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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깃발 되시는 주님
성경본문 : 잠언 26: 11-15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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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 목사
싸움터에서 패배한 패잔병들이 깃발을 날리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어깨는 처지고 고개는 숙여지고, 아주 괴로운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전쟁에 패한 패잔병들을 깃발을 흔들며 맞이하는 백성들도 없습니다. 패배하면 패잔병이나 백성이나 함께 괴로운 것입니다.
운동 경기도 그렇습니다. 이기고 돌아온 선수들은 깃발을 날립니다. 그 선수들의 팬들도 깃발을 날리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패배한 선수들은 말이 없습니다. 그 팬들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치도 그와 같습니다. 당선자는 깃발을 날립니다. 이번에 대통령에 새롭게 당선된 분의 마을 사람들이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을 제가 TV를 통해 잠깐 보았습니다. 남녀노소 없이 온 동민들이 “우리 마을에서 대통령 나왔다.”하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것을 보는 사람도 신바람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낙선한 분에게는 마을에서 잔치를 해 주지 않습니다.
인생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일이 안 되는데, 일이 꼬이는데, 깃발을 날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이 막히는데도 즐겁고 기쁘게 감격 차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될 때 깃발을 날리게 되고, 신바람도 나고 즐거운 것입니다.
새해에 여러분이 고개를 숙이고 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깨가 처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깃발을 날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섬기는 분은 우상이 아닙니다.
금으로 우상을 아무리 크게 지어도 우상은 능력이 없습니다. 우상의 콧구멍에 거미가 수십 마리가 살아도 우상이 그 거미 한 마리를 잡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깃발이십니다.
‘여호와 닛시’는 ‘The Lord is our Banner, 우리의 깃발,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승리의 깃발을 흔드시게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한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일리는 있어도 진리는 아닙니다.
이라크가 자기 군사력을 알고 영국과 미국의 군사력을 안다 해도 영국과 미국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도 내 힘이 약하면, 역부족이면 적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시고 우주를 붙잡고 계시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메릴랜드 우주항공국에서 인공위성을 띄우기 전에 태양 궤도와 달의 궤도, 그리고 지구의 궤도를 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컴퓨터로 체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4시간의 오차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면 십만 분의 일의 오차로 인공위성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난 과학자들이 머리를 다 써보았지만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타이피스트 직원이 고민하며 나누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소장님,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인 저의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여호수아 시대 때 거의 하루종일 태양이 멈춘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늘의 태양이 멈추었답니다.”
소장이 말 같지 않은 말은 하지도 말라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하지만 소장은 연구소에 앉아 있으니 자꾸 그 직원의 말이 생각나 성경 한 권을 구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정말 여호수아 10장에 그런 사건이 나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세를 잡고 적을 쳐 나가는데 해가 지려 하니, 하나님 앞에서 “태양아, 멈추어라! 기브온 위에 멈추어라! 달아! 너도 우리가 적을 다 꺾을 때까지 멈추어라!”하고 명령했는데, 해가 거의 하루종일 멈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컴퓨터로 찾아가 보니 바로 그 날 23시간 20분의 오차가 나왔습니다. 소장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40분의 오차는 무엇일까?’
혹 나머지 40분의 오차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성경을 읽다가 열왕기하 20장에서 발견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히스기야가 벽을 향하여 “하나님, 제가 진심으로 하나님 섬긴 것을 기억해 주세요. 저는 더 살고 싶어요.”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으니 하나님께서 15년을 더 살게 해 주시면서 그 표징으로 태양을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루 24시간은 360도니 10도는 정확하게 40분입니다. 그러니 여호수아 시대 때의 23시간 20분과 히스기야 시대 때의 40분을 더하면 정확하게 24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가는 우주 궤도도 멈추게 하실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소장과 과학자들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은 바닷물 1그램을 만들 수 없고, 사람의 피 1그램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헌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승리의 길을 열어주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13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 하시며 자녀의 영, 성령을 이미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피보다 더 진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할렐루야!
또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신명기 7장 6절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시편 78편 71절과 에베소서 1장 11절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녀가 실패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어느 기업주가 자기 회사가 망하기를 기원하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고, 경영주는 자기 회사가 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성공이 부모의 즐거움이고, 기업의 성공이 기업주의 명예와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성공, 우리의 승리가 하나님의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 우리의 승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기기를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원하십니다. 여러분 자녀보다 여러분이 더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되고 승리하기를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생하고 근심하며 어깨가 처져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에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오늘 여러분 중에서 근심의 떡을 먹고 고생의 물을 마시는 분이 계십니까?
근심의 떡과 고생의 잔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훈련 코스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잘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훈련 코스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는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입니다. 내가 밀감나무를 심어서 밀감을 따먹는 것입니다. 내가 사과나무를 심어서 사과를 따먹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가시에 찔리지 않습니다. 가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가시에 찔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내가 왜 이렇게 어렵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데 여러분을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게으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일은 뒷전에 두고 자기 일을 앞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정말 원하시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면 다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 6절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 8장 16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됩니다.
“지용수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여러분 모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그대로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은 정말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삶이 아깝고 귀합니다. 아깝고 귀한 이 한 해를 그냥 살 수 없습니다.
1949년, 유능한 인재들이 사회주의 혁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 벌판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의 차디찬 날, 기둥에 묶여 있는 28살 먹은 한 청년이 죽음을 앞두고 시계를 보았습니다. 사형 집행 5분 전이었습니다.
‘이 아까운 5분을 어떻게 쓸까? 이 아까운 5분 동안 무엇을 할까? 그래, 2분은 동지들과 눈으로라도 인사를 하자. 그리고 2분은 내가 살아온 일생을 뒤돌아보고 정리해 보자. 나머지 1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리고 죽자.’
청년은 2분간 동지들과 눈으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2분간 자기의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자기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데, 너무 잘못 살았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성실하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상에 매여 너무나 잘못 살았습니다.
이제 1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자연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몇 초 후면 죽게 됩니다. 총탄을 장전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렸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끝이구나.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
그때 “사형중지! 사형을 중지하시오. 형 집행 중지!”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말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그 사람이 말에서 내리더니 형 집행관에게 말했습니다.
“황제의 특명이오. 이 사람을 죽이지 마시오.”
그 청년은 러시아의 인재, 탁월한 천재였습니다. 그 나라의 인재를 잃는 것이 아까워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죽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은 유배 생활을 마친 후 모스크바에 가서 귀하고 보람되게 살았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그는 러시아의 자랑입니다. 제가 러시아에 갔을 때 그의 무덤에 가보았는데, 러시아는 지금도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형 몇 초 전에 사형 집행장에서 살아 남은 그가 그의 생을 값지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도스토예프스키와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사형 집행을 당하려다 만 것은 아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시간과 똑같은 소중한 시간을 우리가 1년간 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제가 철이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갈 때도 꼭 단어장을 가지고 갑니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단어장을 보며 새 단어를 익힙니다.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이 시간, 이 새해를 정말 값지게 살고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살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승리의 깃발을 흔들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도 좋고 우리 부모와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도 다 좋아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승리의 기를 주십니까?
제가 새해 첫날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제 취미는 성경 읽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 것이 너무 즐겁고, 기쁘고, 감사해서 대개 오전에는 내내 성경을 읽습니다.
새해 첫날 성경을 읽다가 ‘아! 이 말씀이다. 이 말씀이 새해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우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신년 첫 주에 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말씀을 붙잡고 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려면, 먼저는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우리가 지난 해에 토한 죄를 다시 지으면 안 됩니다. 개는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소화가 안 되거나 감기가 들면 먹은 것을 토합니다. 그리고는 양지바른 곳에 가서 쉬다가 몸이 괜찮아지고 배가 고프면 토한 곳으로 가서 그것을 다시 먹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곳에 잘못 갔어요. 제가 그곳에 가서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다시는 선악과가 있는 곳에는 안 갈게요. 하나님, 다시는 그 짓 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더러운 일 안 할게요. 장로(집사)인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그 짓을 했어요. 다시는 그 짓 하지 않을게요.”
회개는 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해 놓고 몇 주 후에 또 그곳에 가서 그 짓을 합니다. 그것은 개가 하는 짓입니다.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토한 죄를 다시 핥아먹는 개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품고 사는데 어찌 축복해 주시고 세워 주시겠습니까? 죄를 품고 살면 풍랑을 주십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 5절에 말씀하십니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보다 불신자가 더 잘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나의 라이벌이, 나의 경쟁자가 더 잘 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죄가 있으면 나의 명예가 떨어집니다.
예레미야애가 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죄는 명예의 면류관도 떨어뜨리고, 성공도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가 있으면 성공이나 실패를 떠나 웃을 수가 없습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들이 모여서 불평을 했습니다.
“남자도 같이 부모가 되는데 아기를 낳을 때 왜 남자는 아프지 않고 여자만 아파야 하나? 하나님께서 잘못 지으셨다.”
그래서 여성 대표가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아이를 낳을 때 남편도 같이 고통을 겪어야지, 왜 아내만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무슨 죄가 있어서 다 같은 부모인데 여자만 아파야 합니까?”
여러분, 사실대로 말하자면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했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려면 여자 자기나 따먹지, 남편까지 먹게 해서 남자들도 같이 고생하게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여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뭐가 불공평하냐?”
“아기를 낳을 때 아기 아빠도 같이 아프게 해주세요. 남편도 아프고, 아내도 아프게 해주세요.”
“그것을 그렇게 원하느냐?”
“예.”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지금부터는 아기를 낳을 때 아기 아빠도 같이 아플 것이다.”
며칠 뒤, 여성 대표의 이웃집에 사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아파서 막 뒹구는데 남편은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셨을 리가 없는데 남편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옆집에서 비명 소리가 났습니다. 옆집 남자가 아픔을 참지 못해 뒹굴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 여자가 옆집 남자와 눈이 맞아 그 씨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아내를 개 패듯 패고 쫓아냈습니다.
얼마 후 다른 부인이 아기를 낳게 되자 남편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에 온 동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집의 남편이 아프지 않고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몇 집 건너에 사는 다른 집 남편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습니다. 이번에 아기를 해산한 여자도 남편에게 실컷 맞고 쫓겨났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 남자나 여자나 공평하게 아프니 결국 여자만 매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여성 대표가 다시 하나님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 이전처럼 해 주세요.”
“그래, 내가 원래 지은 대로 사는 것이 맞느니라.”
그래서 지금도 아기를 낳을 때 여자만 아픈 것이랍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아내가 아기를 낳을 때 남편도 아프게 하면 100가정 중 꽤 여러 가정이 이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난 사건입니다.
운전 교습을 받던 여자가 운전을 가르치는 남자와 눈이 맞아 잠을 잤는데 그만 아기가 생겼습니다.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아빠와 닮은 데가 한 곳도 없습니다. 알아보니 운전 선생님의 아이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씨 도둑질은 못하는 법입니다.
저희 아이들을 보세요. 성이는 걸음걸이까지 저를 닮았습니다. 성찬이는 키는 저보다 훨씬 더 크지만 이미지가 저하고 똑같습니다. 경이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세요. 저랑 얼마나 닮았습니까?
그런데 그 집은 아이가 아빠를 닮은 곳이 한 군데도 없어서 조사해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경우라면 조사해 보지 않아도, 남편이 들추어내지 않아도 아내는 알지 않습니까? 아이가 “아빠! 아빠!”라고 할 때마다 남편에게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가 있으면 그것이 발각되든 안 되든, 웃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기쁘겠습니까? 어떻게 죄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의인의 장막에 기쁨의 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의로울 때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의 집에 하나님께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내가 후회할 일을 하고 나서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후회할 일을 하고 나서 또 그 일을 하는 것도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 한 사람이 소주를 마시며 괴로워 했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괴로워 하세요? 왜 그리 강술을 드세요?”
술을 마실 때는 안주를 같이 먹어야 한답니다. 예전에 저희 이웃집 사람이 술집을 경영했는데, 그 집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도시락 반찬을 꺼내면서 “오늘은 안주가 좋다.”라고 했답니다. 그 말이 마을에 다 퍼졌었습니다. 술집 아들이라 반찬을 안주라 했는데, 어쨌든 밥을 먹을 때 반찬을 먹듯이 술을 마실 때는 안주를 먹어야 덜 해롭답니다.
새신자들 중 혹 술을 드시는 분이 계시면 안주랑 같이 드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을 받으면 성령의 술로 만족하여 술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할렐루야!
기차에서 강술을 마시는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마시는지 옆 사람이 물으니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술 때문에 아내와 이혼을 했는데, 그가 딸을 너무 사랑하니 두 달이나 세 달에 한 번씩은 딸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답니다. 그 날도 너무나 보고 싶은 딸을 만나러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길이랍니다. 이혼 당하고 딸을 만나러 가는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괴로워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 사람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김유신은 ‘아, 내가 술집 색시하고 놀다가는 내 인생이 끝나겠구나.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후에는 술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장군이 된 것입니다. 끊어 놓고 또 다시 했으면, 가지 않는다고 해놓고 또 갔으면 김유신 장군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귀한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결단을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토했던 것을 다시는 먹지 않을 거야. 나는 개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아. 후회했던 일은 다시는 하지 않아.’
이것만 해도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전진하고 발전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깃발을 흔들려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기 팔을 자기가 흔드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았을 때는 아무리 성공해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실력으로, 자기 기술로 살아서 성공했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살아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쓸데가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쓸데없는 기업인 것입니다.
잘 되어도 효도하지 않는 인간은 쓸데없는 자식입니다. 자식은 성공해서 생활비를 천만 원, 이천만 원씩 쓰는데 그 부모님은 용돈 십만 원이 아쉽다면 그 자식은 쓸데없는 자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공해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없으면, 십일조도 하지 않고 감사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쓸데없는 자식입니다.
기업이 성공하면 기업주에게 이익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업인 우리가 성공해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없다면 그 기업은 하나님께 필요 없는 기업입니다. 하나님께 필요 없는 기업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직원들이 많은데 쓸데없는 직원들을 제가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팔 흔드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교통 사고를 당해 팔이 부러지면 팔을 흔들지 못합니다. .
서울 강남 모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실수하여 어떤 환자의 왼팔을 잘라야 되는데 오른팔을 잘랐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두 팔이 다 잘렸습니다. 그 사람은 팔을 흔들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의사가 실수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트시면 두 발로 걷지 못하게 됩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나의 삶 전체, 삶 백 퍼센트를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 때 하나님께서 내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회사 일도 기도한 후 하고, 사업도 기도하고 하고, 등산도 기도하고 가야 합니다.
한 경찰 간부의 부인이 등산 갔다가 쓰러졌는데 돌아가셨답니다. 젊은 분인데 말입니다. 등산갈 때도 기도하고, 공부할 때도 기도하고 나서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3장 7절에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악입니다. ‘나는 잘 나서 하나님 도움 없이도 살아.’라고 하는 것이 악이라 말씀하십니다.
잠언 3장 6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구멍가게를 하든, 보험회사에 다니든, 구두닦이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성공의 길목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십일조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온전하게 바쳐라. 왜 본봉의 십일조만 바치느냐? 상여금의 십일조도 바쳐라.’
‘주일을 왜 그렇게 지키느냐? 온전하게 잘 지켜보아라.’
‘그것은 네 잘못이다.’
‘왜 그 회사에 가려고 하느냐? 그 회사로 가면 너는 망한다.’
‘이제 그만 해라. 더 이상 사업을 확장시키지 마라.’
‘그 집은 사지 마라. 그 집을 사면 후회하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런 마음이 떠오르게 해 주십니다.
한 장로님은 엉뚱한 곳에 20억 원을 투자해서 거의 망하다시피 했습니다. 20억 원을 투자한 것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망할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승리할 길, 잘 될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망해 가는 집도 일어나게 됩니다.
평양의 임 모씨는 결혼해서 사십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기가 잉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돈을 모으며 그 재미로 살았는데 사업하는 동생이 은행보다 더 높은 이자를 주겠으니 돈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설득하여 동생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동생이 사업을 다 말아먹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형제간에 의좋게 살려거든 돈 거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 거래할 바에야 그냥 주십시오. 만 원이든 일억 원이든 형제에게는 아예 그냥 줘 버리십시오. 아니면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빌려 주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임씨의 가정도 돈을 잃고 나니 부부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도 없지, 소망도 보이지 않으니 사는 것이 지겹기만 했습니다. 부부가 다 죽을 결심을 했습니다. 남편은 나무에 목매어 죽으러 산으로 가고, 아내는 동네 우물에 빠져 죽으러 우물로 갔습니다.
그런데 산으로 가던 남편도, 우물로 가던 아내도 교회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날마다 듣는 교회 종소리였지만 그 날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남편은 ‘그래, 목매어 죽기 전에 교회나 한번 가보자. 교회가 뭘 하는 곳인지 한번 가보기나 하자.’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아내도 교회 종소리를 듣고 ‘그래, 교회에 한번 가보자.’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다 자기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남편이 성경을 사러 강대상 앞
으로 나갔습니다. 그의 자기 아내도 성경을 사러 나갔습니다. 부부가 교회에서 마주쳤습니다.
“여보!”
두 사람이 성경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잘 살았습니다. 후에 남편은 집사님이 되고 부인은 전도사님이 되었습니다.
다 깨어져 가는 가정도, 회사도, 인생도 하나님께서는 세워주실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게으르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말이 많습니다.
게으른 자는 “거리에 사자가 있네. 길에 사자가 있어.”하며 문을 닫고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었다 닫았다 해 보아도, 아무리 움직여 보아도 문은 돌쩌귀에 매여 있듯이 게으른 사람은 방에서, 침대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하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 그냥 갖고 온 사람은 주님 앞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말이 많은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는 말이 많은 사람이 없어서 고마운데, 교회에서 말이 많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잠언 6장 11절에 말씀하십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경제 대국 일본이 지금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오만 명이 강변에 텐트를 쳐 놓고 산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그들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신문 배달을 하든지, 우유 배달을 하든지, 폐지나 공병이나 캔이라도 주워서 팔 것입니다. 구두라도 닦을 것입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학생 시절에 공병과 캔을 주워다 팔아서 등록금을 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양복집에서 재봉틀 밟는 일을 했는데 아주 박봉이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굶지 않습니다. 부지런한 자에게는 먹을 것도 오고, 입을 것도 오고, 따뜻한 보금자리도 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게으른 자는 손을 밥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게으른 사람은 먹을 수 없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한 게으른 사람이 처가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장모님이 좋은 떡을 싸주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먼길을 가다보면 시장할 테니 이것을 가지고 가게. 가다가 시장하면 먹게.”
“장모님, 귀찮습니다.”
“아니야, 가다가 시장하면 먹게.”
“귀찮다니까요.”
장모님이 사위의 등에 강제로 떡을 메어 주었습니다. 게으른 사위는 그것을 가지고 가기 싫었으나 도로 풀어놓기가 귀찮아서 그냥 메고 갔습니다. 가다 보니 장모님 말대로 배가 고팠습니다.
‘아이고, 배고파."
그러나 게으른 사위는 떡을 풀어서 먹는 것이 귀찮아 그냥 갔습니다.
“그냥 가다가 누구를 만나면 풀어 달라고 해서 먹자.”
조금 더 가니 고개가 삐딱한 한 사람이 걸어왔습니다.
‘됐다. 저 사람에게 부탁해서 떡을 좀 먹자.’
“여보시오, 내 등에 떡이 있으니 좀 풀어 주시오. 먼길을 걸어 왔더니 매우 시장하오. 보아하니 당신도 먼길을 온 것 같고 시장해 보이는데 같이 먹읍시다.”
“뭐라고요? 내 갓 끈을 좀 보시오. 갓 끈이 이렇게 풀어졌는데 갓 끈을 매기가 귀찮아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오는 나에게 당신 보따리를 풀어 달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서 보니 갓을 쓰고 온 사람의 갓 끈이 풀어져 갓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떡을 메고 온 사람보다 더 게으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성공하겠습니까?
부지런하면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죄 없이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게으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지 않으십니다. 부지런해야 됩니다. 자기 일에 성실해야 됩니다.
잠언 22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비우면 안 됩니다. 은행 지점장은 은행을 지켜야 됩니다. 병원 원장은 병원을 지켜야 됩니다. 회사 사장은 회사를 지켜야 됩니다. 그래야 회사가 되고, 은행이 됩니다. 자기 일을 돌아보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확실합니다.
토해 버린 것을 다시 먹지 않고, 후회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하면 우리 모두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승리의 깃발을 힘있고 즐겁고 기쁘게 흔들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우리 자신은 행복하고, 주변 사람은 신바람 나게 하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