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9-10
하나님께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 / 안양준 목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열심히 매달리게 됩니다. 단 문제는 어디에 열심을 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사실은 술 마시는데 남다른 열심히 있는 사람이요,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그 방면에 최고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잘못된 데 열심을 쏟기에 그들의 결과는 좋지 않게 나타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거룩한 열심’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정을 주님을 위해서, 거룩한 삶을 위해서 쏟아 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엘리야의 상태는 악한 왕후 이세벨에게 쫓겨 브엘세바의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낙심해 있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다했던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하는 말씀이 10절과 14절에 두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는 뜻인데 원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을 나도 가증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내가 욕을 먹는 것보다 더 분한 마음을 가지고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효성이 지극한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끼고 목숨걸고 나가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열심히 특심하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관주를 찾아보았더니 민 25장이 나왔습니다. 민 25장을 보면 당시 물질에 눈이 어두운 발람 선지가 발락의 사주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실족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민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럽혀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편이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귀는 것을 보면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내 아내의 불륜을 본다면 누구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 20:5에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시기를 원하고, 우리의 마음이 흔들림없이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시 모압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최고조에 달하면 그들의 신 앞에서 남녀가 행음하는 것이 순서에 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사탄의 간계에 빠져서 간음죄를 범하게 되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그로 인해 염병으로 죽은 자가 2만4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남자 하나가 모압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음행하는 것을 보고, 아론 제사장의 손자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뒤쫓아 들어가 남자와 여자의 배를 꿰뚫어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고 염병이 그쳤습니다. 조금은 잔인한 내용입니다만 이때 비느하스가 가진 마음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얼마나 기뻐 여기셨던지 엄청난 축복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민 25:10-13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와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는 마음, 즉 열심이 특심하여 잔인한 정도로 죄를 처리하였더니, 하나님의 질투의 진노를 돌이킬 수가 있었습니다. 13절에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란 말씀은 엘리야가 ‘열심이 특심하다’는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제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이런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1. 열심히 특심한 사람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여 질투심과 분노를 느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 불의 선지자 엘리야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아합 왕의 처 이세벨이 끌어들인 바알신 이방 종교에 현혹되어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타락되어 가는데도, 당시의 많은 제사장 선지자들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열심히 특심한 엘리야는 속이 끌어 올라서 그 꼴을 참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알신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신의 선지자 400인을(왕상 18:19-22)갈멜산으로 불러모으고 대결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편에 서야 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유일신인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여 이방신을 섬길 때, 열심이 특심한 엘리야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850대 1로 대결했던 것입니다.
열심이 특심한 사람은 남들이 잠잠할지라도, 잠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고통이 자기 고통으로 느껴지고, 하나님의 격분함이 자기의 격분으로 느끼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남다른 능력과 용기를 주시고 크게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2) 성군 다윗
블레셋 나라의 골리앗 장수는 키가 여섯 규빗이니 어림쳐도 2m가 훨씬 넘고, 갑옷의 무게가 5천 세겔이고 창장구는 베틀채 같았습니다. 소리를 치면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는 거창한 장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서 싸울 테면 싸우자고 큰 소리를 치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가 사시나무 떨듯 무서워 벌벌 떨면서 누구 하나 싸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이새의 막내 아들 소년 다윗이 빵과 치즈를 좀 가지고 군대에 있는 형님들한테 면회하러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데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하고 자기가 나가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말을 듣고 “너희 양떼는 누구에게 맡기고 이리로 내려왔느냐 나는 네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노라”고 야단을 칩니다.(삼상 17:28).
그러나 다윗은 남의 뭐라든 개의치 않고, 왕을 찾아 가서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지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말려도 다윗이 하도 강력하게 나가니까 사울도 나가라고 합니다.
왕의 투구와 갑옷을 다 벗어 놓고 물매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이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오느냐”고 하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외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말하고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손에 붙이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하면서 물맷돌을 던질 때,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남들이 다 죽음이 두려워 떨고, 여호와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비록 소년의 몸이지만 나아갈 때 하나님이 큰 승리를 주셨고, 볼품없는 비천한 목동 다윗을 이스라엘의 가장 훌륭한 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특심한 자를 크게 들어 쓰시고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3) 위대한 지도자 모세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핍박받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자기의 안일과 이익만 생각한다면 못본체 할 수도 있을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도 다 팽개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열심이 특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을 수도 없고,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도 없습니다.
렘 20:9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2.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의 특징
남달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남달리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모독을 받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멸시를 받으면, 그냥 보고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대의 순교자들도 조금만 타협하고 신앙의 지조를 굽히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말씀을 지키고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창 6: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하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같이 오늘날 신앙인이라 하면서도 그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세상 가운데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비느하스와 같은 인물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비느하스가 있습니까? 열심이 특심한 것에 반대되는 것을 계 3:15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책망하시는 말씀 중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만일 내게 하나님 만을 두려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그리고 예수님만을 알고자 결단하는 사람 300명만 주시면 세계를 불길로 타오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사람을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해 지기를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