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3: 12 소망이 있으므로 - 고후 3: 16 주께로 돌아가면
3. 모세와 수건 ( 3: 12 – 18 )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와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 (출 34: 29-35).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친 후 그의 이마에 수건을 써서 그 없어질 광채를 가리었다. 수건(veil)은 율법에 얽매여 있는 완고한 마음이나 복음에 대한 무지나 편견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율법이 장차 없어질 것이며 장차 나타날 참된 실체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고후 3: 12 소망이 있으므로 -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
1]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새 언약의 불변성과 절대 탁월성에 근거한다.
2] 담대히 말하노니
바울의 소망의 근거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바울은 말하고 행동하면서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본문에 '담대히'로 번역된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원래 '말을 함에서 솔직함' 또는 '두려움 없는 정직함'을 뜻하였으나, 말과 행동에서 '솔직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고후 3: 13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
본 절은 7절부터 시작된, 출 34: 29-35에 관한 바울의 미드라쉬(Midrash)적인 해석의 연속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1]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 조문은 이스라엘이라는 제한적 언약이다. 따라서 택함을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2]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구약시대에는 그 수건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의식적(儀式的) 율법의 조문들은 그 내면에 감추어진 메시아의 사역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수건이 벗겨져야 할 때이다.
복음 사역은 수건을 쓰지 않는 사역, 즉 가려진 것이 없는 사역이다. 복음의 진리는 은밀하지 않고 밝히 드러난 진리, 공개된 진리이며, 그 영광은 없어지지 않는 영속적 영광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아직도 수건을 쓰고 있다. 그 수건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상징들에 대한 무지와 거기서 비롯된 잘못된 율법주의 사상을 가리킨다.
3]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Harris).
Ⓑ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Hughes).
Ⓒ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랬을 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세 번째 견해일 가능성이 크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경우, 모세의 떳떳치 못함과 바울 자신의 떳떳함을 비교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울이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바울이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 봐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므로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할 필요 없이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얼굴에 수건을 쓴 자는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하였는데도 여전히 옛 언약에 집착하여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4] 얼굴이나 머리에 쓴 수건
(1) 덮는 수건
* 고후 3: 13, 15 –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2) 모세가 쓴 수건
* 고후 3: 13, 15 -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3) 망하는 자
* 고후 4: 3 -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벗어지기를 바라는 수건
* 고후 3: 16, 18 –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5) 인정을 의미하는 수건
* 고전 11: 5, 13 –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고후 3: 14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 -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율법의 조문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완고하여 분명한 진리를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옛 언약은 새 언약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
1]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이 곧 사라질 한시적(限時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완고함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건이 쓰이게 되었다.
2]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여기서 '수건'(*, 칼륌마)은 유대인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 등을 상징한다.
3]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유대인들의 눈을 감싸고 있어 그들로 하여금 영적 장애인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참된 영적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 마 5: 17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3: 15 마음을 덮었도다 -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
새 언약인 복음을 알지 못하면 구약의 율법을 깨닫지 못한다.
1]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바울이 앞에서는(14절) '구약'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글'이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지금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2]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본 구절은 유대인들이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 카르디아)은 지적 활동의 중심이며 인간의 인격과 애정이 자리 잡는 곳이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수건이 덮여있으므로 여전히 옛것만 보고 새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첫 언약인 옛 언약의 흠결을 되새겨 보자.
(1) 옛 언약은 제한적이다.
옛 언약의 제사는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없었고, 반복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했다. 반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 히 7: 27 -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 언약의 기초
옛 언약은 심판에 기초를 둔다. 반면 새 언약은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
(3) 중재(仲裁)의 유 무
옛 언약은 죄인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없고, 반드시 제사장이 중재하여야 했다. 반면 새 언약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
* 히 4: 16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후 3: 16 주께로 돌아가면 -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본 절은 당시 초대 교회에 자리 잡은 기독론적 교리를 엿보게 한다.
왜냐하면, 본 절에 '주께로 돌아가면'이란 문구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1]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주'(*, 퀴리오스)는 과거 모세가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현재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초청하는 같으신 주님이시다.
즉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주'(Lord)로 불렸던, 동일(同一)한 분이시다(Hughes).
바울은 본 절에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참된 자유와 영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니라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돌아가면'(*, 에피스트렙세)은 '돌이키다', '회개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회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면,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에서 벗어나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없어지게 된다.
* 롬 10: 4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새로운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