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살 즈음의 이별
박경선
옹이는 여덟 살, 솜이는 아홉 살, 한 살 터울 동생과 누나이지만 엄마는 이들 남매의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 정신이 없어. 옹이한테는 ‘좀 나서지 마라.’고 시키고. 솜이한테는 ‘좀 나서봐라.’고 시키거든. 좀 웃기지?
1. <옹이의 친구들>
아침마다 아파트 경비실 앞에 학교의 노란 차가 와. 옹이를 태워 가려고. 옹이는 그보다 10분 더 일찍 나가 친구들을 만나지. 경비 할아버지한테 책가방을 맡겨놓고 화단에서 공벌레도 만나고,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며 꿀 빨아먹는 벌 친구도 만나서 놀아. 멀리서 차가 나타나면 달려가 할아버지가 내주는 책가방을 받아 차에 타고 할아버지께 ‘바이바이’ 손 흔들며 떠나지. ‘할아버지의 손자인가?’ 할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야. 형들과도 친해. 아파트 놀이터에서 형들이 손전화기로 게임을 하면 기어이 틈새로 고개를 들이밀어 ‘형아, 안녕? 형아 잘하네!’ 추임새도 넣거든. 그 덕에 형들 사이에서도 ‘귀요미 옹’으로 인기가 많아. 누나는 ’네 정보 다 털리겠어!’ 걱정하지만 옹이는 끄떡없어.
“저 형아들 나랑 친해! 게임 한판 시켜주는 형도 있어. 누나는 내가 백 점 맞을 때만 시켜주지만….”
누나보다 때로는 형들이 더 친하다는 이야기지!
2. <이별 준비>
외할머니 집 근처에 사는 옹이와 솜이는 할머니 집에 놀러 가기를 좋아해. 집에서 엄마랑 있으면 먹는 것, 공부하는 것, 노는 것 모두를 시간표대로 또박또박해야 하지만, 할머니 댁에서는 모든 것이 해방이야. 해야 할 것은 다 하면서도 재미있게 하며 노는 ‘해방의 집’이거든.
그런데 새 학기가 가까워지면서 옹이 발 앞에 폭탄이 떨어졌어. 아빠가 있는 서울로 이사를 간다잖아. 아빠를 매일 볼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해방의 집’에도 갈 수 없고, 친구들과 교장선생님과 경비실 할아버지와도 헤어지게 생겼어. 누나는 가끔 눈물을 보이지만, 씩씩한 옹이는 울지 않아. 얼른, 경비실 할아버지께 이별 편지를 써 전해드렸어. 등교 시간마다 맞아주던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전학 간다는 이야기도 했어. 교장선생님 표정이 좋지 않자, 위로의 말도 했어.
“저야 어쩔 수 없어 전학 가지만, 팔공초등학교에 들어올 신입생이 세 명뿐이라서 걱정이에요.”
“교장이 할 걱정을 대신 해주네. 고맙다!”
“교장샘, 우리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데, 왜 학생들이 안 오지요? 다독상도 주고, 자연 관찰 기록상도 주고, 지구 살리기 상도 주고, 아침마다 운동장 열 바퀴 돌면 건강상도….”
그러다가 들고 온 ‘이별 선물’을 내밀었어. 산이 품어주는 학교와 교문 앞에 서서 아이들을 맞아주는 교장선생님 얼굴이 활짝 웃는 그림이야.
“그래, 옹이 화가의 그림을 교장실에 걸어두고 볼게.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게야.”
교장선생님은 옹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지구 한 바퀴!’를 빙 돌려주었어. 옹이는 교장선생님의 ‘지구 한 바퀴 이별 선물’이 재미있고 좋았어.
3. <전학 첫날>
3월 새 학기, 3학년이 되는 첫날 학교 가는 길! 옹이는 엄마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면서 신이 났어. 누나는 뒤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왔어. 엄마가 물었어.
“솜이는 왜, 어기적거리냐?”
“엄마, 우리끼리 가면 안 돼요?”
“왜? 엄마가 못나서? 아니면 엄마가 늙어서?”
“예, 친구들 엄마는 젊은데….”
엄마는 농담처럼 물었다가 깜짝 놀랐어. 열 살 딸이 마흔다섯 살 엄마가 늙었다니. 엄마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교문 저만치 앞에서 손 흔들어 보내고 돌아갔어.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옹이는 오늘도 신이 났어.
“엄마, 오륜초등학교가 나한테 딱 맞아요. 우리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을 사랑해요. 우빈이, 윤재, 도솔이랑도 친해졌어요.”
그런데 다솜이는 말이 없어.
“다솜이는 오늘 어땠어?”
“전학 첫날, 표 안 내려고 혼자 화장실을 찾는데 초희라는 아이가 따라와서 가르쳐 줬어요.”
“눈치 빠른 친절한 친구네.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
“말이 많아서 좀 싫어요. 도서실 책이나 빌려보려고 담임선생님께 ‘책 빌릴 때 독서 카드가 있어야 해요?’ 물었는데 ’나, 오늘 이 학교에 전근 와서 잘 몰라.‘했어요.”
“전학, 전근 동기네. 너는 당분간 책 읽는 것보다 친구를 사귀어야지. 친구는 많을수록 좋잖아. 학교 오갈 때도, 대구 세민이처럼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으면 좋잖니?”
활동적인 옹이는 가는 곳마다 친구가 넘쳐서 걱정인데, 조용히 음악 듣고 책 읽기,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솜이는 친구가 없을까 봐 엄마 걱정이 앞선다는 이야기야.
4. <솜이의 고민>
-어쩌다가 혼자-
나는 어쩌다가 혼자가 되었지
대구라면 지금쯤
나와 세민이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텐데
이게 다 내 동생 때문이야.
동생이 축구하니까
엄마가 축구장에 가야 되기 때문이야
외할머니도 지금
대구 유치원 아이들 만나
‘이야기 할머니’로 재미있게 놀고 있겠지?
나는 어떡해 」
솜이는 마음을 적어 할머니랑 주고받는 카톡방에 올렸어. 할머니가 봉사활동을 끝내고 집에 와서 전화했지.
“솜이, 오늘 혼자 있구나. 어쩌누, 우리 솜이가 외로워서….”
“할머니는 가족이 싫은 적 없었어요?”
“글쎄….”
할머니는 솜이가 묻는 뜻을 가늠할 수 없어서 머뭇거렸어.
“저는 동생이 싫어요. 동생이 없으면 엄마는 내 차지인데….”
“그래 맞아, 이 할미도, 솜이만큼 어릴 때 어른들이 맛있는 건 남동생만 주고, 동생이 대들어도 동생 편만 들어주어서 속상했지.”
“호호홈, 남동생한테 밀렸어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손전화기도 나만 사주고 엄마, 아빠 없을 땐 누나가 엄마, 아빠라고 대들지 못하게 하거든요. 호호홈!“
“하하하! 네가 더 좋으네.”
“제 생일날 꼭 오세요. 알았죠?”
“그래 나도 너희들이 보고 싶어. 너희들 장난감만 봐도 눈물이 나고, 식탁에 앉아서 너희들 밥숟가락만 봐도….”
“할머니, 그래도 참아야지요. 학원 갈 시간이라서 끊어요. 뚜 뚝!”
할머니는 솜이가 서울 갈 때 주고 간 편지를 다시 들여다봤어. 할머니가 활짝 웃는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어.
<할머니, 제가 보고 싶을 때, 제가 만든 요, 실 팔찌 꼭 끼고 힘내세요. 솜이 올림>
할머니는 솜이가 만들어준 실 팔찌를 끼고 힘을 내어봤어. 으샤으샤!
5. 할머니 오신 날
“얘. 책가방은 바닥에 둬야지. 책상에 올리면 책상이 더러워지잖아.”
도서실 책상 위에 올려둔 옹이의 책가방을 보고, 옆자리에 있던 분홍 원피스 입은 아이가 간섭을 해댔어. 옹이가 책가방을 당겨 바닥으로 내리려고 일어서는데, 솜이가 옹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또박또박 말했어.
“책가방을 땅바닥에 놓으라고? 그러면 책가방이 더러워지는데?”
솜이의 눈총을 느낀 그 아이는, 땅바닥에 두었던 자기 책가방을 확 집어 들고 나가 버렸어.
“누나, 거들어줘서 고마워!“
솜이도 세액 웃었어. ‘넌 내 동생이잖아!’ 하는 뜻이 담긴 웃음이었어.
그 사건이 있고부터 둘은 더 친해졌어. 솜이 생일날 오실 ‘할머니 모시기 작전’에 한마음이 되어 준비한 것을 카톡방 영상 통화로 할머니께 자랑했어.
“할머니, 할머니 방에 영화 볼 수 있는 텔레비전도 갖다 뒀어요. 옹이가 사물함대도 갖다 뒀고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콘서트장 입장표도 엄마가 예약해 뒀어요.”
손전화기가 없는 옹이는 누나 등 뒤에서 목소리만 크게 높였어. ‘할머니 사랑해요!’ 그래도 할머니가 더 잘 들으시게 한 번 더 크게 소리쳤어. ‘할머니 정말 사랑해요!’
드디어 대구에서 할머니가 오셨어. 서울역에 마중 나가 돌아오는 길에, 두 아이는 저희끼리 할머니와 지낼 규칙을 정했어. 할머니가 ‘이야기 할머니’ 일로 바빠서 두 밤만 자고 가신다네. “가위바위보로 이기는 사람이 할머니랑 자기다.”
‘앗싸!’ 옹이가 이겼어.
“그래도 내일은 내가 할머니랑 잘 테야. 그래야 공평하잖아. 한 밤씩 자기니까.”
그때 엄마가 훼방꾼처럼 끼어들었지.
“너희들 각자 공부 다 끝내야 할머니 방에서 잘 자격을 줄 거야.”
그날 아이들은 저녁 먹기 전까지 각자 방에서 숨소리도 안 들리게 숙제를 다 했어. 저녁을 다 먹고 옹이가 할머니 방으로 건너갔지. 옹이의 문제집을 매기던 할머니가 혼잣말하셨어.
‘내 계산이 틀렸나. 내 답은 이게 아닌데?’
그 말에 옹이가 들여다보더니 ‘아 제가 실수했어요.’ 하며 답을 얼른 바르게 고쳤어. 누나라면 틀렸다고 가위표로 좍 그을 텐데. 할머니는 다시 한번 들여다볼 기회를 주어서 고마웠어. 할머니랑 잠잘 때 옹이는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했어. 옹이는 할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들었어. 쿨쿨!
다음 날 새벽 7시에 솜이가 할머니 방, 문을 열며 ‘실뜨기’ 도구를 들고 왔어. 새벽잠이 없는 할머니가 심심할까 봐 같이 놀아주려고 가져온 거야. 둘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쟁반 가운데의 줄이 엇걸리도록 걸어 쥐고, 바깥 줄을 밖으로 빼었다가 가운데로 올리는 ‘젓가락’을 만드는데, 옹이가 오목을 하려고 바둑판을 들고 왔어. 할머니는 두 아이랑 놀아주느라 심심할 틈이 없었지. 아침 먹고 모두가 나가버리자.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할머니는 베란다의 꽃나무에 물을 주며 말을 걸었지. 그러다가 공원으로 나갔어. ‘당신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 조각상이 커다랗게 서서 맞아주는 공원이야. ‘서울백제어린이박물관’ 입간판에서 ‘어린이 박물관이라면?’ 그 말이 궁금해서 가보기도 하고, 토성 공사장을 보며 ‘저기서 공룡 발자국이라도 발견하려냐?’ 엉뚱한 상상도 하며 나오다가, 강아지랑 벤치에서 햇볕 쬐는 품격 할머니를 보았어. ‘강아지가 주인을 닮아 품격 있게 앉아 있네요.’ 강아지 칭찬으로 다가갔다가,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었지. 서울로 이사 온 딸네 집에 다니러 온 이야기. 손자, 손녀랑 갑자기 헤어져서 섭섭했다는 이야기! 그 말에 품격 할머니도 자기네 손자, 손녀가 미국으로 이민 가버린 이야기를 했어.
“어머나, 비행기를 타도 14시간 넘게 걸리는 그 미국까지 가버렸다고요?”
손주들을 그리워하는 할머니끼리 만나 서로를 위로했지.
“영감도 여기 묻혀있는데 그렇다고 영감 두고 손주 보러 갈 수도 없어요.”
품격 할머니 신세 한탄에 ‘그럼요. 우리 나이에는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떻게 이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꽃집과 빵 가게에 들렀어. 후레지아 꽃도 한 다발 사고, 솜이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도 샀지. 집에 돌아와 대구 할아버지가 캘리그래피 글씨로 써준 ‘축, 솜이의 열 살 생일’이라는 축하 현수막도 펼쳐서 미리 벽에 붙였어. 저녁때 식구들이 현수막 앞에 모이자, 케이크에 불을 붙여 축하 노래를 부르며, 할머니표 삼계탕으로 저녁을 먹었어.
늦은 저녁 시간에 옹이, 솜이, 할머니가 콘서트장에 갔어. 옹이는 몸이 뒤틀렸어. 누나랑 할머니가 좋아하는 콘서트라서 같이 가긴 했는데, 재미없는 것만 했어. 드디어 끝이 나서 옹이가 신나게 손뼉을 쳤는데 ‘앙코르’ 소리에 다시 한번 연주를 하는 거야. 옹이는 오줌 마려운 걸 참고 있는데 다시 하는 한번이 너무 길었어. 마침내 끝이 나자, 사람들은 다시 ‘앙코르’를 외쳤지만, 옹이는 손나팔을 만들어 박수 속에서 외쳤지.
“왜 자꾸 나와요. 오줌 싸겠어요. 화장실도 가야 하고. 제발 그만 해요!”
드디어 끝나자, 할머니 손을 잡고 화장실로 달려갔어. 참았던 오줌이 찔끔 팬티에 묻었지. 화장실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섰던 할머니가 물었어.
“옹이가 오줌 참느라 애썼구나.”
“뭘요.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제 고추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죠. 히히!”
할머니는, 양쪽에서 부축하며 따라오는 손자, 손녀가 오늘따라 대견스러워 보였어. 그날 밤은 솜이가 약속대로 할머니를 독차지했어. 할머니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잠들 때, 할머니 댁에서 듣고 자던 ‘인도 명상 음악’을 틀어달라고 했어. 마음이 편안해졌어. ‘할머니랑 내 취향이 같아. 음야 음야!’ 솜이는 조용한 음악 속으로 빨려들며 꿈나라로 갔어.
다음 날 아침, 두 아이는 학교에 가면서 할머니께 이별 인사를 하러 왔어.
“할머니 제 생일날도 오셔야 해요.”
옹이가 바이바이 손 흔들며 후다닥 나가자, 솜이는 뒤따라와서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더니 할머니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 갔어. 할머니는 대구 내려오는 기차 속에서 솜이 문자를 읽었어.
“할머니, 인생이 뭔지, 십 년을 살다 보니 이별이 이렇게 슬픈 것인 줄 알겠네요. 잘 내려가세요. 또 봐요. 우리!”
2025년 3월 14일 3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