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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을 쓰고 옥에 간 예레미야(11-15)
진정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자일뿐, 자신의 뜻을 신에게 관철시키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뜻대로 기도하거나 설교해 주거나 그리고 교회 운영하지 않는 목회자를 인간적인 권력으로 거절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른 목회자는 그런 형태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11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12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13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14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15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11-15)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가서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마치 영매를 찾아가서 신이 원하는 대로 빌어주면,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믿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이 원하는 대로 해 줄리 없습니다. 반대로 이런 선지자를 시드기야 왕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자기 뜻을 거절한 선지자에게 왕이 어떻게 하는지,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⑴ 성을 떠나는 예레미야(11-12)
이 단락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옥에 갇히게 됐는지를 보고합니다. 시기적으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그의 사절을 통해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한 직후가 됩니다. 바로의 군대가 궁지에 몰린 시드기야를 도와주려 애굽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갈대아인의 군대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일시적으로 철수했습니다(11). 예루살렘의 성 밖 출입이 다시 가능해졌습니다. 그 시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 베냐민에서 분깃 상속 재산을 받으려고 고향집에 다녀오기 위해 나섭니다(12). 상속 재산과 관련한 이야기는 32:7-12에도 나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32:2), 조카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고멜의 권리를 행사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마도 두 개의 이야기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관련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⑵ 체포되는 예레미야(13-14)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성을 떠나던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수문장 셀레먀의 아들 이리야는 예레미야가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는 오해를 받습니다(13; 참고 21:9; 38:2).
수문장 이리야 입장에서는 예레미야를 잘못 이해했던 것은, 지금까지 40년 동안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항복하면 산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22:8-9에서 예레미야는 항복이 생명의 길임을 대놓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37:9-10에서도 예루살렘이 반드시 갈대아인들의 군대에 의해 불꽃의 먹이가 될 것을 선포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에 항복해 망명을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맞서 성문을 지키는 이리야의 눈에는 예레미야는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탈주병처럼 보였습니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 북쪽 베냐민 지역으로 나가는 성문 이름입니다. ‘문지기의 우두머리’는 특히 전시에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수문장 이리야에게 단호하게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항변하지만, 이리야에게 체포당하고 고관들에게 데리고 가리고 갑니다(14). 그는 요나단의 집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져 버립니다.
⑶ 구금되는 예레미야(15)
바벨론 근대가 예루살렘에서 일시적으로 떠난 후 예루살렘 출입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 이유가,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예언한 내용들이 거짓이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생각해서 고관들에게 끌고 갑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보자 노여워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15). 여호와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26장에서는 고관들이 재판관의 입장에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 희해 고발당한 예레미야에게 무죄를 선언해주었는데, 여기서는 분노한 고관들이 재판 절차도 무시하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둬버립니다. 법 집행의 책임을 맡고 고관들이 집단적으로 불법을 저지릅니다.
36장에서는 일부 고관들이 위기에 처한 예레야를 도와주었는데(36:19,25), 이제는 고관들 가운데 예레미야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서기관 요나단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전시 상황과 관련된 임시 조치였던 것 같은데, 어떤 배경이나 이유에서 서기관의 집이 그런 용도로 선택됐는지는 불분명한비다. 예레미야가 갇힌 감옥은 아마다 저수조로 사용했던, 지하에 판 천장이 둥근 구덩이였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빛과 공기가 거의 차단된 어둡고 습한 지하 토굴에 버려집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이 이제대적의 손에 거의 넘겨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오해를 받아 어둡고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말씀 때문에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이 찾아올 때, 감사함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시드기야와의 예레미야와의 만남(16-21)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야 합니다. 타인의 충고가 쓴 말이라도 그것이 당신을 위하는 것이고 당신을 살리는 말이라면 그것을 귀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과의 만남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16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18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19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20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21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16-21)
예레미야가 들어간 감옥은 아주 열약한 지하 토굴에 감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날’(많은 날들)이 지나 시드기야 왕이 신하들을 보내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를 급히 찾아 사람들 은밀하게 왕궁으로 불러 드립니다.
⑴ 시드기야의 질문과 답변(17)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받은 말씀이 있는지 조용하게 물어봅니다. 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개인적으로 묻는 것을 보면, 시드기야와 예루살렘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더 악화된 것 같습니다. 왕은 예레미야와의 만남이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합니다. 시드기야의 왕권이 매우 허약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시드기야 왕의 기대는 지금까지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에워싼 좋지 않는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떠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지는 않을까하는 소식과, 그리고 자신의 왕의 자리가 계속 보존되어 지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왕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먼저 ‘있나이다’라고 답변하고, 뒤이어 말씀의 내용을 알려줍니다(1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시드기야에게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참조 32:4; 34:3)라는 신탁이 주어지지만, 시드기야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질문(18-19)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이용해서 서로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책망이 담긴 질문입니다. 첫째 질문은 자신의 무죄 주장과 담긴 질문입니다.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18) 예레미야는 왕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들과 유다 백성 누구에게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옥에 가두기로 한 고관들의 결정에 왕도 연루됐음을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고대 근동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왕은 최고 재판관이었습니다. 왕이 모르는 신하들만의 결정이라면 왕은 이를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레미야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구원예언자들을 향합니다.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19) 누가 참 예언자이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지 확실해졌는데, 역설적이게도 참 예언자는 옥에 같혔고, 거짓 예언자들은 조용히 숨어버렸습니다. 최고 재판관인 왕은 누가 왕과 와의 신하와 백성에게 잘못을 범했는지를 바르게 판결해주어야 합니다. ‘어디’는 한편으로는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입을 다문 구원예언자들의 기회주의적 침묵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오도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구원예언자들이야말로 옥에 넣어야 할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처지였지만,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시드기야 왕의 기분을 맞춰 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⑶ 예레미야의 탄원(20-21)
질문을 마친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왕에게 한 가지 억울함을 간청합니다.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20)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예레미야는 석방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기하 토굴로 돌려보내지만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왕이 신하들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출해주기에는 능력이나 용기가 없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간청에 시드기야가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머물게 하고, 성에 떡이 모두 동날 때까지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날마다 떡을 가져다주게 합니다(21). 고립무원의 예레미야가 왕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넘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예언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묻지만, 전해준 말씀에 순종해 결단을 내릴 만한 용기는 없었습니다. 38:9과 52:6에 따르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성 중에 떡이 완전히 동난 것 같습니다. 시위대 뜰로 옮겨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거기에 있다가(38:28),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해방됩니다(39:14).
우리에게 교훈한 것은 우리들은 너무 많은 경우 자신의 번영이나 소유와 같은 것에만 관심 있고 집착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합되는 아첨의 말들이 독이 되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즐기고 그곳에 중독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을 많이 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뜻하지 않은 고난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정당히 거짓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때문에 당한 고난이라는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고,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지체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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