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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8장 12-27절
내가 드러내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21절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군대와 함께 대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외적으로만 보자면 군대가 있는 쪽이 훨씬 유리합니다. 군대가 있는 쪽이 예수님을 잡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드러내고 계신 사실은 저들이 예수님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잡히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히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엎드러졌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것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나사렛 예수라고 할 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모든 사람이 물러가면서 땅에 엎드러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권위가 있으셨던 겁니다. 바로 그러한 권위로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던 11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도록 말씀하셨는데, 요한복음 17장에서 저들을 보전해 달라고 하셨던 것을 친히 이루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의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한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누구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거기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한 것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기 있을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그러한 경험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감각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 대하여 무력으로 맞서게 됩니다. 이런 사도 베드로의 자세는 외적으로만 보자면 분명 주를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뜻하신 것을 막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막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결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와 한편일 수 없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주님 편에 있는 제자들은 주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주의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주의 뜻을 모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기록된 성경의 완성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체 뜻을 이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만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혀 안나스에게로 가서 심문을 받는 내용과 함께 사도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경우 안나스가 아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가서 심문을 받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음을 다시금 보여줍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다른 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도 다루게 되는데, 기록 형식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한꺼번에 전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다른 사건과 교차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12절 이하 14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안나스에게로 끌고 갑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난 시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코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자세로 자발적으로 잡히신 것입니다. 결코 연약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군대와 함께 천부장을 언급하고 있는데, 천부장이 왔다고 해서 그의 모든 군대를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한 사람 혹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잡는데 있어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백부장과 그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부장이 왔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자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군대의 수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예수님 한 마디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굳이 비교하자면 예수님의 권세가 천부장과 그의 군대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예수님께서 잡혀 결박까지 당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힘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반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잡히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주의 몸 된 교회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가 당하신 결박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안나스라는 인물은 13절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에 보시면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안나스가 다시금 결박하여 가야바에게로 보내는 것으로 보아 지금 19절 이하의 심문은 그 해 대제사장으로 있던 가야바가 아니라, 안나스가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지금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본래 율법은 대제사장이 종신직입니다.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대제사장직입니다. 때문에 대제사장직은 결코 여러 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고 난 뒤 새롭게 대제사장이 세워지기 때문에 언제나 대제사장은 한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의 뜻에 따라 대제사장직이 폐하여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시 야망과 내적 반란 때문에 로마 총독들은 금전과 총애에 따라 이 대제사장에게서 저 대제사장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을 일삼기도 했는데, 그런 점에서 죽어야지만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도 바뀌었습니다. 이때 바뀌었다고 해서 무조건 대제사장이라는 이름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지난 시간에 살핀 요한복음 18장 3절에서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대제사장직에 한명 외에 있을 수 없지만, 당시에는 대제사장으로 불리던 인물이 한 명이 아닌 두 명 이상으로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 해 대제사장으로는 가야바이지만,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으로 불리고 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결박하여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아닌,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는 것은 그의 영향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대제사장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로마 총독의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인정 속에서 자신의 사위가 대제사장이 되도록 했던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로서의 실세는 가야바이지만 그의 장인인 안나스의 영향력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야바에 앞서 안나스에게로 끌고가 심문을 받게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안나스가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할 때 14절은 가야바가 한 말을 다시금 주목하도록 하는데, 그는 요한복음 11장에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요11:50 참고). 물론 그가 그 말을 할 때는 분명 그들의 상황에 맞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지금 유대 사회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시끄러워지고 있고, 그 일로 인해 로마의 미움을 살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그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유대 사회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가 죽는 것 외에는 없다는 그런 내용으로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의 마음과 달리 그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두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 모두를 구원하시는 말씀을 그 입에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그를 그렇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던 겁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도 요한은 사도 베드로의 부인과 관련된 일부의 내용을 기록하는데, 15절 이하 1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고 기록합니다(마26:56, 막14:50). 그러나 적어도 사도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다시금 예수님을 따라 간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많은 주석가들이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을 사도 요한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은 사도 요한이라고 하는 것은 추측일 뿐이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의 경우 사도 베드로와 같은 갈릴리 출신 어부로 이어지는 내용처럼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할 때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로 의심을 받았다면 사도 요한도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그런 내용은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의 열두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들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런 인맥으로 인해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들어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매우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입니다. 방금 읽은 본문의 내용은 세 번의 부인 중 첫 번째 부인을 기록하고 있는데,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먼저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을 때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다시금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때 베드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6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의 각오를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 오게 된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니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13:38 참고). 그 말씀대로 베드로는 다름 아닌 여종의 말 한 마디에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 군대가 왔을 때 칼을 빼어 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칼로 무엇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칼을 버리자 어떻게 됩니까? 칼을 들고 있을 때만큼의 당당함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당당함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까지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이 무너질 때 주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주를 부인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가 우리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칼빈은 지금 베드로의 모습이 인간의 힘에 대한 진정한 표본이라고 가르치는데, 보이는 모든 힘이란 고작 단 한번의 ‘훅’하는 숨소리에 당장 사라지고 마는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칼을 들고 있을 때는 뭔가 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 지키는 여자의 한 마디 말에 넘어지는 것이 그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결코 설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하십니까? 우리 스스로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을 보시면 그 해 대제사장으로 있던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가 심문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19절을 보시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런 부류로 생각했습니다. 소위 유대교를 분열시키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의 교훈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악한 가르침을 통해 순수한 신앙을 더럽히려는 거짓 선지자인 것처럼 생각하고서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20절과 21절로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지금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질문 이면에는 너의 가르침이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의도로 물었다면, 지금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숨겨서 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 놓고 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도 드러내 놓고 가르치셨고, 또한 성전에서도 드러내 놓고 가르치시되 항상 가르쳐 왔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많았고, 또한 그런 말씀에 대하여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그런 논쟁 가운데서 거짓된 가르침이란 결코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말씀합니다. 들은 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이고, 그것을 통해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인지, 아니면 참 선지자인지를 확인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치게 됩니다. 22절을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지금 예수님은 비록 끌려오긴 했지만 죄인의 신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미 예수님을 죄인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끌고 올 때부터 결박하여 데리고 왔고, 심문 중에 폭력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 이 심문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실 누군가 죄인처럼 끌려와서 심문을 받는다면 그 재판은 공정해야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재판관으로 있다고 할 때는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그런 공정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반증과도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이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칼빈은 모든 정의와 모든 인정, 그리고 모든 예의가 사라지고 없는 그러한 야만적인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비록 저들은 예수님을 죄인 취급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너무나도 당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거짓됨이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말만 해 왔고, 그것 때문에 오는 손해나 어려움을 피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때를 따라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자들을 피해 숨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있었지 단순히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 잡혀 오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됨이란 전혀 없습니다.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을 통해 맞아도 거짓됨 없이 당당하게 말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치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마태복음 5장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라고 말씀하신 것과 23절의 예수님의 자세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오른편 뺨을 맞을 때 왼편도 돌려 대라는 것은 계속해서 맞기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5:38-39)는 차원에서 우리는 악한 자들에 대하여 인내해야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인내하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에 있어서는 금하시지만,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무엇이 옳고 그런지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측면에서 무엇이 옳고 그런지를 말씀하심으로, 다시 말해 참된 것을 드러내심으로 저들의 악을 물리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처럼 무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말씀으로, 진리로 저들의 악을 물리치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과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을 비교하면 저들은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 거짓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4절에서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가야바의 경우 마태의 증거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마26:59)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그에게 거짓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거짓 증거를 발견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저들이 거짓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 일에 앞장 서고 있느냐? 당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저들을 어떻게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들을 어떻게 참된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묻는 그들 스스로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모든 심문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반면 그런 불법 속에서도 예수님은 어떠한 불법도 없이 합법적인 것으로만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가 이러해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불법이기 때문에 불법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불법적이라기보다는 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 비록 세상은 불법이지만 그런 불법 속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가야 할 자가 신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를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어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을 다해 공경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관계 속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이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도 금해야 하고, 금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 이웃을 위한 일인지를 말씀으로부터 확인하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금한 것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열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무엇까지 드러내셨는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까지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것이 신성모독이라고 하여 사형을 시키자는 쪽으로 나아가는데, 이런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를 비교해 보면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숨기게 됩니다. 첫 번째 부인 이후 25절 이하에 보면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18:25-27) 특히 세 번째 부인에 있어서는 베드로를 알아본 사람이 베드로가 귀를 자른 말고의 친척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를 때 그것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소위 목격자가 나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계속해서 부인하였다고만 나오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부인하는 강도가 더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부인합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여 부인합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합니다. 자신이 드러나면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철저히 자신을 숨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지만, 또한 내 목숨까지 버리고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까지 하게 되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첫 번째 부인에서부터 봤지만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연약합니다. 얼마나 연약하냐? 예수님을 잡으려고 군대가 왔을 때 칼을 빼어 든 베드로입니다. 군대 앞에서도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도 문지키는 여종 한 마디에 넘어지고 맙니다. 삼손도 수없이 많은 블레셋 사람을 물리쳤지만 여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넘어졌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큰 일에는 잘 이겨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한 마디에 넘어집니다. 넘어지면 일어나야 되는데, 그 한 마디가 때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 실력이 이 정도 되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큰 일을 겪고 넘어갈지라도 작은 일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군대 앞에서 쫄지 않았다고 해서 여종 앞에서 쫄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넘어져 죄를 지었다고 할 때 그 죄를 빨리 깨닫고 회개해야 하는데, 죄가 죄를 낳는다고 두려워서 숨긴 죄가 더욱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죄를 더할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질 또한 더욱 무겁게 가져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죄에 대하여 연약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어리석은지 죄에 죄를 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짓고 또 짓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점점 더 무감각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실수가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이 되면 양심은 마침내 잠들기 마련입니다(칼빈).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혹 죄인줄 알지만 그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연약해서 끊어내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드러나려 할 때 그 죄를 숨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말, 행동까지 하게 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 중에서도 늘 먼저 행동하는 그런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부인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숨깁니다. 자신의 믿음을 세상으로부터 숨깁니다. 그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이란 그렇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를 이끌어 세우시지 않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은 그가 세 번째 부인하게 될 때 닭이 곧 울더라고 말씀하는데,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에서는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첫 번째 부인, 두 번째 부인, 세 번째 부인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의 부인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아닙니다. 하루가 되지도 않는 시간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부인할 것임을 말씀하셨지만, 그런데도 부인하고, 또 맹세하여 부인하고, 또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때 닭이 운 것입니다. 그리고 닭이 울 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생각 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조금 더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0-62) 닭이 울고 난 뒤 곧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닭이 울 때 주께서 베드로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닭이 울 때 주께서는 베드로를 보셨고, 베드로는 주께서 자신을 보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의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칼빈은 “사탄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비탈길은 얼마나 미끄럽고 가파른지... 주님께서 그의 손을 뻗쳐 우리를 붙잡아 주기 전에는 우리의 나뒹굼에 끝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붙잡아 일어켜 주기 전에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함 가운데 있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면서 넘어졌습니다. 부인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누가 묻지 않으니 말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 주를 부인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신데, 주인이 아닌 것처럼,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으로 우리 자신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은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 죄악 된 방향으로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숨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모든 교훈을 숨기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교훈만을 먹고 마시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말로도 드러내야 하고,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그러나 우리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런 힘과 능력, 지혜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할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그의 말씀으로 세우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께서 세상 앞에 자신의 모든 교훈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그 교훈에 걸맞은 자로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주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 아직도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면 주께서 베드로를 보셨던 그 눈길로 우리를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주의 말씀으로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