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사백여덟 번째
부활절을 보내며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죽었던 듯 정원을 지키던 모란이 부활절을 맞아 돌아가신 어머니의 자태로 피어났습니다. 마치 부활하듯이 말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면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이 떠오르는데, 톨스토이는 새 사람으로 거듭남을 부활로 여긴 듯합니다. <부활>의 영어 제목은 Resurrection입니다. 어원으로 보면 ‘resurrect’는 ‘아래에서 다시 위로 일어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래에서 난 것들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대개는 부활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것을 지칭하는 말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보여주었기에 그리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만 부활의 첫 열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살리신 자들은 다시 죽기에 부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행적을 보면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신비한 몸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영원’ 속에 사는 몸이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마지막 심판 때에 그러한 변화된 몸으로 부활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 속에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한 불멸의 존재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존재는 불 연못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 속에 산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부활절은 어떤 불멸의 존재가 되겠느냐고 묻는 날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만이 성탄절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성탄절도 의미가 없겠지요. 부활절은 ‘나는 부활해서 어디에서 살게 될까’ 깊이 반성하라는 날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