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계엄군 주둔
군인 일 개 중대 병력 이백 명이 네 줄로 질서정연한 대오를 이루며 소화다리를 건넌 것은 십이월 이십일 이었다. 그들은 읍사무소 쪽의 큰 길을 따라 행군해나갔다. 행인들이 걸음을 멈춰섰고, 양쪽 길가의 상점들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그들의 절도있는 행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군인이었으며, 하나같이 완전무장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가 이백 명이나 되는 대병력 이었다. 일정시대부터 그때까지 읍내사람들은 무장을 갖춘 이백 명의 병력을 본 일이 없었다.
"저 것이 워찌 된 군대랑가?"
"아 보면 몰릉가?"
"몰르닝께 묻제 암스롱도 묻겄어?"
"워따 속 편허게 몰를 것도 쌨네. 아 빨갱이덜 잡자고 오는 것 아니겄는가." "빨갱이 잡자고? 워메, 우리는 인자 망해분졌네."
"거 먼 소리여?"
"아니, 뭔 소리는 먼 소리겄어. 고 쪼깐헌 토벌대덜 등쌀을 견디기에도 몸서리가 나고 허리가 휘었는디 저 많은 군대 등쌀에 인자 워찌 살겄는가. 빨갱이덜 잡기 전에 우리가 먼첨 등가죽 벳게지고 말 것이네."
"금메 말이시, 수도 택웂이 많고, 걱정은 걱정이시."
"참말로 썩을 눈의 시상이시. 해방이 되먼 배불르고 활개치는 시상이 올 줄 알았등마 갈수록 첩첩산중이랑께. 요리 험한 시상일 바에는 일정때가 훨썩 나았제." "참 내놓고 헐 말언아니네만 자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시." 두 남자는 멀어져가는 군대의 행렬을 근심스럽게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행렬의 뒤로는 조무라기들이 떼를지어 따라붙고 있었다.
군인의 대열은 역 앞을 지나 남국민학교로 들어갔다. 교문 양쪽으로는 경찰과 토벌대, 청년단원들이 도열해 있다가 군인의 대열이 들어서자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열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운동장 중앙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행군해 나아가고 있었다.
"발으맞추어이 갓!"
행렬의 옆에서 걷고 있던 상사가 병사들의 신경을 모아잡기라도 하듯 힘찬 구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일제히 소리를 맞춰 하나, 두울,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우렁차게복창을 해댔다. 교문 앞에서 제지를 당한 수많은 조무래기들은 그 우렁찬 구령소리를 듣고는 안타깝게 발들을 동동 굴렀다. 군인들은 조회대 앞에 소대별로 도열했다.
"열주웅쉬엇!" 상사의 구령에 맞춰 병사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중대에-차려엇!" 구두뒷굽 부딪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몸이 일시에 빳빳해졌다. 그 절도있는 동작에 따라 어깨에 맨 총끝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중대에-세우어 총!" 개머리판이 땅을 치는 쇳소리가 둔중하고도 위압적으로 울려 퍼졌다.
"사령관님을 향하야 경례엣!"
병사들은 오른쪽 다리 옆에 바짝 세우고 있던 총을 들어올려 받들어총을 했다. 상사가 조회대를 향해 돌아섰다. 조회대에는 키가 껑충하게 크고 깡마른 젊은 장교가 서 있었다. 그의모자에는 중위계급장이 붙어 있었는데, 오른쪽 어깨에는 사병들과 마찬가지인 M1소총을 메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분명 권총이 없었다. 그의 큰 키에 M1소총이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장교가 칼빈도 아닌 M1소총을 메고 있다는 사실은 이색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병 여러분, 이동에 수고가 많았다. 우리는 마침내 작전지구에 도착했다. 모두 각오를 새롭게 하기 바란다. 이상." 그의 음성은 깡마른 체구와는 달리 굵으면서도 우렁찼다. 그는 벌교. 보성지구 사령관 심재모였다. 심재모는 조회대를 내려와서 그때까지 엉거주춤한 자세로서 있던 기관장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벌교 보성지구 사령관 중위 심재몹니다." 그가 읍장과 경찰서장 등 대여섯 명을 향해 한말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차례로 악수를 나눠가면서는 상대방이 말하는직함과 이름을 신중하게 듣기만 했다. 그의 거동에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해나가는 엄격함이갖춰져 있었다.
"오늘은 장병들이 고단할 것 같아 읍민 환영식은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읍장이 손을모아 잡으며 말했다.
"그 말씀으로 환영을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절차는 생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게 다 민폐를 끼치는 일이니까요." 심재모는 엷은 웃음기가 도는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어투는 명령적인 위압감을 띠고 있었다. 사실 계엄하의 지역사령관인 그의 말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기도 했다.
"우리 읍을 위해 이리 고생들을 하시는데 그게 무슨 민폐라고..." "아니오, 내 말대로 하시오."
심재모는 읍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건 분명한 명령이었다. 읍장은 심재모가 겸손을 부리는 건지 모른다 싶어 한마디 더 했던 것이고, 심재모는 읍장의 그런 심중을 꿰뚫어보고 보다 확실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읍사무소로 자릴 옮깁시다. 경찰서로 가야겠지만..." 심재모는, 불타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일 아니겠소, 하는 뒷말은 생략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자신이 읍내에 관한 정보를 어느만큼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데는 충분했던 것이다.
"고단하실 텐데 우선 여장부터 푸시지요." 읍장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장이라고요? 난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계엄하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소.
계엄하의 군경은 근무에 밤낮이 없다는 것쯤 아실 텐데요." 심재모는 읍장을 향해 정색을하고 있었다. 그 눈길이 매섭고도 차가웠다.
"강 상사, 강 상사!" 심재모는 뒤로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까 부대를 지휘하던 상사가 재빠른 동작으로 뛰어왔다.
"나 잠깐 읍사무소에 다녀올 테니깐 장병들 휴식시키노록. 경계철저, 이탈방지, 기물손상예방, 잊지 말도록!"
"옛! 알겠습니다." 강 상사가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찬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는 심재모 중위보다 일고여덟 살은 더 먹어보였다.
"갑시다." 심재모는 어깨의 M1소총을 고쳐 메며 경찰서장을 향해 말을 던졌다. 그런 그의태도는 읍장이란 존재를 묵살하는 것이었다.
기관장 일행 대여섯 명은 마치 줄을 서듯이 해서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말없이 걷고 있는그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주눅이든 것 같았다. 토벌대장 임만수는 그 직책으로나 지금까지의 기세로 보아 당연히 경찰서장 앞에 서야 됨에도 불구하고 염상구와 함께 맨뒤에 처져 걷고 있었다.
"니기미, 사람 팍 겁믹여뿌네." 염상구는 오래 참았다는 듯 쌍소리와 함께 침을 내뱉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결코 크지가 않았다.
"첫물이니까 괜히 용써보는 게지. 제 놈이 가면 얼마나 가겠어, 흥." 임만수는 코방귀를 날렸다. 그러나 염상구에게는 그 코방귀가 그의 푹 꺼진 콧잔등처럼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틀 전,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미 임만수가 쉰밥이 된다는것을 알았고, 정작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계엄군이 나타나게 되자 염상구의 마음은 임만수한테서 씻은 듯이 떠나고 말았다.
기관장들은 읍장실로 모여 앉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심재모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주둔 목적은 다 아시다시피 치안확보 때문입니다. 첫째 반란 세력의 소탕 제거, 둘째 민생보호와 민신수습이 그 이대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수행 달성 하기 위해서 지휘계통을 일원화해야만 합니다. 본관은 벌교. 보성지구 사령관으로서 벌교. 보성. 조성.
고흥 일원의 치안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시간부터 현지 경찰, 파견 토벌대, 청년단 등은 본관의 지휘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실내인데도 모자를 벗지 않고 있는 심재모는 견고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을 마치고 사람들을 휘둘러 보았다. 사람들은 얼어붙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토벌대 임만수 대장님!" 심재모가 느닷없이 호명하듯 했고, "예에, 제가 임만숩니다." 임만수가 당황한 몸짓으로 반쯤 일어섰다.
"그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임 대장님. 그런데, 토벌대는 어디에 주둔하고 있습니까?" "예에, 저어... 우선 남도여관에..."
"뭐요, 여관? 당장 짐을 꾸려 남국민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키시오!" 심재모는 의자 옆에 세워둔 M1소총을 불끈 들었다가 놓았다. 마룻장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임만수는 가슴 한복판에 뜨거운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저 새파란 자식이 어디다 대고...
따귀를 얻어맞는 것 같은 모욕감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임만수는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임만수에게로 쏘렸다. 그 눈들이 하나같이 당혹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심재모의 눈만은 싸늘한 빛을 쏘아내며 임만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언저리에는 눈빛만큼 싸늘한 웃음이흐르고 있었다. 숨막히는 정적이 쌓였다.
"뭔가, 항명하는가!"
마침내 심재모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는 않았지만 냉정하고 위압적이었다. 항명- 그 한 마디가 임만수의 뇌리를 쳤다. 명령으로 시작해서 명령으로끝나는 군대나 경찰조직 속에서 항명이란 곧 목숨을 내거는 일이었다. 임만수는 난감해졌다.
항명을 시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항명을 시인하면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었고, 부인하면 깨끗한 패배를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을 때 순간적으로일어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해서였지만, 전혀 계산이 없었던 겄은 아니었다. 그렇게정면도전을 하면 풋내기 주제에 당황하고 흔들리리라 생각했던 것이고, 그 기회를 포착해서더 몰아붙여 콧대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당횡하거나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정면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대답이 없는 건 항명을 시인한다는 건가!"
심재모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약간 크게 울렸다. 아아... 임만수는 신음을 씹었다. 군인이 안되고 경찰이 된 것이 또다시 뼈저리게 억울하고 분하고 후회스러웠다. 임만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서도 항명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지 않는 제삼의 방법을 택해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항명이고 아니고를 따지기 전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까내놓고 뒤집어 보면 그저그 타령인 처지에 군복 입고 경찰복 입었다는 차이로..." 땅!
느닷없는 총성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질겁을 한 좌중은 벌떡 일어서기도 했고, 머리를 책상 밑으로 처박기도 했고, 손바닥으로 두 귀를 막은 채 눈을 휘둥글하게 뜨고 있기도 했고,각양각색이었다. 심재모만 흐트러짐이 없이 똑바로 앉아 있었다. 그는 M1을 세운 채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임만수, 똑똑히 들어! 모두 까내놓고 뒤집어놓고 보면 그저 그 타령이라고? 네놈의 그 한마디로, 네놈이 일정시대에 얼마나 개같이 더럽게 살았는지 환히 알 수가 있다. 개 눈엔 똥밖에 안 보인다고, 나도 네놈처럼 산 줄 아느냐. 네놈이 일본 말단순사질이나 형사질을 해먹다가 해방이 되고나서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 복직되어 토벌대장 노릇을 해먹으니, 나도 네놈과 같은 과거를 가진 관동군 출신쯤으로 뵈는가? 정신 똑바로 차려. 난 독립군출신은 못 되지만, 학병 출신이다. 글줄이나 쓴다는 놈들은 '영광스런 성전에서 기쁨으로 참전하자'고 선동해대고, 너 같은 놈들은 덩달아 한 명이라도 더 전쟁터로 내몰려고 혈안이되
어 날뛰었던 바로 그 학병 출신이야. 일년 남은 공부를 작파하고 내가 왜 군대에 투신한 줄아는가! 바로 네놈들 같은 썩어빠진 종자들이 이 나라의 권력조직 속에 득실거리기 때문이었다. 위로는 친일 지주계급들이 뭉쳐지고, 아래로는 네놈 같은 민족반역자들이 모여 권력조직 칠팔 할을 장악했으니 이 나라 장래를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은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입을 놀려대? 너 같은 놈들은 해방이 되자마자한 놈도 남김없이 감옥에 처넣었야 돼. 그리고, 엄정한 재판을 거쳐 형량을 정하고, 그 기간을 강제노동으로 채우게 했어야 돼. 그것만이 네놈들의 반역으로 더욱 피폐해진 조국 건설에 다소나마 봉사하게 하고, 민족 앞에 최소한의 사죄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네놈들은그런 속죄의 기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못했고, 더구나 다시 권력조직에 포함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네놈처럼 안하무인의 짓을 하는것이야.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다니, 네 놈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영창감이야!" 두눈에 힘을 모아 임만수를 응시하고 있는 심재모는 언성을 높이는 법 없이 차분하게 말해나갔다.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깨무는 듯한 어조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임만수는 물론이고 좌중의 모두는 하나같이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심재모의 말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네놈들'이라는 복수지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청년단장 염상구만이 제외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주먹을 휘두르며 행패를 일삼고 살아온 과거가괜히 켕기는데다가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그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임만수, 즉시 명령을 수행하라!" 심재모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렸다. 좌중의 눈길이임만수에게 쏠림과 임만수가 벌떡 일어난 것과는 거의 동시였다.
"즉시 명령 수행하겠음." 복창과 함께 거수경례를 붙인 임만수는 쫓기듯 사무실을 나갔다.
"권 서장, 그 동안 토벌대의 작전실태와 읍내의 치안상황을 간단하게 요약 보고하시오."
심재모가 권 서장을 주시했다. 권 서장은 빠르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심재모는, 앉아서 말하라는 손짓을 했다. 권 서장은 머뭇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예에... 토벌대는 그 동안 주로 각 동네 단위로 불순분자 색출에 주력해왔습니다. 그리고읍내의 치안상황은, 통행증을 발급함과 동시에 교통을 통제하고 있으며, 야간 통행금지를 철저하게 시행함과 아울러 해변을 포함한 외곽지대의 봉쇄와 경계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
동네 단위의 불순분자 색출이라, 안전지대만 찾아다니며 민폐만 끼친 모양이군." 심재모는혼잣말을 하듯 하고는, "잠적한 반란세력 소탕작전은 전개하지 않았단 말이오?" 눈빛을 예리하게 빛냈다. 권 서장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됐소. 다음은 읍내의 치안상황인데, 교통통제, 야간통금 실시, 해변과 외곽지대 봉쇄, 모두계엄상황하에서 취해야 할 조치들이오. 그러나, 그런 조치가 벌써 한 달이 넘게 계속되고 있소. 그 동안 민생문제는 어떻게 됐는지, 읍장께서 말씀해보시오." "아, 예예..." 갑자기 지적을당한 읍장 이병주는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그래서 장도 서지 못하고 읍민들 불편이 다소 있기는 합니다만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재모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아야 한다, 좋은 말이오. 그럼, 도데체 언제까지 참아야 한단 말이오?" 심재모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어렸다.
"그야 저어..." 자신의 말이 빗나갔음을 눈치챈 읍장은 난색이 되며 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본관의 직권으로 야간 통행금지만 제외하고 나머지 조처는 내일부터 전면 해제하겠소."
심재모는 강한 어조로 말했고, 이 느닷없는 말에 좌중 모두는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 서장, 읍내를 한 바퀴 돌아봐야겠소. 안내를 부탁하오." 심재모는 자리에서 일어나는것과 M1을 어깨에 메는 것과를 한 동작으로 해치우며 말했다.
심재모와 서장이 큰길로 나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기관장들의 가슴에는 까닭 모를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의 존재가 믿음직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불편한 것 같기도 했고, 쓸만한 사람 같기도 했고, 귀찮은 존재 같기도 했고, 서로 말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은 제각기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감추고 있었지만 심재모에 대하여 달갑잖고 마땅찮게 여기는 감정은 공통되고 있었다.
심재모는 경기도 수원 태생이었다. 예로부터 중부이남 지역을 상대로 서울의 관문 역할을했던 수원의 입지조건에 따라 그의 집안은 상업으로 되물림을 해왔다. 그의 아버지께서는장사에 유용한 수치계산의 숙달을 우선으로 하여, 글을 익히는 데도 장사에 필요한 만큼의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심재모에 이르러 그 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신식공부의 최상인 대학에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업 승계를 전제로 한 엄격한 제한이 따랐다. 상업 학교를 다녀야 했고, 상과대학에 진학한 것이 그것이었다. 환경의 탓이었는지, 별다른 개성이 없어서였는지 심재모는 그런 제한을 별로 제한으로느끼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그가 식민지상황을 가슴으로 앓기 시작한 것은 대동아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부터였다. 전에 피상적으로만 느껴져 왔던 조국이라는 것이나 민족이라는 것이 구체적 실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학도병 지원이란 몰이를 당하면서였다.
조국이라는 개념과 민족이라는 형체가 잡혀가면서 그는 전에 별로 관심 쓴 일이 없었던 일군의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글줄이나 써먹고 살아가는, 문필가나 문학가로 불리는 내선일체만이 우리가 복되게 살 수 있는 최선최상의 길이라는 글을 써대는한편으로. 성전에 나가 죽는 것만이 가장 영광된 젊은이의 일생이라는 요지의 글들을 뻔질나게 써서 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그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떼지어 몰려다니며, 청년 장정은 성전으로, 처녀들은 정신대로 솔선해서 나가자고 강연을 하고 다녔다. 심재모는 버마의 끝없는 정글 속을 헤매며 그문필가라는 족속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저주했는지 모른다. 독립투사를 밀고 하는 밀정보다도,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고등계의 말단 형사보다도 그들은 더 더럽고 흉악한 종자들이었다.
그의 그런 판단은, 그들 문필가라는 자들이 모두 배울 만큼 배운 지식층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정신대로 끌려나온 여자들이 하루에 평균 이삼십 명의 남자들에게 짓밟히다가 임신을 하거나 성병에 걸리게 되면 가차없이 정글 속에 버려지고, 성전이란 전쟁터에 끌려나온 청년들은 표나는 차별대우 속에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총질을 하다가 매일매일죽어가고 있었다. 너희놈들은 이 기막힌 꼴들을 아느냐. 너희놈들은 그 짓을 한 대가로 얼마나 호의호식을 하고 사느냐. 도대체 너희놈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더냐. 심재모는 동료의 시체를 정글에 묻으며,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치를 떨었다.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새 나라 건설과 함께 모든 종류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 깨끗하게 처단한다는 뜻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의 물결은 그 기대를 완전히 뒤엎고 말았다. 경기지구 학도병 모임을 주도하고 있던 심재모는 이미 대학생 때의 심재모가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가업을 이어 장사로 안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뜻을 함께 하는 다른 학병 출신들과 군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학병 시절부터남다른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버마 전선에서 M1소총을 다루었었다. 노획물인M1소총은 저격용이었고, 자연히 사격술이 뛰어난 그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소총에 비해 M1소총의 성능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조준의 숙달을 거치고, 목표물의 거리와탄알의 이동곡선이 직감적으로 계산되는 단계를 지나면 이동표적이라도 얼마든지 적중시킬수 있도록 명중률이 높은 총이었다. 심재모는 M1소총을 통해서 미국이란 나라를 인식했고,이런 총과 맞서 싸우다가는 일본은 언젠가 패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혼자 했던 것이다. 그는단기 장교훈련 때 M1소총을 다시 만지게 되었다. 그의 사격솜씨는 단연 돋보였고, 그 덕에보병병과를 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M1소총의 성능을 믿었으므로 다른 총은 휴대할수가 없었다. 칼빈은 그 방정맞은 생김새처럼 명중률이 형편 없었고, 더구나 권총은 적과 싸우는 무기일 수가 없었다. 사병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M1'이었고, 아무리 키가 작거나몸
이 약한 사병이라도 M1소총이 무겁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심재모와 권 서장은 횡계다리 위에 서서 낙안벌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옥산이고, 그 너머에 조계산으로 빠지는 오금재가 있습니다. 좌측으로 멀리 보이는 저 큰 산이 징광산이고, 우측의 저 뾰족하게 솟은 것이 제석산입니다. 저 산줄기들은 모두 조계산으로 이어져 있는데, 앞으로 특히 문제가 될 것이 징광산입니다. 징광산은 높이보다는 몸집이 커 골짜기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묘하게도 조성과 보성에근접해 있습니다. 미확인입니다만, 염상진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는 반란군은 조계산 속에 은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권 서장이 손가락질을 해가며 설명했다.
"아마 그 추측이 맞을 거요. 지리산은 소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니, 그쪽으로빠졌더라도 다시 조계산으로 피해야 할 형편이오.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자연히 접근하게 될 게요. 빨갱이도 먹어야 사니까. 염상진의 인적 사항은 어떻소?" 심재모는 옥산 뒤로굽이굽이 이어져나간 산맥을 먼 눈길로 바라본 채 물었다.
"남로당 보성군책, 벌교 출생, 이십구 세, 광주사범 졸업, 일정 때부터 적색농민운동 주도,투옥된 경력을 가졌습니다."
"그만하면 영웅호칭을 받을 만한 인물이군." 심재모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끼룩, 끼룩, 끼룩... 심재모는 불현 듯 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어깨의 총을 벗어 겨냥을하고 있었다. 총끝이 향하고 있는 하늘에 기러기 수십 마리가 ㅅ자를 옆으로 누인 대형을이루며 선수머리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심재모가 겨누고 있는 총끝은 기러기의 움직임에따라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권 서장은, 괜한 총질을 해선 안 될 텐데, 걱정을 하면서도심재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상진, 그 자의 성품이 어떻소?" 총을 내리며 심재모가 불쑥 물었다. 권 서장은 그때서야문득, 그가 기러기를 향해 총을 겨눈 것은 기러기를 잡자는 것이 아니라 염상진의 인적사항을 듣고 촉발된 어떤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나본 일이 없어서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들은 바로는,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에 과묵한 편인 모양입니다."
"침착해서 그 동안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건가. 글쎄, 자체 정비가 아직 안 됐는지도 모르지."
심재모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본 채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권 서장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까 읍사무소를 나오며, 그 동안 빨갱이들의 말썽은 없었느냐고 심재모가 지나가는말처럼 물었고, 자신도 예사스럽게, 별일 없었다,고 대꾸했던 것이다. 대답을 해놓고 나서 병원 사건이 생각났다. 그 사건은 며칠 전에 마무리가 되서 세 사람을 순천지법으로 넘겼던것이다. 그 사건이 '별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종결 시킨 사건을 다시 들춰내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무적인 보고사항이 아닌데다가 현지 서장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심재모는 정말 '아무일 없었던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
다. 잘못하다가는 그 사건을 은폐하거나 속이려 한 결과가 될지도 몰랐다. 만약 나중에라도알게 되면...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나... 그러나 권 서장은 왠지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 학교로 돌아갑시다." 심재모가 먼저 걸음을 떼어 놓았다. 제석산 등성이에는 아직 햇살이 남아 있는데, 부용산 그늘이 내려 앉은 길거리에는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심재모와 읍내를 살펴본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역 쪽으로 나가 장좌리 일원의 해변을 보여주었고, 철로를 따라가다 건널목에서 칠동일대와 고흥 가는 길을 설명했으며, 소화다리에서 회정리 쪽과 선수머리로 이어지느 포구를 살폈고, 마지막으로 횡계다리 위에 섰던것이다. 심재모가 남국민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전병력이 운동장에 집결되었다. 경찰토벌대도군인들 옆으로 도열했다.
"지금부터 작전지구내에서의 준수사항을 하달한다. 첫째, 군기 철저 확립. 둘째, 근무 철저수행. 셋째, 민폐 철저 방지. 첫째와 둘째는 부언 생략하고, 셋째 사항에 대하여 첨가하겠다.
셋째 일, 어떤 장소 어느 경우에도 부녀자를 희롱하지 말 것. 셋째 이, 어떤 경우 어느 입장에서도 민간인을 구타하지 말 것. 셋째 삼, 어떠한 상황에서도 민간인의 재산에 대해서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손대지 말 것. 호의라고 해서 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는 경우에는, 처째사항의 군기문란, 둘째 사항의 근무이탈, 셋째 사항의 민폐유발이 적용, 즉결처분을 받게 될것이다. 허용되는 것은 단 하나, 목이 말라 물을 얻어먹는 것과 배탈이 나서 변소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만약 이상의 사항을 어기는 자는 즉결처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상." 칼을내려치듯하는 심재모의 말이었다.
염상구는 농밀한 어둠을 헤치며 회정리 일구 도래등을 넘고 있었다. 속이 꼬인데다가 술몇 잔을 급하게 마셔 그런지 명치께가 묵지근하고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청년단장, 형이 염상진이라고? 사상이야 자유니까 아무래도 좋소. 중요한 건 청년단 문젠데, 청년단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좋지 않은 평판이 많다는 건 염 단장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 좋지 않은 평을 듣는 데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민폐를 끼치기 때문일 것이오. 여기 청년단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고 믿지만, 앞으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앞으로 청년단의 활동에 관해선데, 그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내 명령에따라 행동해야 하며, 염 단장은 이 점을 잊지 말고 나한테 협조해야 할 것이오. 협조가 잘이루어지는 것만이 서로에게 유익한 일일 것이오. 앞으로 독자적인 행동은 일체 삼가시오."
심재모가 그를 따로 불러 한 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심재모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염상구로서는 자신을 따로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심재모를 만나고 돌아선 기분은 떫고 쓰고 시고, 영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재모의 말은 나직하고 부드러운 것 같았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돋치고 옹이가 박여 있었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것은 목소리였을 뿐이지 말의 내용은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명령이었다.
만약 협조를 못하겠다면? 그러나 그건 속에서만 끓어오르는 억지요 오기에 불과했다. 지구사령관이라는 직위 앞에서 청년단장이란 직책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엄연한 정규경찰 병력을 이끌고 있는 토벌대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꺾이고 마는 판에 임시 조직에 불과한 청년단의 일개 단장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명령계통이라는 것은 강단과 배짱으로 끝장을 보는 주먹판이 아니었던 것이다. 토벌대장처럼 여러 사람 앞에서 병신을 만들지 않고 단독으로 부른 것만도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뒤틀리고 꼬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제 아무리 나이가많아봐야 같은 또래밖에 안되었을 그의 얼굴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토벌대장 임만수와 마주친 것은 남국민학교를 나서자마자였다. 임만수는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 염 단장, 내가 살 테니 술이나 한잔 하러 가지." 임만수는 다짜고짜 팔을 끌었다. 그는자못 호기를 부리고 있었지만 몸에서는 초라한 냉기가 느껴졌다.
"나 지끔 술 묵을 기분 아니요." 염상구는 팔을 뿌리치듯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세상인심이 아무리 조석변이라지만 자네까지 이러기야, 정말?" 임만수는 그 못생긴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 염상구는 순간적으로 그 말이 가슴을쳐
오는 것을 느꼈다. 임만수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이 묘하게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허, 쌩사람 잡지 마씨요, 갑씨다!" 염상구는 임만수의 팔을 끌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자고, 남원장으로 가! 내가 살 테니까 밤새도록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는 거야." 임만수는 땅이 울리도록 발을 내리딛으며 부르짖듯 소리를 질렀다. 임만수는 정말 남원장으로 그를 끌고 갔다. 염상구는 짜증스럽고 난감했다. 심재모를 의식해서도 그렇고, 자신의 기분으로도 그렇고, 임만수가 처해 있는 입장을 보아서도 그렇고, 그와 함께 다른 곳도 아닌 남원장에서 계집들을 끼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곤란한 문제였다.
"이봐라,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라!" 임만수는 마루로 올라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저녁밥이나 묵음시로 술은 반주로 쪼깐 허고 맙시다. 나가 시방 창새기가 비비꾀이고 틀리는 것이 영 술 묵을 기분이 아니요." 자리를 잡고 앉자 염상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왜, 그 자식이 청년단을 헤체시키기라도 했소?" 임만수는 거칠게 내뱉았다. 염상구는 옆에앉은 경월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임만수에게 입조심하라는 주의를 보냈다.
"음마, 대장님언 술얼 걸게 잡수실라고 허는디 단장님이 워째 훼방놓으시요. 나가 춘향이허고 이도령이 만내는 대목얼 이적지 헌 것 중에서 질 이쁘게 뽑을 팅께 술 잠 걸게 드시씨요. 요새겉이 손님 욼음사 밥굶어 죽겄소. 나도 술얼 워찌 묵는 물건인지 잊어뿌렀는디, 오랜만에 오셨응께 술얼 드셔야제라." 경월이가 염상구의 겨드랑이로 파고들며 아양을 떨었다.
"느그덜 밥 안 굶기자고 묵어주는 술 아닝께 주딩이 놀리지 말어. 싸게 가서 밥상에 반주내와." 염상구는 경월이를 밀치듯 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여자는 심심찮은 느낌을 가졌는지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나도 인자 존 시절 막음헌 모냥이요. 나야 지닌 것 똥배짱에 주먹댕이뿐잉께 으짤 수가웂지만도, 대장님언 여그서 더 쉰밥 되지 말고 워디 존 디로 떠야 헐 것이요." 이것은 염상구의 진심이었다. 임만수는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자라는 것은 권력이 약해지거나, 없어지면 순식간에 허수아비가 된다는 사실을 염상구는 다시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두 사람은 반주로 나온 술만을 빠르게 바닥내고는 일어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말은 거의 주고받지 않았다.
임만수와 헤어지고 난 염상구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소화다리를 건너고 있는 자신을발견했던 것이다. 내가 왜 이쪽으로 가고 있나, 그는 걸음을 멈칫하며 생각했고, 자신도 모르게 외서댁을 찾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염상구는 무심코 담뱃갑을 꺼냈다가 도로 넣으며 어둠을 휘둘러보았다. 드러나는 것은 가까운 산의 형체뿐인 어둠 속에서 물큰 풍겨오는 냄새가 있었다. 코에 익은 외서댁의 체취였다. 노리치근한 것 같기도 하고, 비리치근한 것 같기도 한 그 냄새는 언뜻 스치고 갔을 뿐다시 맡으려고 해도 맡아지지 않았다. 외서댁의 몸냄새는 쫄깃거리는 그녀의 그것을 닮았음인지 이상스럽게도 진하고 질긴 느낌을 주었다. 그 아까운 여자가 어찌 하필 빨갱이의 마누라가 되었을까... 염상구는 새삼스럽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알몸을 더올렸다. 큰 가슴과 탄력이 좋은 그녀의 알몸이 어둠 속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뻣뻣한 나무둥치일 뿐이었던 그녀는 네댓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못 견디겠다는 듯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반신이 비비틀렸고, 코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변화에 그녀의 그것도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냥 쫄깃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옴죽거렸고, 쫄깃거림과 옴죽거림은 그구멍의 깊이가 끝이 없는 것처럼 빨아들임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알몸은 꿈틀거리고, 신음소리도 역력하게 들려왔다. 그의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그의 의식을 싸늘하게 식히는 소리가 느닷없이 들려왔다. "이 바보 같은 놈아, 사람을 팰 줄만 알았지 여자가 사랑 때문에 그까짓 일쯤 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무슨 수사를 해!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눈을 부릅뜬 이지숙의 부르짖음이었다. 마지막 고문을 하기 위해그녀의 잠옷을 다 찢어발겨 알몸을 만들었을 때 그년는 갑자기 발악하듯 소리치며 비틀비틀일어섰던 것이다. 뒤헝클어진 머리칼과 온몸에 피멍이 든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 섬뜩한 귀신꼴이었다. 그는 그 순간 그녀가 빨갱이가 아니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녀가 빨갱이가 아니고, 빨갱이인 애인을 도주시킨 죄목만이라면 너무 가혹하게 매질을 했다 싶어 염상구는 한순간 눈을 감았던 것이다. 이지숙이 순천 지법으로 넘겨지고 나서도 그 미안함은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니기럴, 사랑이라는 것이 먼지." 염상구는 침을 퉤 뱉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속 뒤틀리고기분 까라질 때는 술 마시는 것보다 맛좋은 그것에 그것 꽂고 전신이 붕붕 떠올라 구름에실리는 맛인지, 바람을 타는 맛인지, 하여튼 아릿아릿하고 짜릿짜릿하고 시큰시큰한 그 환장할 맛을 꼴깍 넘어가도록 보고나서, 찬물 한 사발 마시고 끝없이 깊은 잠 속으로 아슴아슴빨려드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염상구는 권총을 빼들고 좁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지게문에는 석유등잔 불빛이 흐릿하게 배어 있었다. 염상구는 토방으로 올라서며 큼큼 낮은 인기척을 냈다. 그 소리는이미 외서댁도 알아듣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내 지게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누가 볼란지 무선디 싸게 들오씨요, 싸게." 언제나 똑같은 외서댁의 겁먹은 목소리였다.
염상구는 구두를 벗어 선반에 올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머 할라고 또 오셨소." 외서댁이 흩어진 바느질감을 방구석으로 밀치며 똑같은 말을 했다.
"자네가 보고 잡아 왔네." 염상구는 탄띠를 풀며 아랫목으로 내려앉았다. 어린 것이 엎드려자고 있었다.
"참말로, 부부맨치로 말얼 허고 그러요." 외서댁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자네'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것이다.
"하먼, 자네럴 처녀 적에 만내기만 했음사 틀림웂이 내 각시 삼았제. 지끔도 자네는 내 각시나 마찬가지가 아님감? 자아, 싸게싸게 옷벗세." 염상구는 외서댁을 끌어당겼다.
"쪼깐 있으씨요, 나갔다 올 팅께."
외서댁은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마음에 없는 남자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뒷물은 해여 했다.
전혀 마음에 없는 남자이면서도 불결한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그건 무슨 마음인지모를 일이었다. 마음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일까. 처음 그 일을 당하고나서는 그리도 더럽고 징그럽고 싫던 남자가 억지로라도 몸을 자꾸 섞게 되니 그 더러움과 징그러움과 싫음이덜해지는 것 같은 마음은 또 무엇일까. 그래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는데도 몸을 섞게되면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지는 마음은 또 무엇일까. 외서댁은 진저리를 쳐가며 찬물로 뒷물을 했다.
두 사람은 알몸으로 부딪치고 뒤엉키고 꿈틀거리며 불씨가 되고, 불꽃이 되고 불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외서대액- 집에 있는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의 동작은 뚝 멎었다. "자는 대끼혀."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니여라, 싸게 나가서 방에 못들어오게 막아야제라." 그녀가 그를 떼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워떤 씨부럴년이여. 통금시간에 싸돌아댕기는 저년얼 팡 쏴 쥑였으먼 속 씨언허겠네." 그는 떠밀려 상체를 일으키며 씨부려댔고, "워메, 듣겄소." 그녀는 주먹질을 하며엉덩이를 사정없이 뒤로 뺐다. 그 바람에 그의 물건이 쑥 빠져나갔고,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흐흑 하는 헛바람 새는 소리가 흘렀다.
"어이, 외서댁, 자는가?"
"아아함... 누구다요. 누구..." 외서댁은 정신없이 맨몸에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꿰입고 하면서도 입으로는 하품하는 소리까지 내며 금방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안직 초저녁인데 먼 잠얼 폴세 자는가?'
"몸살이 나서 그렁마요. 근디, 요 밤중에 누구다요?"
"나 중천댁이시. 지사 떡얼 쪼깐 혔길래 입이나 다시라고 가져왔구마." "워메, 통금을 엄허게 다스리는 판인디 머 할라고 그러실께라이. 잽히먼 큰일난다든디요.
옷 다 걸쳤응께 쪼깐만 기둘리씨요." 외서댁은 능청스럽게 통금을 들먹여 상대에게 겁을 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에 꽂았던 숟가락을 뽑았고, 염상구는 발가벗은 대로 방구석에붙어앉았다.
"나가 몸도 아프고, 통금시간은 짚어져 순찰을 돌란지 모른께 쉬었다가시라고 허지도 못허겄고, 워쩔께라? 오늘 온 군인들이 동네마동이잡대끼 순찰을 돌고, 잽히는 사람은 모다 빨갱이로 몬다고 안 그럽디여." 마루로 나선 외서댁은 자신도 모르게 잘도 꾸며대고 있었다.
"고런 말이 있었능가?" 중천댁이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하먼이라. 군인덜언 순사허고는 그 맵고 짜운 것이 저울질이 안된다고 그럽디다. 나 땀시중천댁이 무신 일 당허먼 안된께, 나가 집꺼정 바래다디려야 되겄구만이라." "아니시, 아니시. 자네 몸도 아픈디다가, 우리 집꺼정 갔다가 되짚어 오자면 자네가 또 위태로울 것잉께나 혼자 핑 갈라네." 중천댁은 벌써 토방을 내려서고 있었다. 외서댁은 사립까지 따라나갔다.
"떡 잘 묵겄소. 미안시러서 워쩔께라." 겉으로 태연한 것과는 반대로 외서댁의 가슴은 계속쿵쿵 울리고 있었다.
"아니시, 자네도 싸게 들어가소." 중천댁이 바삐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외서댁은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워메, 사람 피 보타 죽겄네. 인자 싸게 가씨요." 외서댁은 방바닥에 털퍽 주저앉으며 쏘아붙였다. 내던지듯 한 떡사발이 기우뚱하다가 제자리를 잡앗다.
"거 먼 소리여. 심들게 훼방꾼 쫓아뿌렀응께 지끔부터 맘 푹 놓고 시작허는 것이제. 원체도둑씹 허는 맛은 요렇게 들킬라말라 험시로 아실아실허게 피해가는 디에 지 맛이 있는 법이시." 염상구는 담배를 비벼 끄며 능글능글하게 웃고 있었다.
"워메, 사람 잡을 소리 고만 허씨요. 가심이 타들어 환장을 허겄구만은 워찌 그리 태평시럽다요." 외서댁은 그때까지도 벌떡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저고리 아래로 그녀의큰 유방이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 염상구의 샅에 불끈 힘이 모아졌다. 상체를 굽히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그녀의 유방을 거머 잡았다.
"워메, 참말로..." 그녀는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손이 나머지 유방을 덮었다.
"참말로 요 짓도 인자 그만 혀주씨요. 요러다가 애나 덜컥 들어앉아뿔먼 내 신세가 워찌될 것이요."
그녀는 목이 메어 있었다. 애를 배? 불붙어오르는 감정에 찬물 한 줄기가 끼얹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픽 웃어버렸다. 애를 배든 새끼를 까든 내가 알 게 뭐냐. 애를 배면 그것 참 재미있겠다. 강동식이란 놈이 알면 어떻게 될까! 눈에 쌍심지를 켜고 펄펄 뛰겠지?
정신 못 차리고 집으로 뛰어들면, 그렇지, 그때 때려잡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성욕은 다시 거세게 불붙기 시작했다.
"애가 들앉으먼 머 걱정이여. 아조 내놓고 부부로 살아뿔먼 될 일이제." 그는 정겨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양쪽 유방을 더 힘주어 잡았다. 얼랴, 요것이 무신 소리당가? 요것이참말이여, 사탕발림 소리여. 지정신이 아닌께 나오는 대로 퍼질르는 소릴껴.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그녀는, 마음으로는 분명 헛소리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에서는 이 말이 흘러나왔다.
"애 배먼 부부로 살겄다는 말이 그리 알아묵기 심드는가?" 그의 혀가 귓불을 핥아대고 있었다. 비록 거짓말이고 헛소리일망정, 내가 알 게 뭐냐고 해버리는 것보다는 얼마나 더 듣기 좋은가. 그가 젖을 어루만지고 귓불을 핥는 감촉이 불두덩이 깊은 곳에서 찌릿찌릿한 불똥으로 튀기 시작하는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까 니년이 번개치대끼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을 본께, 니년도예삿것이 아니여. 니년 그것에만 미치다가는 큰코 다치겄어. 거짓말 둘러붙이는 솜씨가 빨갱이 마누래로 자격이 충분혀. 그는 그녀를 눕히며 한 손을 사타구니로 뻗었다. 그녀의 몸이꿈틀 요동했다.
전 원장의 재판날이었다. 김범우는 통학열차를 타고 순천으로 넘어가려고 일찍 집을 나섰다. 재판 날짜를 앞당긴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노력이었다. 전 원장의 고초를 하루라도 줄이고, 빠른 해결을 보려 함이었다.
"사람이 사는 경우나 이치가 사방, 팔방에 미쳐서도 안되고 십육방, 더해서 삼십이방까지미칠 수 있어야 그나마 원의 모양에 가까운 원만함을 득하게 되는 법인데, 이놈에 세상이어찌해서 사방도 아니고 이방으로 토막이 나고, 그것도 또 반 토막을 내서 일방만 보라 하니 이것 참 큰일날 세상이 되었다. 전 원장이 당하는 고초가 무어냐. 세상사 사람 사는 이치를 둥글게 보려 함인데 그걸 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냐. 세상만사가 양이 있어야 음이있고,음이 있으니 양이 있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순리로 풀리는 법인데, 양은 양만 옳다 하고, 음은 음만 옳다 하니 갈수록 꼬이고 얽힐 수밖에. 예로부터 이런 세상을 난세라 했고,난세에는 깊고 넓은 뜻 가진 사람이 살기가 어려우니라. 내가 힘닿는 데꺼정 손을 쓰긴 했다만 결과가 어찌 될지는 두고 볼 일 아니겄냐."
김범우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유학적 논리이기는 했지만 현실비판의 예리함은 완벽한것이었다. 아버지가 전 원장의 일을 솔선해서 수습하려고 하는 것은, 전 워장이 획일화된 체제의 희생물이나 피해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었다. 김범우는 아버지의 사려 깊음에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 문중이 중심이되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아주 적극적으로 출마를 종용했었다. "권력을 탐하는 자라면 모를까, 이 시기에 어찌 나더러 부화뇌동 하라는 것인가." 아버지는 이 한마디로 주위의 소란을 일소해버렸다. 김범우는 그때도 아버지의 단호함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그 단호함은 한 땅에 두 개의 이름을 내세운 나라가 서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큰아들이 몸던져 수행한 독립운동의 뜻이, 당신이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그 뒤를 살폈던 뜻이, 두 쪽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중이나 주위 사람들의 그런 움직임은 단순하게 권력만을 탐하거나 들뜬 사회분위기에 휩쓸려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김범우는 생각햇다. 그런 움직임의 원인은 바로 아버지에게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가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위원장을 지낸 전력이었다. 자신이 귀국했을 때는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에 의해 이미 해산되고 없었고, 아버지가 위원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귀뜸으로 알았던 것이다. 김범우는 그사실을 알고 얼마나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위원장 자리를 맡은 것은 그동안 독립을 열망해왔던 마음의 표시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의조직화와 함께 와해되고 말았다. 이북에 소련군이, 이남에 미군이 진주한 상황 아래서 그건곧 민족분단의 조짐이었고, 독립국가 건설 의지의 좌절이었다. 문중이나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의 그 전력을 미루어 국회의원에 출마시키려고 했을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다만 그들이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그때 왜 위원장을 지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저'정치에 뜻이 있는 분'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김범우는 소화다리 쪽으로 길을 잡았다. 포구를 채우고 넘쳐났을 안개가 엷게 흐르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지게 되면 안개는 바닷물 속에 숨어왔다가는 포구를 가득 채우고, 동녘이 밝아오면 햇살에 쫓겨 다시 바닷물 속으로 숨어버리는지 자취가 없었다. 생솔가지가 타는 연기내음이 냉기 속에 섞여 싱그러웠다. 기범우는 한껏 심호흡을 했다. 그 매캐한 내음은 언제맡아도 정겹고 싱싱했다. 김범우의 눈길은 왼쪽 두엄자리 쪽으로 옮겨졌다. 개 두 마리가 뒤로 맞붙어 있었다. 조물주가 부여한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범우는 픽웃음을 흘렸다. 이상하게도 개가 그러고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우스웠다. 개는 왜 꼭 이르아침을 골라 그 짓을 하는지, 어쩌자고 한사코 사람 눈에 잘 띄는 장소에서 그 짓을 하는지,그러면서도 그 시간은 왜 또 그리도 긴지, 이런 풀릴 길 없는 의문이 매번 점잖치 못하게스치기 때문에 싱겁게 웃게 되는지도 몰랐다.
김범우는 걸음을 빨리했다. 전 원장의 조서는 무기협박에 의한 강제 의료행위로 꾸며졌다.
조서대로 전 원장과 말을 맞추었고, 간호원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조서를 그렇게 꾸미기까지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 전혀 협박을 받은 사실이 없어요. 내가 유리하자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 염상진씨를 악질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거 아닙니까." 전 원장이 고개를 저으며 한 말이었다. 김범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 전 원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극히 사람다운 사람 하나가눈을 껌벅이며 앉아 있었다.
"자기 때문에 원장님이 이런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을 알면 그보다 더한 거짓말을 해도 염상진은 이해를 할 겁니다."
"글쎄요, 그건 김 선생 생각이지요." 전 원장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원장님,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편법입니다." "글쎄, 편법도 남을 해치지 말아야지요. 내가 한 치료는 의사의 의무이고 권한입니다." "예, 당연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사실대로 재판에 넘겨지면 원장님은 빨갱이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 상황에서 제일 무서운 죄가 빨갱이라는 걸 아시죠? 지금은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땝니다. 종전 직전 패주하는 일본군이 버마 전선에서 무슨 짓을 한줄 압니까? 보급은 끊겼지, 적은 추격해오지, 정글 속으로 도망을 치는데 매일을 굶는 겁니다. 사람이 굶고 며칠을 살겠어요. 굶어죽자고 작정을 하면 이삼십 일을 버틸지 모르지만,살아야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사흘 이상 굶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먹이를 사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는지아십니까. 인간사냥입니다. 자기생존을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데, 원장님은 그까짓거짓말을 가지고 뭘 그리 망설입니까. 저는 더 이상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결정은 원장님스스로 하십시오." "그럼..." 전 원장은, 당신이 바로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말인가 하는 듯한놀란 얼굴로 김범우를 바라보다가, "다 김 선생 말대로 하겠어요." 더듬듯 말하고는 눈을떨구었다.
변호사의 말은 실형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재판을 받아봐야 알 일'이라는 단서를 잊지 않았다.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일벌백계주의로 방침이 정해져 있어서 결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것 이었다.
김범우는 소화다리 중간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눈길은 철교쪽으로 가고 있었다. 통통거리는 소리는 분명히 그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동안 철교 아래 선창에 묶여만 있던배들이 정말 운항에 나서는 모양이었다.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어제부터 통제가 풀린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어제 아침 일찍 알려댄 것은 극장의 스피커였다.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동안 겪었던 민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야간통금을제외한 모든 통제를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나면 그 내용을 알리고, 다시노래가 끝나면 알리고 해서 스피커는 오전 내내 왕왕거렸다.
김범우는 그 조치를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 동안 생활의 불편도 불편이었지만 사람들이겪은 심리적 압박감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계엄군 지휘관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채로 막연한호감이 갔다.
재판은 좋게 보자면 신속했고, 나쁘게 보자면 무성의했다. "말 말아요, 재판 건수가 산더미요. 그놈의 반란사건 땜에 순천 광주 판.검사들 골이 빠져요." 불평을 해야 할 변호사가 오히려 판.검사 편을 들었다.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 원장은 실형 일 년을 선고받았다. 간호원과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협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관계기관에 제보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이 실형선고의 이유였다. 제보기피의 고의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역시 법관은 그 나름의 예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것이 허점으로 찔리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 원장은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실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도 무표정했다. 이지숙도 까딱을 하지 않았고, 간호원만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걱정할 것 없어요. 상고하면 됩니다. 재판은 상고하는 재미에 하는 것 아닙니까." 변호사는 아주 태평스럽고 수월하게 말해버렸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김범우는 더 할말이 없었다.
의사가 그렇듯 변호사의 직업의식도 피고의 고통에는 철저하게 둔감했다.
"고법에서도 재판이나 빨리 받게 손을 써둬요. 나는 고법으로 빨리 넘어가게 손을 써볼 테니까 말이오." 변호사는 가방을 챙겨들며 말했다. 그의 분주한 모습이 김범우에게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한철 만난 무슨 장사치 같은 인상이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연락 드리지요."
김범우는 뿌옇게 흐려진 마음으로 변호사 대기실을 나왔다. 경찰서나 마찬가지로 재판소도사람들로 들끓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붐비는 장소는 으레 소란스럽기 마련인데 그곳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소리가 엉키고 부딪치는 소란이 분명히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이 소란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침울한 모습들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는 목메인 탄식이거나 울음 섞인 넋두리거나절망적인 부르짖음이었다. 운동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의 소란이 살아 있는 소란이라면 재판소의 혼란은 죽어 있는 소란이었다. 김범우는 얼음덩이 속을 걷는 것 같은 오한을느끼며 그 죽어 있는 소란 속을 빠져나왔다. 변호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거의가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들의 가족이거나 친척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루 재판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 피고는 도대체 얼마란 말인가. 그리고 재판은 오늘만이 아니라 그 사건 이후에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얼마동안 계속될 것이었다.
재판소의 정문에 이르러 김범우는 무심코 건물을 돌아다보았다. 햇빛이 반짝 눈을 쏘아왔다. 그는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고딕식인지 뭔지, 서양건물의 모양을 흉내낸 벽돌건물은 화강암 장식을 부착한 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일정때의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그 냄새는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장기의 섬뜩함과 닛본도의 서늘함과 게다 소리의 싸늘함 같은 것이 뒤섞인 듯한 아주 잡치는 냄새였다. 높직하게 자리잡은 재판소에는 비 오는날만 빼고는 언제나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이들마저도 그 앞을 지나갈 때는 옆걸음질을 쳤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일본사람이 주체가 되어 조선인을 재판했고, 이제는'대한민국'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 국민을 재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법관이란 사람들은모조리 식민지시대 인물이었다. 재판소는 바로 해방 삼 년 동안의 사회적 갈등과 문제점이응집 축소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김범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정문을 나서며 실형 일 년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상고를한다지만 형량이 줄어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고통을 겪으며 보내야 하는 일 년의 세월이얼마나 지긋지긋하게 긴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선량하기만 한 전 원장의 모습이자꾸만 눈앞에 어릿거렸다. 그를 구해내는 방법이 뭐 없을까... 고개를 뒤로 젖힌 김범우는방향도 없는 걸음을 무작정 옮겨놓고 있었다.
"엄니, 그냥 여그서 살제 워째 이사럴 가고 그런가!" 마지막으로 부엌살림을 싸고 있는 들몰댁 앞에서 작은아들 종남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대들 듯 말했다. 들몰댁은 손만 재게 놀렸다. 곧 달구지가 올 것이었다.
"엄니이, 워째 이사럴 가냐니께에!" 종남이는 울상이 되어 목을 뽑아늘이며 소리를 질렀다.
"이눔으새끼야, 엄시 귀청 떨어지겄다." 들몰댁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의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마음이 찡해진 들몰댁은 그만 주먹을 힘없이 내렸다.
낯선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싫어하는 어린것의 마음이 짠하고 가여웠다.
"워째, 우리 종남이는 이사가는 것이 싫은가?" 들몰댁은 어리광을 받아주는 어조로 말하며두 팔을 벌렸다. 작은아들은 품으로 왈칵 안겨왔다. 보드랍고 연약한 체구가 품안에서 서러웠다. 들몰댁은 작은아들의 머리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도 아련하게 젖냄새가 풍겨왔다. 다느그 좋으라고 이사도 허고 고생도 허는 겨. 어린 느그가 무신 죄가 있냐. 애비넌 죄인이라혀도 느그넌 살아야제. 하먼, 살아야 허고말고. 들몰댁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엄니, 이사가지 말어."
"워째 그러까?"
"무당이 싫은께 그러제." 들몰댁은 멈칫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그냥, 낯선 곳으로가는 것이 싫어 그런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 말 허는 것 아녀. 그 아짐씨가 을매나 맘씨가 좋고 이쁜디 그러냐." "아녀, 난 무섭단말이여." 작은아들은 더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고것이 무신 소리여. 그리 이쁘고이쁜 아짐씨가 워째서 무섭단 말이여." "귀신인께 무섭제."
작은아들이 몸서리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예삿일이 아니다 싶었다. 호되게 야단을칠까 하다가 들몰댁은 생각을 바꾸었다. 야단을 친다고 없어질 무섬증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어른이라 하더라도 무당한테 보통사람끼리 느끼는 정을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춤을 추고, 주문을 외고, 신대 잡은 손을 마구 떨어대게 만드는 그 사람들이 보통사람들과같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 벌였던 시아버지의 길닦음굿을 보고 어린 것은 그런 생각이 든모양이었다. 그러나 소화는 앞으로 함께 살아야 될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작은아들의마음에서 무섬증을 몰아내줘야만 살아질 것이었다. 소화 무당과 함께 살게 된 것은 천행이아닐 수 없었다. 내년부터 소작을 못 부치게 될 것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한 일이었다.
"종남아, 엄니 말 똑똑허니 들어." 들몰댁은 작은아들을 일으켜 앞에다가 세우고는 양쪽 팔을 꼬옥 잡았다.
"엄니가 종남이헌테 그짓말얼 허디야, 안허디야?" 작은아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안혀."
"그려, 엄니넌 성이나 니헌테 죽어도 그짓말언 안허는 사람이여. 긍께, 엄니가 허는 말얼믿어야 써. 알겄어?" 작은아들은 마지못한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몰댁은 혀끝으로입술에 침을 바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아짐씨넌 말이여, 귀신도 아니고 우리허고 똑겉은 그냥 사람이여." 작은아들은 입을 꾹다물고 도리질을 했다. 들몰댁은 진땀이 났다.
"엄니 말 더 들어. 긍께, 그냥 사람인 것은 똑겉은디, 굿얼 헐 때만 무당이 되는 겨. 그때도귀신이 아니라, 보통사람덜얼 해꼬지헐라는 귀신얼 쫓아주는 존 일얼 허는 사람이여." "근대워째서 아그덜이 다 귀신이라고 그려?" 작은아들은 계속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그덜이 니맹키로 몰라서 허는 소리제."
"아녀, 밤에는 머리 풀고 입에서는 피 흘림스로 나 겉은 아그덜 붕알도 따묵고, 피도 뽈아묵고 헌다는디."
"금메, 고것이 다 그짓말이랑께. 그라먼, 이 엄씨가 니 붕알도 따묵고, 피도 뽈아묵고 그러라고 무당허고 항꾼에 살라고 허겄냐!" 들몰댁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종남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들몰댁은 얼핏 큰아들을 떠올렸다.
"성도 고런 말 허디야?" 작은아들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봐라. 엄니허고 성 말얼 믿을 것이냐, 안 그러면 아그덜 말얼 믿을 것이냐. 딱 부러지게대답혀라."
작은아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만 껌벅거릴 뿐 속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미진한 데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생각이 돌려지기 시작했을 때 단단히 못을 쳐야 된다고들몰댁은 마음먹었다.
"니가 엄니 말도, 성 말도 못 믿겄으면 니 혼자 여그서 살어라. 그 아짐씨허고 살먼 일 년내내 쌀밥만 묵고 살 것인께, 니 밥꺼정 성 혼자서 배가 터지게 묵게 생겼으니 잘되얐다." "
엄니! 쌀밥만 묵고 살아?" 작은아들의 눈이 금방 휘둥글해졌다.
"글타니께."
"엄니, 나도 이사갈라네." 작은아들이 불현듯 외치며 품으로 뛰어들었다. 들몰댁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엄니, 나 하나또 안 무섭네, 하나또 안 무서바."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작은아들이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작은 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려, 그려, 우리 종남이 장허다." 작은아들을 꼭꼭 끌어안으며 들몰댁은 목젖이 아프도록목이 메이고 있었다.
무당인 소화가 함께 살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 것은 시아버지의 굿을 마치고나서였다.
"나도 엄니가 세상을 뜨고 나니 혼자 외로운 몸이고, 들몰댁도 형편을 보니 살기가 편편찮은 것 같은디, 나가 허는 일 옆에서 거들 사람도 있어야 허고 헝께, 서로 의지삼아 항꾼에안 살아보실라요? 아그덜 밥 굶기는 일언 욼을 것잉께요." 소화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나가 굿허는 일얼 멀 알아야제라." 들몰댁은 소화의 말이 너무 갑작스럽고 믿어지지 않아헛소리하듯 대꾸했다.
"굿이야 나가 허는 것잉께 들몰댁언 살림만 살아주먼 될 것이요." "워치께 고런 시답잖은일 허고 세 입이 붙어묵고 살겄는게라. 짐만 되는 염치웂는 짓이제라."
밥해 먹고 빨래하는 일만으로 세 입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일 년내내 들일 밭일을 뼈끝이 닿도록 해도 하루 세끼를 제대로 찾아먹을 수가 없지 않았는가.
"짐은 무신 짐이어라. 나헌테는 살림 살아주는 일이 젤 큰일이요. 그라먼 결정된 일로 알고, 이삿날은 나가 택일을 혀서 알리겄소."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는 형편에서 소화가 굳이 들몰댁을 택한 것은 그녀의 남편이 좌익이었던 까닭이다. 서로가 똑같은 입장, 정하섭을 보호하고 비밀을 지키는 데 그보다 더 좋은사람을 고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엄니, 구루마 왔네, 구루마." 길남이가 마당으로 뛰어들며 숨찬 소리를 질렀다.
"워메, 숨 넘어가겄다. 살살 댕게라." 들몰댁은 치마를 거머쥐며 사립으로 나갔다. 소달구지가 이쪽으로 느리게 오고 있었다.
"길남아, 짐 들어내라." 달구지를 보자 마음이 바빠진 들몰댁은 큰아들부터 불러댔다.
이삿짐이라야 허술하고 보잘것이 없었다. 이불보퉁이 하나, 옷가지가 든 헐어빠진 농 두짝, 부엌살림 한 보퉁이가 전부였다. 필요없게 된 농기구를 챙기지 않아서 짐이 더욱 단출해진 것이다.
"엄니, 우리 집언 워쩔 것인가?" 큰아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까짓 오두막 누가 안 업어갈 것잉께 걱정허지 마라." "근디 말이시... 우리가 요렇게 이사럴 가뿔먼... 혹시, 아부지가 오먼 워쩔 것인가." 큰아들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려도 저것이 장손값 허니라고, 핏줄은 으짤 수가 웂이 땡기는 것이여. 들몰댁은 콧등이 찡 울렸다.
"걱정헐 것 웂어. 느그 아부지넌 안 보고도 우리가 워디로 이사갔는지 다 아는 사람잉께."
들몰댁은 무심코 말을 해놓고는 놀랐다. 이상하게도 남편이 그런 것쯤 쉽게 알아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자." 들몰댁은 두 아들의 손을 양쪽으로 붙들었다. 그녀는 뒷집 구룡댁의 사립 앞을 지나며 퉤 침을 뱉았다. 그 여자의 감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들몰댁의 이삿짐을 실은 달구지가 소화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한 사내가 청년단으로 뛰어들었다.
"단장님, 보고헙니다. 하대치 마누래가 이사럴 합니다." 그 사내는 하대치네를 고정감시해온 끄나풀이었다.
"워디로?" 염상구가 가는 눈만을 옆으로 돌렸다.
"화정리 도래등 무당집으로 가느만요."
"왜?"
"처녀무당 엄니가 을매 전에 죽어서 살림 살아줌서 얻어묵고 산다는 디요." "그려, 워치케든 살아야겄제. 수고혔다."
"단장님, 감시넌 워치케 헐께라?"
"도래등이먼 너무나 먼께 니헌테는 새 임무럴 줄 것이여. 가서 기둘려." 염상구는 그 예쁘고 나긋나긋하게 생긴 처녀무당을 떠올리고 있었다. 니년이 무당만 아니었음사 폴세 빵꾸럴 뚫고 말았을 거여. 참말로 아까운 괴기여. 염상구는 입 안에 괸 침을 꿀꺽 삼켰다.
첫댓글 배경음악이 좋아서 가끔 음악듣기 위해서라도 클릭해야겠음..수고 많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