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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즐거워 하라
23: 39-41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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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교롭게도 주일이 <추석> 당일입니다. <추석>은 계절적으로 보면 1년 중에서 가장 좋은 때입니다. 날씨도 그렇고 계절도 그렇고 참 좋습니다. 또 햇곡식이 익어 추수하는 때이기에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만 같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금년은 너무 풍년이 들었습니다.
금년에는 태풍이 한번도 없었고 비도 적당히 내려서 곡식들이 잘 익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때인지 모릅니다.
<추석>은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조상께 제사를 드리고 이웃끼리 나누는 아주 정다운 명절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모르던 시대에서부터 하늘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하나님은 잘 모르고 살았지만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의미를 조상께 제사하는 일로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감사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감사는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신이고 성숙함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감사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조상께 제사하고 하늘에 감사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은 아주 우월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킬 명절 정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킬 명절은 세 가지였습니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인 <추수절>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3대 명절>이라 부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명절”은 그 3대 명절 중에 <수장절>인 <추수절>이라고 부르는 명절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감사절>이고 오늘 한국적 의미로 말하자면 <추석>에 해당하는 “명절”입니다. 본문은 이 “명절”에 대해 39절에서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래 동안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명절”은 말하자면 <추수감사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장절 명절>에는 몇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명절”과 의미가 같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
먼저 이 “명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유월절 명절>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감사하는 “명절”이고 <맥추절>이나 <수장절>은 풍성한 복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나게 느끼려면 농사를 지어봐야 압니다.
농사를 짓게 되면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이 계절의 변화입니다.
농사는 계절마다 그 과정과 절차가 다릅니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농사 내용이 달라집니다.
씨를 뿌리는 시기가 달라지고 거두는 시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비가 와야 할 때가 있고 햇빛이 강하게 쪼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농부들은 하늘만 쳐다봅니다.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농사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때 먼저 하늘에 감사합니다. 하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본문도 하나님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추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석”은 하늘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설”은 1년의 시작이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명절”이라고 한다면 “추석”은 풍년을 이루도록 은혜를 주신 하늘에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금년은 대 풍년이 들었습니다. 농촌에 가보니 벼가 너무 잘 익고 과일이 그렇게 많이 열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을 보고도 마음의 느낌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인 추수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두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7절을 보면 “너희는 년 세차례 내 앞에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명절날”이 되면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민족공동체 정신 형성”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지역 도시 장소 개념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정신적 고향이었습니다. 또한 영적 처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로,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 하늘을 쳐다보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자란 곳이고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절 때”만 되면 교통이 불편한데도 모두 고향으로 찾아갑니다.
고향은 정신 공동체를 형성한 곳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마음이 놓입니다.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불안했던 마음에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향으로 떠났다가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살아생전 고향에 가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귀소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개는 아무리 먼 길을 가서도 반드시 집을 찾아 돌아갑니다.
비둘기는 몇 백 마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연어나 숭어는 산란을 위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나 강으로 되돌아갑니다.
일벌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장소로 옮겨놓아도 자기 벌집이 있는 장소를 찾아 되돌아갑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태어난 곳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기를 쓰며 고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고향이기 때문에 또한 내 부모가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하신 것은 예루살렘이 그들의 정신적 그리고 영적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년 3회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또 하나는 “가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3대 명절>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 12지파가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이는 민족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도 드렸지만 그 목적은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에 12지파가 모여서 “우리는 한 형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우리”라는 점을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큰 의미였습니다.
오늘도 이것이 “명절”의 가장 큰 의미일 것입니다. 올해 “추석”만 해도 550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간다고 합니다.
고향은 부모가 있고 형제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렇게 모여 서로 우리가 한가족임을 다시 확인하고 우리가 모두 혈육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석”은 가족 공동체를 강화하는 날입니다. 가족은 이렇게 만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가족이 만나지 못하면 무슨 가족입니까?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족처럼 소중한 것이 또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정이고 가족이고 형제이고 부모이고 혈육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릅니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덜 소중한 것인지 뒤죽박죽 살아갑니다. 그래서 덜 소중한 것들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포기하고 그냥 버립니다.
이것은 무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부터 생각하겠습니까?
누구부터 찾겠습니까?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을 때 그 순간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가족들에게 부모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으로 부모에게 형제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하면서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인생의 마지막 찰나에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지금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조금 후면 이 배가 가라앉아 죽게 될 상황입니다. 그 위기 때 아이들이 남편들이 아내들이 부모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형제들에게 ‘두려워요, 무서워요, 사랑해요, 더 사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해요’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장 위급할 때 그 순간 누구와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습니까?
만약 그 순간 문자를 보내게 된다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무슨 말로 문자를 보내고 싶으십니까?
그것이 가족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많고 건강하니까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에 몰두하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가정이 해체되고 가족들이 흩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가족입니다. 가정입니다. 부모고 형제입니다.
이산가족을 찾는 분들을 보십시오.
남북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가족입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을 때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명절 때만 되면 가장 외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실향민들입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고향에 갈 수 있는 분들은 그분들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앉아 깊이 생각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좀 속도를 줄이고 차분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니까 느끼고 생각하고 보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몸은 가는데 정신이 뒤따라가지 못합니다.
너무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덜 소중한 것에 목을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좀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을 가다듬고 옛날에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유럽의 한 탐험가가 남미 탐험에 나섰습니다.
그는 울창한 밀림지역을 탐방하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를 가려면 험한 열대림을 지나야 했습니다. 길을 모르니까 인디언 가이드를 고용했습니다. 처음에는 탐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고용된 인디언가이드는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짧은 시간 내에 탐험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열대림을 지나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인디언 가이드가 멈추더니 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디언 가이드가 돈을 더 달라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니까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가이드는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느냐고 물었더니 영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정을 너무 빠르게 쉬지도 않고 급하게 가다 보니까 우리 영혼이 뒤쳐져서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적어도 하루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디언이니까 미개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들도 정신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뭐라고 말을 합니까? “정신 빠졌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치매나 건망증은 정신이 빠져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바쁘게 살다보니 정신을 놓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모두 육신적인 일이나 있을 수 없는 사건이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족이고 부모고 형제고 다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명절”이 필요합니다. “명절” 때는 좀 일을 멈추고 속도를 늦춰서 이 소중한 관계들을 생각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명절”은 대부분 <가족공동체 강화>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게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절 때 “예루살렘에서 내게 보일지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말은 <가족 공동체>를 강화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추석명절”은 이 <가족 공동체>를 결속하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야 할 가족들이 또 “명절”이 때로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 증후군>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명절만 지나면 더 불화하고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는 것이, 시집이나 고향에 가는 것이 두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명절을 명절답게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켜야 할 예의에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절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이 만나면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모님을 섭섭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나으시고 기르신 분이십니다. 그 분을 잘 섬기고 기쁘게 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한사람에게만 일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에게만 일이 가지 않도록 신경써야 합니다.
또 네 번째는 기분 나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너 여태 시집 안갔어? 못 간거야, 안 간거야?”, “너 왜 그렇게 늙었어?”라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명절날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민족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명절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눔
40절에는 말씀합니다.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여기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즐거워하라는 말은 축제로 즐기라는 말입니다. 또한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서로 나누고 먹고 마시는 친교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즐거움에는 반드시 먹고 마시는 일이 동반됩니다.
그것이 풍성할 때 즐거움이 있게 됩니다.
명절에도 나누고 친교하고 먹는 일이 빠질 수 없습니다. <추석 명절>의 핵심은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추석명절은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서로 나누는 것이 명절이고 축제입니다. 본문은 그런 축제를 이레 동안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레 동안 나누고 먹고 마시며 형제애를 확인하고 친교하고 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조상들은 <추석 명절>에는 햇과일로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음식을 우리만 먹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풍성함이 넘쳤습니다. 명절 때는 그렇게 인심이 아주 후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가위만 같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나눔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웃과의 교류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은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층간소음으로 얼굴을 붉힐 때 뿐입니다.
이제는 이웃이 무서운 존재로 변해버렸습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아파트 이웃이 무서운 적으로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명절”은 이렇게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1년에 3차례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런 의도에서일 것입니다.
또 오늘 명절만 되면 모두 혈육을 찾아 고향으로 가서 모이고 친교하고 나누고 정을 나누는 것에는 그런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금년 명절에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족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축복의 명절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오늘의 감사
23: 39-43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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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도로를 답답하게 가던 택시 안에서 기사와 손님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손님은 이렇게 길이 막힌 중에서도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택시 기사가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야 어쩌다 한 번 도심을 지나가지만 이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길을 지나가게 될텐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당신은 택시 기사라는 직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군요?’
‘나도 과거에는 해군에서도 근무하고, 사무실에도 있어 보았고, 최근에는 증권사에서도 한동안 일을 해보았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소.’
‘다른 일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을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이지요. 아마 내가 계속 증권사에 있었다면 나는 지금 굉장히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지금 나의 일에 만족하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여기 저기 다닐 수도 있고... 그러면서 이렇게 돈도 벌 수 있으니 말이지요. 게다가 나는 지금 혼자가 되어서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손님은 그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야망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야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가 있답니다.’
‘그래서요?’
‘그래야 좋은 집과 옷을 살 수가 있으니까요?’
‘나는 지금 나의 이대로의 모습에 만족하다니까요. 당신은 인디안 로우의 이야기를 아시오?’ 택시 운전사는 그가 알고 있는 한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떤 강가에 인디언 한 사람이 나와서 낚시를 합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날마다 낚시를 하고 있는 그를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보다 못한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서 충고를 합니다.
‘자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보면 모르나 낚시하고 있지.’
‘자넨 어떻게 맨날 낚시만 하고 있나?’
인디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자네도 뭔가 직장을 가지고 일을 시작해야지.’
그러자 인디언이 묻습니다.
‘왜?’
‘그래야 돈을 벌지.’
‘그래서?’
‘그러면 그 돈을 투자해서 더 많은 돈을 벌지...’
인디언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그러자 그는 이런 한심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듯 소리쳤습니다.
‘그래야 부자가 되어서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 아냐?’
그러자 인디언은 그를 한 번쳐다보고는 낚싯대로 눈을 돌렸습니다.
‘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오늘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 소중한 날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추수 감사절>의 기원이 되는 말씀입니다.
<초막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이스라엘에게 해마다 추수가 다 끝나고 나면 반드시<추수 감사절>을 지켜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다 거두고 난 다음, 너희는 일곱째 달 보름부터 이레 동안 주에게 절기를 지켜야 한다.’(v.39)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 안식일까지가 그 기간이니까 실제로는 팔 일 동안 절기를 지키는 것이지요.
그 시간은 일종의 축제의 시간과도 같은 것입니다.
‘첫날 너희는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 오고, 또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갯버들을 꺾어 들고,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절기를 즐겨라’(v.40) 이렇게 덧붙여서 그 날에 할 일을 설명하여 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나무에서 거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종려나무나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들고서는 성전의 뜰에서 함께 노래하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추수가 끝나고 대 보름이면 달빛 아래에서 <강강수월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이 즐겼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단한 일손을 잠시 멈추고는 성전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손에는 나뭇가지들을 들고서 성전 마당을 빙빙 돌면서 춤을 추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지요.
팔일 동안 이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초막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초막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성전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성전 주변에 임시로 머물 초막을 지어 놓고서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광야에서 고생하던 조상들도 생각하게 되고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누리기도 하고 더불어 살면서 수고한 이웃이나 가족들이나 동료들을 더 가깝게 대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절기를 즐겨라’(v.40) 아마도 <추수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램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가꾸어서, 추수하게 되는 과정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까?
얼마나 가슴 졸이는 시간이 많은 것입니까?
비가 조금만 내리지 않아도 걱정이 됩니다.
비가 지나치게 많이 내려도 걱정입니다.
흉년이 찾아 와도 걱정이지만, 풍년이 들어도 걱정은 여전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우리들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한 주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현실에서도 좀 벗어나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나누어 가면서... 삶을 즐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은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라는 대목입니다.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즐긴다는 것은 뭔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다른데서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얌전한 척하고... 조신하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서 즐기라니... 우리 교우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제 앞에서 밥을 먹는 것도 피하려 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면 가장 깊이 감사할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유일한 감사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을 때라는 말씀입니다.
현실에 생활에 몰두할 때에는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 때에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문득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 때에 우리가 느끼고 깨닫게 되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비결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삶의 고비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붙잡아 주었기에. 내가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설혹 오늘을 맞이하며 지난 1년 동안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참 어렵고 힘들었으며, 오늘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적자 투성이였던 삶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다시 말하면 내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고, 함께 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생기게 되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마음이 든든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한 번 ‘나의 하나님 앞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오늘을 실패와 성공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든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사실 우리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세울 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때에 나의 오늘이 성공이나 실패라고 하는 것. 다른 사람보다 낫다든지 모자란다든지 하는 것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그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감사가 이런 감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이것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행복하고 귀한 세계로 초대해 주셨기 때문에. 그동안 사느라고 하나님을 잊고 보냈던 시간에도 하나님은 항상 나를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셨기에. 오늘이 정말 기쁘고 즐거운 오늘 이렇게 <감사절> 축제에 초대를 받았기에 앞으로의 삶을 더욱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하던 감사할 이유를 찾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그냥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종기 시인의 ‘과수원’이라는 시를 다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 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내가 그냥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모든 것들... 햇살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다양한 것인지요?
“봄에 우리의 차가운 가슴을 녹여주는 밝고 환한 햇살이며, 모든 생명들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움으로 다가오는 여름의 태양이며, 땅에 있는 생명들에게 마지막 생명의 기운을 심어주려는 듯 열심히 우리를 비추어 주는 가을의 햇살, 사나운 바람과 추위 속에서도 우리에게 따스함을 잃지 않게 해 주는 겨울의 햇볕,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가 돈으로 사거나 만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다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고는 생색조차도 내지 않으시니까 어떤 때에 우리들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 조차도 잊고 살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어디 햇살뿐인가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가 마시고 살아가는 공기는 또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
숨을 너무 많이 들이마신다고 해서, 그 분량만큼 돈을 내라고 한다면 어디 겁나서 숨조차 쉴 수가 있을까요?
이런 모든 것을 거저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것을 잘 잊고 삽니다.
숨 한 번 쉬고 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 뭐 그렇게 하지는 않으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로구나... 참 소중한 것들을 그냥 주셨구나... 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감사가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될 때에 오늘도 내 머리에 비추고 있는 햇살을 통해서, 우리가 쉬는 숨을 통해서 나의 삶이 하나님의 손길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될 때 거기에서 우리는 깊은 삶의 신비감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주 나의 하나님 앞에서 느끼게 되는 감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감사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여러 글을 읽는 중에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분도 암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한 해를 보내면서 가지는 감사할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자기가 누린 모든 시간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또한 그가 보냈던 모든 일상적인 일들과 봉사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봉사야 말로 자신에게 큰 기쁨의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 책들을 읽게 된 일이라든지, 사람들에게서 받은 소중한 선물들이며, 심지어는 자신이 겪고 있는 질병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도할 수 있었던 것, 다른 이들의 기도를 느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살아 있음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 살아서 이렇게 감사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 말고 우리들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감사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좋은 것... 생명을 위하여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우리들에게 그냥 주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것, 누구도 그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 생명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부여해주실 때에는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 원하시는 간절한 소원과 뜻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이제껏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교회적으로 감사할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특별히 어린 생명들이 많이 늘어서 주일이 되면 유아실이 가장 분주합니다.
얼마나 신비하고 감사한지... 정말 살아 있구나... 미래가 있구나... 이 생명들을 통해서 거둘 열매가 기대되는구나... 이 생명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정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만 하겠구나...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에 대한 감사...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오늘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붙잡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우리는 오늘 이렇게 ‘주 나의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면서 나의 생명이 온통 하나님의 손길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이 붙잡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 주신 것, 그리고 그 생명을 지금까지 인도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감사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보내는 동안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감사할 일들이 그렇게 뚜렷이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올 한 해도 살아오면서 사실 지난해와 그렇게 다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아도 늘 어수선하고 아슬아슬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무슨 큰 업적이나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얼 감사하지? 도대체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무엇을 감사하라고 설교를 해야 하지? 제게는 지난 한 주간이 참 답답한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새벽시간에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이 감사하지 않냐? 오늘을 맞이한 것도 소중한 일이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오늘은 과거로부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에 대한 감사 가운데에는 지나간 시간 동안 나의 삶에 동행하여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지나간 시간 동안 잘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늘은 미래로 연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에 대한 감사에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기대감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신 것처럼 앞날의 삶도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능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미리 대비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귀한 일을 앞으로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힘들고 어려운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오늘 우리가 다시금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게 된 것,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자체가 생각해보면 참 신비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맞이할 수 없는 날입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이기에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서 나를 붙잡아 주셨던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오늘에 이어질 미래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면서...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오로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넘칠 때에는 감사할 일이 참 많겠지만, 요즘처럼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렵고 힘든 시기에는 사실 감사라는 말 자체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감사절>을 맞이하였다고 하는 것... 그래서 우리들이 다시금 잃어 버렸던 감사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다시금 감사로 채워져 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감사할 일인 것은 감사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마음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감사예찬’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감사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감사만이 보석입니다.
슬프고 힘들 때에도 감사할 수 있으면
삶은 어느 순간 보석으로 빛납니다.
감사만이 기도입니다.
기도 한 줄 외우지 못해도
그저 고맙다 고맙다 되풀이 하다 보면
어느 날 삶 자체가 기도의 강으로 흘러
가만히 눈물 흘리는 자신을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감사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해 질 수 있는지를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감사절>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즐겨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럴 수밖에는 없는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감사하기 전에는 몰랐던 삶의 기쁨... 풍성함과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다시금 찾게 됩니다.
<추수감사절>이란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삶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즐기는 축제의 자리인 것이지요.
오늘 이렇게 <감사절>을 맞이하는 우리들 모두가 잊고 있던 삶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다시 찾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산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충만 하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우리의 감사는 동시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감사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 나의 직장 동료들... 나의 이웃들...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 곁을 지켜 주었기에 오늘의 나의 삶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추수감사절>이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