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과 무왕 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법당인 대웅전은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 가운데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위부분에서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으며,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또한 가운데 칸에 달린 문은 연꽃과 국화 모양으로 꾸며 뛰어난 창살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화려한 무늬와 조각을 새긴 조선 후기 목조 불전 건축으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불갑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세불좌상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하여 왼쪽에는 약사불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불로서 삼불 가운데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무릎이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육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머리에는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큼직하게 묘사하였으며 네모꼴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엿보인다. 두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약간 굵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형식으로 오른팔을 드러냈으며, 옷주름은 두 다리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양손 모두 마치 실제 인물의 손처럼 표현하여 사실성이 돋보인다.
*소라 모양으로 말린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나발(螺髮)이라 하며, 머리와 살상투(살로 된 상투)인 육계 (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 사이에 위치한 보배구슬을 중앙계주(中央髻珠) , 육계 위에 위치한 보배구슬을 정상계주 (頂上髻珠) 라 한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불명확한 육계, 팽창된 얼굴, 분명한 이목구비, 부피감 있고 편안한 자세, 사실적으로 표현된 양 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에서 본존인 석가모니불과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다만, 석가모니불에 비하여 크기가 다소 작아지고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에 오른팔을 드러내지 않고 아미타인(阿彌陀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 조성기에 의하여 1635년 무염(無染)스님을 비롯한 승일·도우·성수 등 10인의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염스님 : 17세기 주로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에서 80여 명의 조각승들로 무염파를 조직하여 조선후기 불교조각계를 이끌었다.
이 불상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무염비구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전라도·충청도·강원도지역을 거쳐 폭 넓게 활약하던 무염일파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첫댓글 권중서/조계종 전문포교사님의 해설이 재미나서 덧붙입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석가모니불대좌에는 대좌 밑에서 나온 용들이 목을 빼서 강한 이빨을 드러내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난간을 물고 부처님을 받들고 있는데 사자좌(獅子座)라서 그럴까? 정작 중앙의 사자는 힘도 들이지 않고 난간에 살짝 손만 대고 잘난 듯 뽐내며 웃고 있어 익살이 넘친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사찰 - 영광 불갑사 2022. 10. 20. 기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