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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겨자씨 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天氣
성령에 의한 삶
1. 하나님나라의 삶, 겨자씨나라의 삶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 성령을 따르지 않고도 세상에서 영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 성령에 의한 삶은 지속적으로 PLO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뜻을 구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발견하면 그 일에 온전히 동참하는 것입니다.
(롬8:5~9)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3. 성령에 의한 삶은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일2:24~25)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4.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 성령을 의식하지 않는 것: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나. 성령을 단순히 능력이나 감화 정도로 생각하는 것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다. 거짓 신앙체계에 빠지는 것 :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성령의 근심
라. 육체의 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 다양한 죄들 : 윤리적인 죄, 관계적인 죄, 불순종의 죄
힘든 순간에 다윗의 고백처럼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깨어짐의 고백.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깨어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듣는다. 하나님께 속해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다윗, 진정 그가 하나님께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나머지 두 왕은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권리는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누누히 진정한 세우심은 하나님 편으로 온다고 이야기한다. 너는 상석에 앉지 말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다윗은 세우심의 주권, 주체가 하나님이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반면, 두 왕은 자신의 힘으로 세워지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다윗은 사울과 압살롬의 행위를 보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먼저 생각했고 자기의 독단 또는 편협한 생각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도록 맡겨둔 것이다.
저의 정치적 성향과 최근에 접한 세 권의 책
저는 태어나 자란 곳이 전라도 광주이기도하고요. 정치적으로는 개혁지향적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선택을 해야할 기회가 있다면, 민주당과 한나라당 중에서 민주당 쪽을 택하는 편입니다. 우선 현실 정치이야기를 조금 하고 성경이 말하는 권위에의 순복에 대해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그리고 본 글은 세권의 책에서 얻은 바에 근거하여 드리는 말씀임을 주지 바랍니다: 존 비비어의 "순종"(두란노)과 진 에드워즈의 "세 왕 이야기"(IVP), 그리고 워치만 니의 "권위와 순복"(한국복음서원, 생명의 말씀사에서는 "영적권위"로 출간)입니다. 존 비비어의 "순종"은 기본적으로 워치만 니의 "권위와 순복"이라는 책에 기반하여 더 쉽게 써진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전에 저는 "전두환, 노태우"라는 이름을 함부로 불렀습니다. 자신의 정치욕을 위해 양민학살을 정당화한 사람이라 여겨서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미웠죠. 후에, 제가 원하던 개혁지향적 정부가 정권교체와 함께 들어섰고, DJ를 이어 노무현씨가 대통령 권좌에 올랐습니다. 내가 찍은 대통령이 연이어 두번씩 당선되니 기분이 좋더군요.
권위주의를 탈피한 대통령,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심판은 우선 역사에 맡겨두기로 하고요.... 그분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주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들은 물론이요, 국회의원들조차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국회연설을 위해 대통령이 입장하는데, 특히 한나라당 의원들 중 많은 수가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이라는 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수권자에 대한 예의가 전혀 아니었으며, 권위에 대한 도전/도발로 받아들였습니다. 천민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우리와 같은 천민인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권위에 의해 그 자리에 앉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현상으로 이해됩니다. 사실 군사독재시절이라고 하는 5,6공 때에도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입장하면 하나같이 기립하여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입장'과 아울러 '권위에 대한 순복'은 어떤 상호관계를 갖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내가 그를 대통령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가? 답은 "아니다" 였습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그 권력의 높고낮음을 무론하고 내 위에 있는 권력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 그들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갖으라고 말하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했습니다. 아무튼 그때까지는 혼란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부당하게 권좌에 오른 자들까지도 존경하라고 말씀하는 것 같아서 제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입장이 바뀌어, 성경적 권위에 대해 재고하게 됨
요즘, 광우병 소고기 문제와 연결되어 대통령에 대해서 막말이 오갑니다.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이 곳 광주는 더욱 그렇습니다. "2MB, 미친소 너나 먹어" "명박=미친 소" "MB= Mad Bull" 등등 차마 권위자에 대해 하지 못할 말들을 뱉어냅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은 얼마든지 가능하되,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가 아무리 맘에 들지 않기로서니, 대통령에 대해서 할 말들이 아닙니다. 저의 옛 육신은 "맹박이"라 호칭하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볼수록 권위자에 대해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5년 전을 회상해 봅니다. 몇몇 국회의원들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가 굴욕당하던 국회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요즘들어 "맹박이"네 "땅박이"네 이웃집 강아지 부르듯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칭하는 비하표현들의 난무함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깍듯이 호칭해야하는 이유를 확실히 하게 됩니다. 모든 권위의 원천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모든 권위가 그분으로 말미암습니다. 이명박이라는 개인이 권좌에 앉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권위가 그의 머리 위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권위에 -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안되면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권위의 붕괴 현상을 가속화 시키는 사단,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음모 그러나 참된 권위가 드러남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풍조는 신적권위의 본류로부터 위탁된 세상권위에 대해서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을 쿨하고 개혁적이라고 조장합니다. (여기에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예의를 갖춘 비판과 건설적인 지적들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 경찰을 비하하며 짭새라고 부르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경찰이 경찰같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권위가 권위로 수용되지 않습니다. 모든것이 탈권위화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것들을 위해) 잠시잠간 세워두신 권위들이 하나 둘 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권위, 하나님에 대한 권위 또한 상대적인 권위가 되어버렸음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사단은 이렇듯 자유주의적 탈권위풍조를 조장하고 있으며, 권위의 상실들로 인해, 제 3세계권에서는 분쟁과 기아 등의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좋을대로 지도자를 삼고는 자기 좋을대로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무법적인 모습들을 적극 격려합니다.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사람들은 참된 권위의 부재라는 현실에 지칠대로 지쳐있습니다. 참된 지도자가 없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지도자를 삼고, 여차하면 지도자를 힐난하기 일 수 입니다. 사람들은 세계평화를 이룰 독재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독재에 대한 향수와 신 나찌주의등의 부활은 세계평화를 이룰 독재자에 대한 갈구입니다. 그 갈구에 적그리스도가 호응할 것입니다. "바로 나이다. 내가 강력한 권위와 카리스마로 평화를 주겠노라" 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거짓평화임이 드러나며, (임시방편적으로) 각 국가와 권좌에 위탁되었던 권위들이 그 본래 위치로 돌아갈 것이며, 권위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가 곧 권위의 본질이자 자체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권위와 권위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입장
반복되는 말씀입니다만, 세속 권위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1. 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 이견이 없으실 줄로 압니다.
2. 하나님께서 세상권위에 종종 부적당한 자들을 앉히신다. 그들의 권위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 사울의 예를 보십시요.
3. 그러므로 악하거나 부당한 권위자의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의 파편이요, 일부이다.
4. 결론적으로 악한 권위자나 악한 법이라 할지라도 일단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보십시요.
5. 권위자의 요구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할 때, 우리는 불순종의 의사를 표할 수 있다.
불순종의 의사를 표할 때마저도 공경과 순복의 태도와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 역시나 다윗의 모습에서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세속 권위와 권위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의 입장
조선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비견되어지는것이 이스라엘과 로마의 관계이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당한 식민통치자에 대해서마저도 세금을 납부할 것과, 그 지도자들을 위해 순복의 자세를 견지할 것을 명하십니다. 심지어 기도까지 하라고 하시죠. 이것 참 고약한 노릇이지요. 이 육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입니다.
예수께서 '노동자들과 빈민을 가난과 압제해서 해방하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제3세계 해방신학의 논리로 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권력의 시녀"였을지 모를 일이겠죠?!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망령에 속지 마십시요. '블루칼라 예수 그리스도'도 없거니와 '화이트칼라 예수 그리스도'도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과 나라'에 관심을 두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실 따름입니다.
천하의 하나님이신 그분이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유대인 (즉 율법준수자)의 모습으로 할례 받으시고, 절기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본질이신 그분이 (유대교) 옛 언약의 권위에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요. 육신의 죄없는 그분마저도 자신의 육신 뜻보다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자신을 내어드리는 모습입니다. 그의 재판과 사형집행 전 과정 또한 옛 언약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옛 언약에 굴복된 듯한 새 언약이 결국에는 옛 언약에 종지부를 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또 어떻습니까?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선한 주인은 물론이요. 악한 주인이게도 그리하라고 하지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벧전 2:18) 바울이 노예제의 부당함을 몰랐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보여준 부당한 세상권세에 대한 순복의 자세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 18절 이후가 그 답을 제시합니다. 죄없이도 부당한 심판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한 양처럼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나의 속생명에 나의 내면에 주된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목자이시며 진정한 주인이요 지도자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보라는 강렬한 외침인 것이죠.
세상만사 불편부당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몽학선생
이 세상에 참된 지도자가 없음은, 참된 지도자는 오로지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이요,
이 세상에 참된 부모가 없음은, 참된 아버지는 오로지 그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이요,
이 세상에 참된 정의와 참된 민주주의가 없음은, 정의의 본체이신 그분을 통해서만 참된 민주주의와 인본주의가 구현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반증합니다.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없음은, 참된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웅변에 다름 아닙니다.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도 만족되지 않고, 이 물 저 물 마셔도 갈함이 있음은...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 물과 내 뱃 속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올 생명수 샘을 예비하신 참 신랑이 있다는 설교입니다.
개혁을 이루는 참된 첩경, 하나님권위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 권위에 순종함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이 세상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는 별개의 것들입니다. 육신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발견하고 다니던 교회의 상황을 보면, 참 난감하지요. 맞습니다. 목사가 되어선 안될 사람이 목사 자리에 앉아있고, 인도자가 되어선 안될 사람이 인도자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왕이 되어선 안될 사울의 머리에 기름부어 왕으로 앉히신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목사가 되어선 안될 사람을 목사로 앉혀서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략/음모"입니다. 내면적으로 아무리 말해주고 아무리 성경말씀으로 해주어도 안되니까, 육체적으로 우리를 쳐서라도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우리 내면의 영성을 다루시겠다는 모략입니다.
그 때 그 환경 안에서는 복종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복종의 마음이 일지 않더라도 복종의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 단체 안에 몸 담고 있는 한 그러한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변하는 것은 그 부당한 권위자가 아닌, 나의 속사람입니다. 내 안에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바울을 감옥에 가두신, 삼손의 두눈을 뽑으신,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밖으신 하나님만의 방법입니다. 주님의 방법에 의해 내가 제한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록 내 안에 참된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다음 단계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자아가 다루심 받고, 권위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한, '귀하게 쓰일 그릇'을 그 상태에 두고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닙니다. 압제자의 손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그분은 이내 승전가를 부르게끔 하십니다. 할렐루야!!!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 카페지기 Brother)
세왕 이야기
지은이 : 진 에드워드 (Gene Edwards) 목사 / 허령 옮김
텍사스 출신으로, 동부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그 후 스위스의 루쉬리콘과 휘트월스의 남서부침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2세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여러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 섬겼다. 현재는 아내와 함께 미국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21세기 교회 개척을 위한 사역자 훈련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사울, 다윗, 압살롬. 이들 세 왕에게서 배우는 '내 안의 옛사람 죽이기' 즉, 깨어짐의 축복에 관한 글인데. 읽는 동안에 나 자신을 깨뜨려 변화시키는 다윗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질투심으로 가득 찬 사울왕과 반역을 도모한 압살롬, 그리고 그들을 통해 겉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 안에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다윗의 이야기로 사울과 압살롬, 그리고 다윗에 이르는 구약시대 3왕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으며, 순종과 깨어짐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연단되어 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과한 깨어진 그릇을 찾고 계시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깨어짐의 학교를 통해 철저히 훈련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미치광이 사울왕을 통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들에 대해 배우며 이기는 것 보다 지는 것을, 문제를 말하기보다는 침묵을,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함을 배웠다. 사울왕에게 쫓겨 혼자 떠났던 다윗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때가 고통이 분만하여 겸손이 태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울왕은 다윗의 속사람 사울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깨어지지 않은 권위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울은 훌륭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놀라운 일을 행했던 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합하여 나라를 세웠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기라고는 전혀 없는 자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어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하나님의 영에 충만했던 사람이었으며 선지자였다. 그러나 다윗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등 영적인 어두음 속에 거하기를 자처하였다.
각자의 추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세 명의 왕에 대한 이야기. 백성들을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사울, 권위가 아니라 순복하는 삶을 보여준 다윗,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분별력으로 빛났던 압살롬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권위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세 왕 이야기는 사울과 다윗,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통찰력 있게 다른 의미 있는 글이다. 진 에드워드의 상상력과 깊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똑같은 왕이지만 어떤 믿음과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용하심의 방법을 발견하게 되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준 책이다.
세왕의 인생 여정에서 다윗의 인생여정은, 자기 삶을 자기가 이끌어가지 않았던 다윗의 모습, 자기 꿈을 하나님의 은혜아래 성취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의 인생의 주체는 자신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사울과 압살롬은 스스로 자신이 주체자임을 드러냈지만. 다윗은 주권과 권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여진다. '칼이 부르는 건 칼이다' 라는 명제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증거가 된다. 자신의 뜻을 위해 검을 세웠던 사울과 압살롬에 비해, 다윗은 검을 거두는 사람이었다
.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한 조직을 이끌어가며 힘이 들 때 또는 마음이 무겁고 상심했을 때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윗과 사울, 압살롬의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나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처해진다면 과연 나도 다윗왕 처럼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다윗왕 처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고백과 하나님의 주권, 기다림 그런 것들을 배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었고, 다윗의 삶이 나에게는 귀감이 되었던 것 같았다.
저자는 사울왕과 압살롬과의 관계를 통해서, 상처받은 성도들에게 위안의 책이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순간부터 '깨어짐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어려운 상황을 지혜롭게 처신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다윗왕을 들어 쓰셨고, 사울과 압살롬은 그렇지 못했다.
힘든 순간에 다윗의 고백처럼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깨어짐의 고백.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깨어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듣는다. 하나님께 속해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다윗, 진정 그가 하나님께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나머지 두 왕은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권리는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누누히 진정한 세우심은 하나님 편으로 온다고 이야기한다. 너는 상석에 앉지 말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다윗은 세우심의 주권, 주체가 하나님이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반면, 두 왕은 자신의 힘으로 세워지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다윗은 사울과 압살롬의 행위를 보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먼저 생각했고 자기의 독단 또는 편협한 생각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도록 맡겨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창'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이 에게 '창'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창'이든 아픔은 있게 마련이다. 그 '창'을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특별선물이라 생각하고 무던히 견뎌내는 것, 그것이 완전하여져 가는 과정이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투심으로 가득 찬 사울왕과 반역을 도모한 압살롬, 그리고 그들을 통해 겉 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 안에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다윗의 이야기로 사울과 압살롬, 그리고 다윗에 이르는 구약시대 3왕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으며, 순종과 깨어짐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연단되어 진다는 메시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목은 ‘깨어진 마음으로의 순례’라고 씌어 있다. 다윗은 미치광이 같은 사울 왕의 추적을 받으면서 깨져버렸다. 사랑했던 아들들의 반역과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이 깨져버린다. 그는 어두운 굴속에서 고통을 친구로 삼는 것을 배운다. 다윗은 깨어짐의 학교에서 세상의 지혜로 원수에게 저항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특별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경험 한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리지 않고 답답하기만 하고 절망을 하기도 한다.
깨어진 마음으로의 순례중심이 깨어지는 날, 진정한 권위를 만난다. 사울은 백성들을 연합하여 나라를 세웠다. 사기라고는 거의 없는 자들을 모아 군대로 변화시켰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적을 쳐부수고 또 쳐부수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젖어 있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놀라운 일을 행했다.
다윗은 권위가 아니라 순복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그는 규칙이나 법으로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리앗을 물리치고, 왕국의 틀을 닦은 사람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실패하였고, 깨어졌고, 놀림을 받았으며, 바보 같은 일들을 하였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그러지 아니하였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는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다윗은 알았다. 시편에서 노래하듯 수많은 적들이 위협할지라도 그는 사울왕 처럼 되기를 거부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의 아들이 왕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는 신하들에게 왕의 자리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음 속에 있는 이 세 왕의 모습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내 마음속에 살아가는 세 왕들의 싸움을 이겨나가는 것이 쉽지 만은 않은 일인 거 같다. 다윗도 많은 죄를 저질렀지만, 왜 왕중의 왕이 되었는지를 되새겨 보게 된다. 내 안에 넘쳐나는 질투의 사울과 야망이 가득 차 사람들을 치려 하는 압살롬을 서서히 죽여가면서,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한 다윗을 키워내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여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용서하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의 지혜 없음을 보며 지혜를 간구하게 되었다.
깨어짐의 축복.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 보복하지 않는 온유함.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 붙잡는 것보다 주는 것. 주장하는 것보다 섬기는 것 내안에 사울과 압살롬의 강퍅함과 억지를 발견하면서 이와 정 반대인 다윗왕의 인내와 겸손과 온유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 마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많은 은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사울과 압살롬의 모습을 발견 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나의 모습들이 성령 안에서 온전히 깨어지길 지금 이 시간에도 기도 한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기에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의 생각에 그르지 않게 하기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분명 그는 자신에게 칼자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뒤로 물러서는 모험을 감행 하게 되어지고, 이어서 압살롬이 등장하게 되어진다. 또 다른 사울의 모습을 했던 압살롬을 다윗은 인정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 드린다. 압살롬의 반역의 꽤함을 알고서도 제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이유를 통해 그는 예전의 사울 앞에서의 모습처럼 또 다른 물러섬을 경험하게 되어진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세왕을 비교하면서 많은 점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단지, 완전하여 가는 성화과정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를 통해 다윗왕과 같은 모습, 사울과 압살롬과 같은 모습이었다. 첫째, 사울왕 처럼 착한 모습에서 점차 악마적인 모습으로 변해 가느냐 둘째, 처음부터 끝까지 다윗왕 처럼 착한 모습을 유지하느냐 셋째, 압살롬처럼 처음부터 악한 모습으로 그려지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능력을 달라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아니라고 느꼈다. 내면적으론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내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함을 배웠다. 속사람의 변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가는 과정. 어려운 상황이 감사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윗왕 처럼 많은 시련을 통해, 나 자신 또한 변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던 책이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고통을 친구를 삼은 다윗, 말하는 것 보다 침묵을, 보복하는 것 보다 온유함을 보여준 다윗처럼 날마다 나 자신이 깨어져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도록 우리가 날마다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처받은 모든 이에게 세상 짐을 예수님의 무릎 앞에 내려놓고 나의 반석이요 방패이신 소망의 소리를 듣고 푸른 초장에 맑은 물가로 나아가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생활하고 밝은 생활을 영유하도록 권유하고 싶다. (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