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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7
예정하신 뜻과 우리의 기도 / 성홍모 목사
클레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마귀의 지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 원제목 그대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C.S 루이스에게 “마귀들의 존재를 믿느냐?”라고 물으면 “나는 마귀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나는 천사들의 존재를 믿으며, 또 어떤 천사들이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으며,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우리의 원수가 되었음을 믿는다. 우리는 이러한 천사들을 마귀들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고 있는 마귀들의 활동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스크루테이프라는 선배 마귀가 후배 마귀요 조카뻘이 되는 웜우드라는 악마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우리 성도들을 타락시켜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지옥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하여 지령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이 책을 보면 세계최고의 영문학자인 C.S 루이스는 편지 형식을 빌려 31개의 주제를 잘 소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으로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치우치고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을 ‘환자’라고 하면서, 그 환자를 어떻게 하면 완전히 넘어지게 하고, 사탄을 따르게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원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에 조금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나도 잘못 살다보면 사탄의 노름에 빠지게 되고, 신앙을 버릴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탄이 가장 원하는 바는 인간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출세 수단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배 마귀가 후배 마귀에 지령을 내립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네 환자가 기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는 성도들에게 기도할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게 막을 데까지 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열심을 내던 성도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고 기도를 게으르게 하고, 세상적으로 치우치고 있다면 마귀의 간계에 빠진 사람입니다.
C.S 루이스는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개인기도’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라고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청원하는 기도, 간구하는 기도를 무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로 말씀드리기 전에 다 알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평하면, 우리의 기도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무엇을 알려드리는 것이 됩니까? 전지하신 하나님인데, 우리의 기도를 통해 계속해서 점검하고 되짚어 드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딴 데 신경 쓰지 마시고 저에게 정신을 집중하세요’라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모든 사람을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루이스는 개인기도를 설명합니다. 우리의 아룀을 통하여,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로 인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체로 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능동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후에 하나님에게 알려지는 대신에, 기도는 우리 스스로의 실상을 말하여 드러내면서 우리의 진솔한 모습을 보시라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사람으로 한 인격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체라는 높은 지위를 갖는 것이요,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 낮아지심으로 우리에게 인격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기도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먼저 우리의 실상을 보여드리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에게 청원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터인데, 피조물인 인생이 무슨 청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님이 드리신 기도에도 단서가 있다고 반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는 단서를 다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단서 조항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단서조항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의 기도에서 청원적인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스는 친절하게 예를 들고 있습니다. 가난한 빌이라는 친구가 100파운드를 빌려달라고 하면서 단서조항을 달고 말합니다. “어이 친구 100파운드를 빌려줘. 여유가 있으면 빌려달라는 거네, 자네가 빌려줄 수 없다 해도 충분히 이해하겠네”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해도 청원 그 요청은 엄연한 기도인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더 고상해서도 안 되네. 기도가 이론적으로 난점이 있다고 하여도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한다.”고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시한 것까지도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겸손한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가지고 아버지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마다, 자신의 추악하고 더럽혀진 마음을 아파하면서, 거짓으로 포장하지 말고 온전히 벌거벗은 실상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사모해야겠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이 왔습니다. 저로서는 도무지 이길 수 없고, 떨쳐버릴 수 없는 죄악을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셔야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가져가시고, 대신 짊어지시고, 속량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기도의 생활화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는 남왕국 제14대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 25세였으며, 예루살렘에서 29년간 통치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대단히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왕하18:3에 보면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비교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고, 우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정직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힘쓴 사람입니다. 사람이 일생 정직하게 살아가기란 매우 힘든 일인데, 히스기야는 일생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실수한 것도 거짓으로 둘러대지 않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선정을 극찬하는데, 그가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을 확립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잘 믿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온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고, 앞장 서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왕하18:4에 보면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는 그의 왕국 내에 모든 우상을 철폐하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확립하면서 지방 산당을 제거하였습니다. 산당이란 지방의 성전분소와 같은데, 우선 쉽게 예배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활용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정착되었지만, 이 산당에 쉽게 이방 우상이 들어오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피해를 직시한 왕이 산당을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알의 주상을 깨뜰려버리고 아세라 목상도 없애 버렸습니다.
이제는 우상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옛날 모세 때에 만들었던 구리뱀을 집집마다 걸어놓고 쳐다보며 병을 치료해달라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그 구리뱀을 수거하도록 하였고, 그것을 다 깨어 부수고 그것은 하나의 놋조각이라고 ‘누후수단’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의 놋쇠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왜 쳐다보고 비느냐고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의 놋쇠에 불과한 것을 세워놓고 쳐다보고 비는 사람들이 있다면 히스기야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러한 종교개혁을 사람의 능력으로 감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하18:5에서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데, 그가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을 확립하는 일이나, 우상을 척결하고 앗수르 왕을 물리치고, 경제를 일으킨 것도 다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하는 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의 진술입니다. 이스라엘 랍비 중에 역사가가 왕국기를 쓰면서 역대에 다시없는 왕이라고 하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위대한 점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에,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앗수르의 대장 랍사게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고 항복하라고 할 때에 왕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하였습니다. 당신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왕궁의 책임자인 신하,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들에게 역시 굵은 베옷을 입히고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선지자에게 함께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이사야를 통하여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영을 앗수르 왕에게 둘 터인데, 그가 한 소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요, 그가 본국에서 칼에 맞아 죽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에게 그 밤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군사 185천명을 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수많은 병사들이 다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이 립나에 있었는데, 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부하의 칼에 맞아 죽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예정하신 대로 역사를 쓰시는데, 먼저 기도를 받으시고 있습니다. 기도의 청구서를 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쳐들어오는 때에 몹쓸 병에 걸려 몸져누웠습니다. 오늘과 같이 의학이 발전된 시대가 아니니 마땅히 쓸 약도 없어 히스기야의 병세는 급속히 심해졌습니다. 왕이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위로하지는 못하고 하는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가 심방 와서 위로하며 용기를 심어주고 기도해주고 가시면 좋을 터인데, 하시는 말씀이 “집을 정리하라, 이제 곧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둘러대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히스기야의 사후에 국가적인 혼란을 막고 후계자를 선정하고 비상시국을 대처하라는 뜻에서 말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집안에 유언할 것이 있으면 하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지 않게 후계자를 선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스기야가 기대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는 이 말을 듣고 그대로 수긍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국가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가정적으로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선고가 내려지면 대략 5단계를 거쳐 수용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부정하고(Denial), 분노하고(Anger), 협상하고(Bargaining), 우울하고(Depression), 비로소 수용한다(acceptance)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임종의 5단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러한 단계고 무엇이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임상적으로 보면 부정하는 것도 같고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는 생을 포기하지 않고 패배를 수용하지도 않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돌려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과 대면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단으로 얼굴을 벽을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하던 얼굴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여 돌렸습니다.
얼굴이란 그의 전 인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의 온전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의 간절함이 그의 온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는 평상의 업무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후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전심전력하여 매달린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한 것을 보면 기도의 형식에 맞지 않아보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그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도의 내용으로 보면 자기의 의를 드러낸 것도 같고, 자기의 헌신을 제물로 삼아 은총을 구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이 기도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잘것없는 자신의 행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 것을 회상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자신의 의를 드러낸 기도요, 지금까지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감사할 것이지, 바터제, 즉 구상무역과 같이 내가 수출한 만큼 당신네도 똑같이 균등하게 수출하라는 그런 의도와 같이 보여집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대단한 기도요, 믿음입니다. 그의 헌신적인 생애가 참으로 부럽기만 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행동한 것을 알아달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드러난 기도이고, 심히 통곡한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맹숭맹숭, 너무나 또렷한 말은 기도가 아닙니다. 심히 통곡하여 무엇을 기도하였는지 모르는 기도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이사야서에는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고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14절에서 “나는 제비처럼 학처럼 애타게 소리 지르고,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었다. 나는 눈이 멀도록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주님, 저는 괴롭습니다. 이 고통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간절한 기도가 하나
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16-17절 말씀에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를 낫게 하여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아픔이 평안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몸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레이븐 힐은 “왜 부흥이 지체되는가?”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를 조직하는 사람은 많으나 고뇌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적다. 헌금을 내는 사람은 많지만 기도하는 사람이 적다. 쉴 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씨름하듯 기도하는 사람은 적다. 역동적인 신앙생활의 두 가지 필수요소는 비전과 열정이다. 그런데 이 둘은 기도의 밀실에서 발생한다. 설교의 사역은 소수에게 열려 있지만, 기도의 사역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열려 있다. 세속적인 신자는 기도를 중단하고 기도하는 신자는 세속을 중단한다. 십일조는 교회를 세우지만, 눈물은 교회에 생명을 준다. 우리가 돈을 낼 때는 땅을 살 수 있지만, 그들의 기도했을 때는 땅이 흔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5-6)
히스기야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와 개인기도에 힘쓴 사람입니다. 개인기도에 음답받았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요한1서5:14-15을 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서 전하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는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내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내가 그에게 일, 이년이 아니라 15년을 더해 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분명히 예정하신 뜻이 있었는데, 눈물의 간구를 보시면서 당신의 그 예정하신 뜻을 바꾸시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일찍 죽는 것이 저주가 아니요, 15년 인생을 더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기도는 모든 헝클어진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마스터 키와 같습니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간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것이 곧 당신의 것이었음에도 흐르는 땀방울이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될 정도로 간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마7:11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엡3:20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기도의 불을 붙이면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시는 응답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