲人解說 ? "
하황서사 수지독송 위인 해설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 복덕은 더 클 것이다. 하물며 경전을 베끼고 수지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하는 것이겠는가?"
☞ 어떤 사람이 있어서 자신의 귀하디 귀한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셀 수 없이 긴 무량 백천만억 겁의 오랜 시간 오직 목숨 바쳐 보시만 행할 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그 과보로 받는 복보는 무척이나 클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금강경'의 법문을 공부해 "신심을 거스르지 않는 경지" 즉, "신심불역"의 경지에 이른다면,
이 사람이 그 과보로 받는 복덕은 앞의 목숨 바쳐 보시한 사람보다도 훨씬 더 클 것이다는 말씀이다. 바로 이 대목의 소 제목을 "신심을 거스르지 않는 복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유이다.
금강바라밀의 대지혜, 자성으로 스스로 구제하는 이치를 철저히 믿는다면, 다시 말해 "자심 자성" 즉 자기 자신의 마음과 자기 자신의 성품을 믿고, 더 나아가 믿는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받는 바 복덕은 앞서 말한 몸으로 목숨 바쳐 보시하는 사람의 복덕을 훨씬 능가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단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을 믿는 마음, 즉 신심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불법을 배워 그 이치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행위나 처세나 일 처리에 있어서는 모두 불법과 상반되며 불법을 잘 어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평상시 다른 사람을 충고할 때, 그 소리가 노래보다 더 아름답고 성인 군자가 따로 없다. 그러나 정작 입장 바꿔서 자신이 핀잔을 들을 때는 자신은 아무 것도 떨쳐버리질 못하고 더 이상 활짝 열려 있지도 못한다.
이 또한 믿는 마음인 신심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심 불역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 신심이 필요하고 변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수양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은 앞의 목숨 바쳐 보시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공덕을 초과한다.
하물며 금강경의 불법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글로 써서 요즘처럼 복사기도 없는 시절에 베껴 쓴 금강경을 수천 장씩 사경하여 나눠주고, 수지하고 지극한 신심으로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수행하고 매일 독송하며,
타인들을 위하여 그 이치를 아주 자세하게 풀어서, 쉽게 설명해 주는 경우라면 그 사람이 받는 복덕은 당연히 앞의, 몸으로 목숨 바쳐 헤아릴 수 없이 긴 기간을 보시한 공덕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여기서 우리 친구들이 갖는 의구심은 이런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는데, 그것을 한두 번도 아니고 세세 생생 태어날 때마다, 헤아릴 수없이 긴 기간 동안 인도 갠지스 강의 모래수만큼이나 많이 보시했는데,
어떻게 그 복덕이 금강경을 믿고 베껴 쓰고 수지하고 독송하고, 타인에게 해설해 준 공덕에 훨씬 못 미치고 부족하단 말인가? 물론 인간에게 단 한 번, 단 한 개의 생명만이 주어진다면 목숨이 더 소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세세 생생 수 없이 윤회로 수 많은 생을 반복해 살아 왔고 또 살아 갈 것이다. 즉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세세 생생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생을 몸 바꿔가며 윤회해 온 사실은 불자라면 윤회를 믿으니 충분히 이해하고 믿을 것이다.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거듭 거듭 의미없는 생을 반복하기 보다는 어느 한 생에서라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이며 진리인 금강경을 베껴 쓰고 배포하고
제대로 수지하고 독송하고 해설하여 그들을 깨닫게 하여 단 한 사람만이라도 깨닫게 하여 부처 만들거나 자기자신 이 깨달아 부처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