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대인과 할례(2:25-29)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25)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26)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7)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8)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9).”
본문개관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에 이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게 하는 결정적인 유대인의 정체성의 표지이며 그들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호막이라고 간주한 할례도,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안전막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과 할례를 통한 언약 백성의 신분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할례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응답의 표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을 축복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시고(창17장), 그 언약을 지키는 징표로 아브라함과 그의 남자 후손들과 그들의 집에 있는 남종들로 하여금 모두 난지 팔일 만에 할례, 즉 일종의 포경 수술을 행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 출생한 지 팔일 만에 반드시 할례를 받는다. 유대인으로 출생하였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실제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그는 언약 백성의 반열에 들어올 수 없다. 이리하여 바울 당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그들의 독특한 신분에 대한 최후의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았더라도 율법을 범하게 되면, 그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 할례가 되며, 따라서 율법의 소유와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특권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이점을 더 심화시키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설사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행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율법을 범하는 할례자 유대인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할례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율법을 어겨 무 할례자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정한 유대인은 단순히 할례만 받은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이다.
본문(2:25-29절)은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는 25절, 율법의 제도를 지키는 무 할례자 이방인에 관해 언급하는 26-27절, 그리고 참된 유대인이 누구인가를 지적하는 28-29절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25절)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행할 경우 그에게 있어서 할례는 유익하지만, 율법을 범할 경우 할례가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무 할례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둘째 부분(26-27절)은 무할례자로서 율법의 제도를 지키는 신실한 자는 사실상 할례자와 동일한 사람이 된다는 것과, 그들 중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오히려 율법을 범하는 할례자를 판단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마지막 셋째 부분(28-29절)은 진정한 유대인이 누구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답변한다. 진정한 유대인은 단순히 할례 받은 자가 아니라, 할례와 관계없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자를 진정한 유대인으로 간주하고 칭찬한다는 것이다.
본문주해
①할례의 효능
바울 역시 할례 받은 유대인으로서 할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빌립보서 3: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 11:22절과 로마서 11:1절에서도 나타난다. 구약 창세기 17장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할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징표이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가 아무리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며, 언약 백성의 징표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인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그에게 무 할례와 똑같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할례자가 율법을 지킬 때에만 비로소 그에게 있어서 할례가 유익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바울의 선언은 할례가 유대인을 지켜주는 최후의 안전판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 중에는 할례가 그들을 최종적인 징벌로부터 보호해주는 안전판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참조, Sanhedrin 10.1).
물론 우리는 이 말을 유대인이 율법을 범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할례에 약속되어 있는 모든 언약 자체를 폐기하시고 할례를 무익한 것으로 폐기 처분해 버리신다는 것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할례자가 율법을 범하여 무 할례자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하나님은 할례에 약속된 언약을 폐기처분하지는 않으신다.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은 인간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신실한 인격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다는 것이 구약의 일관된 사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편에서의 답변이다.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율법을 범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을 무 할례자, 곧 자신을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언약 백성의 신분 유지에 필수적인 모든 율법을 지키겠다는 의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갈 5:3). 율법을 범한다는 것은 스스로 언약 백성의 신분임을 포기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을 무 할례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6-27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의 제도를 지키는 무 할례자, 혹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의문(儀文)과 할례를 가지고 있으면서 율법을 범하고 있는 유대인을 판단할 수 있는 무 할례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들이 일반 이방인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일반 이방인들은 비록 그들도 양심을 가져 본성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율법의 제도를 알고 지키거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26-27절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무 할례자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일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알고 성령 안에서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유대 문헌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 자신들이 사악한 이방인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지혜서 3:8; 4:6; 희락서 24:29; 제 1 에녹서 38:5; 95:3; 아브라함의 묵시록 29:19; 1QS 8:6; 1QpHab 5:4-5).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율법을 지킨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마지막 심판 때 율법을 지키지 않은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11:31-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미 마지막 심판 때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온 남방 여왕과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의 악한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바울도 예수처럼 이방인 신자들이 마지막 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당대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위선과 범법 행위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②마음의 할례
진정한 유대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28-29절은 사실상 2:17절부터 바울이 언급해 온 당대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과 고발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며, 진정한 할례는 의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성령에 의한 할례”라는 바울의 강조는, 유대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실제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사람, 그리고 할례 받은 자로 자랑하면서도 실제로 할례가 담고 있는 언약 백성의 의무는 하지 않는 당대 유대인들의 위선과 범법 행위를 고발하고 책망하기 위함에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책망은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한 예례미야 선지자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멸하리니...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렘 9:25-26).
예수도 산상설교(마 5-7장)에서 당대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금식과 기도와 구제를 비판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과 구제와 기도를 요란스럽게 하지 말고, 오히려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은밀하게 할 것을 교훈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만 보이려는 외식적인 금식과 구제와 기도는 받지 않으시고, 오직 은밀하게 하는 금식과 구제와 기도를 기억하시고 받으시기 때문이다(마 6:1-18). 따라서 진정한 크리스천은 외면보다 이면, 문자보다 성령, 돌보다 마음, 노출보다 은밀을 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외면보다 이면, 문자보다 성령, 돌보다 마음, 노출보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구약에서 암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말하는 31:31절 이하에서 돌비에 새겨진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질 것임을 예언하고 있으며, 에스겔 선지자도 36:26절 이하에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너희 안에 새 영을 주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3:3절 이하에서 옛 이스라엘 백성과 고린도 신자들을 비교하면서, “너희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라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같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의 직분과 자신이 받은 새 언약의 직분을 비교하면서, 새 언약의 직분은 의문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성령)으로 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2:28-29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표면과 이면, 문자와 성령의 대조를 사실상 종말론적인 대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성령의 오심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기준이 표면보다 이면을, 문자보다 성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새 언약 시대가 도래 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당대 유대인들이 이미 사라지고 있는 옛 언약의 관점에서, 표면과 문자, 육으로 한 할례 등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진정한 유대인은 할례만 받고 실제로 율법을 행하고 있지 않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받고 율법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신자들이다. 이들이 종말론적 새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유대인,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다. 하나님께서 칭찬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