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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매일 천국 진입로를 놓치는 사람>의 줄거리:
장롱 면허증으로 운전을 시작한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 깜깜한 밤 독일 아우토반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 진입 exit을 놓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는 손님을 픽업하려던 길이었기에 그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결국 교통사고로 이어지고 말았지요. 이렇게 매일 천국 진입로를 놓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천국 진입로를 놓치는 사람
(누가복음 13장 25절~30절)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매일 천국 진입로를 놓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매일 천국 진입로를 놓치는 사람’
어제에 이어서 좁은 문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87년 겨울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만 90년에 독일유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33년 동안 운전을 해오면서 크게 사고를 당한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았는데 한 번은 폐차를 시킬 정도로 사고가 났었고 다른 한 번도 상당히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고가 모두 진입로를 놓쳐서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진입로를 놓친다는 말은 저에게는 굉장히 아픈 상처를 기억하게 합니다.
진입로는 현재 상태에서는 출구이고 새로운 상황에 들어간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입구가 됩니다. 이 진입로를 놓쳐서 큰 사고가 났다는 점이 신앙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진입로는 좁은 문입니다. 그리고 이 좁은 문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놓친다면 천국 진입로를 놓치는 것이고 구원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좁은 문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좁은 문 비유가 구원과 직접 연결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23절에서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종교적인 어휘로 종교의 전유물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님의 좁은 문 비유를 구원과 연결시켜 기록함으로써 구원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종교로부터 해방시키고 있습니다. 기존의 상식의 틀을 깨뜨리는 참 놀랍고 혁명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은 이동을 위한 구조물로써 공간이나 장소의 변화를 상징합니다. 문을 통해서 지금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간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전혀 다른 상황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 찾기는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결핍이 느껴지게 되면 탈출을 위한 출구이자 개선된 상황으로의 입구를 찾고자 합니다. 문은 도로의 진입로와 같습니다. 나가는 쪽에서 보면 출구가 되고 들어가는 쪽에서 보면 입구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결핍이 느껴질 때 진입로를 통해 문을 찾게 됩니다. 누가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시도를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루를 사는 중에도 작든 크든 끊임없이 문을 통과하려는 시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문 찾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염두에 두고 구원을 종교의 울타리 안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문제임을 제기하고 계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과 연결시켜 구원을 정의해보자면 구원이란 더 이상 다른 문을 찾지 않게 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리 살펴보아도 불만과 결핍이 생기지 않으며 기쁨과 만족이 충만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러한 구원을 얻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이라는 넓은 문을 찾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마음의 불만과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을 문으로 삼아 현재의 상황을 탈출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다른 상황으로 옮겨가고자 문을 찾는 것이 바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들 중에서 문을 찾기 때문에 쉽게 발견됩니다. 문이 넓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문 찾기는 결국 불만과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 즉 구원에 도달해야만 끝이 납니다. 그러나 세상은 본래 구원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에 세상의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한 결코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도 재벌회장도 말단직원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세상이라는 넓은 문에 들어가고자 해서는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만과 결핍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문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반복하다가는 불만과 결핍이 더 커져만 가는 지옥의 예고편을 살 수밖에 없고 육체가 죽고 나서는 실제로 지옥으로 가게 될 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 또한 지금 상황에 불만과 결핍을 느끼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는 세상에서 문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세상에서 문을 찾는다는 것은 내 몸에서 뻗어 나가는 관계들로부터 이루어진 나의 지구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자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가 의식하는 지구로부터 마음이 유체이탈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내 마음을 세상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당장 어떤 불만이나 결핍이 있더라도 마음이 십자가 좁은 문으로 진입해 들어감으로써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지구 자체를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불만스러운 상황을 포함하고 있는 지구 안에서 옮겨갈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붙잡고 지구 바깥으로 마음을 보낼 때 우리의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에 이를 때에 마음의 불만과 결핍과 원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소원함으로써 해결하게 됩니다. 구원은 불만과 결핍이 완전히 해소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과는 다른 상황으로 가기 위한 문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다른 상황을 찾을 필요가 없기 위해서는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더 이상 어떤 불만과 결핍도 느끼지 못하고 다른 문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바로 구원을 얻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사건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죽음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마음에는 어떠한 불만이나 결핍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싫게 여기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어떠한 것인가 생각할 때에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에 나를 대입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으로 채워졌더라면 지금 처한 상황이 전혀 불만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처한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당장 돌에 맞아 죽는 상황보다 더 다급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 상황이 큰 불만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또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여전히 몸으로 의식하는 지구 안에서 넓은 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이제 좁은 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좁은 문으로 마음을 들여보냄으로써 불만과 결핍의 상황이 벌어지는 지구에서 마음을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자리에 이를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소원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의 마음을 채워주실 것이고 불만과 결핍이 완전히 사라지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좁은 문의 삶입니다.
다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문제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적 제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점이 지나가고 나면 더 이상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말살되어버리고 맙니다. 좁은 문을 놓친다는 것은 결국 천국으로 들어갈 진입로는 놓치는 것이기에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진입로를 놓쳤을 때 두 번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진입로인 십자가 좁은 문에 들어갈 때를 놓친다면 천국에 들어갈 기회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잔치의 문이 완전히 닫히게 되었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창조된 세계에 우주가 있고 그 안에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세계 바깥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시는 천국이 있습니다. 또 그 천국에 모세와 엘리야가 있음을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이 천국과 지구가 연결된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만드신 통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란 육체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 사람은 육체가 있으나 없으나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이 영원한 삶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한쪽은 마음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채워서 영생을 살고, 다른 한쪽은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못한 채 흑암과 공허와 혼돈한 상태에서 영멸의 삶을 살아갑니다. 없어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나 생명이신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가 영생과 영멸을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이 영생과 영멸은 지구 위에서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결정됩니다. 천국에서 지구와 연결되는 통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만드신 통로입니다. 이 통로는 입구가 한 곳뿐입니다. 바로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지구 위에서 사는 동안에 천국의 진입로인 십자가 좁은 문을 놓친다면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릴 수 없으며 죽은 다음에는 천국으로의 진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지구 위에 있는 좁은 문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마음을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육체가 죽은 다음에는 천국의 진입로인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고 마음을 보낼 기회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재정문제 때문에 마음에 불만이 생기고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돈이 있는 상황으로 바뀌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넓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고 이와 동시에 천국 진입로를 놓친 것입니다. 또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건강이 좋아지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생각만으로도 넓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며 동시에 천국 진입로인 좁은 문을 지나치고 놓치게 된 것입니다. 재정문제와 건강문제로 인해 천국 진입로를 놓침으로써 하나님께서 재정문제와 건강문제에 개입하실 기회도 놓치고 구원까지도 놓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종교행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받고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느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구원은 결정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녀가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문제로 천국의 진입로를 지나쳐버렸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마음이 십자가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각종 문제들이 포진되어 있는 지구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좁은 문이 바로 천국 진입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진입로는 십자가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통로 외에는 천국에서 지구로 연결되는 길은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유일한 통로의 유일한 입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입니다. 삶이란 문을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문을 통과하려는 보편적인 행동은 삶의 현장에서 결정되기에 구원 또한 삶의 현장에서 결정됩니다. 예배당을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삶에서 좁은 문을 선택하느냐 넓은 문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편 본문 26~27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의 구원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았습니다. 지역 예배당 조직에 소속되었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충성하고 헌금하고 전도도 하였습니다. 성경공부와 온갖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시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예수님과의 관계는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자들에게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일으키신 연쇄 사건에 마음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령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고 같이 식사까지 한 사이일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마귀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지혜자이시고 기적의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싶으시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과정마다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평생 목사로 살고 장로로 살고 권사와 집사와 구역장으로 살았습니다. 예배당 조직에 헌신했고 헌금했고 전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간 적이 없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한 적이 없고 넓은 문으로만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장로님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며 돈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을지라도 이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장로님에게 목사님이 돈 문제는 물론이고 몸과 연관된 지구 전체를 탈출해서 십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설령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부활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다면 목사님도 넓은 문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장로님이 돈 문제의 해결을 바라며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같이 달려들어서 돈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기도합니다. 평생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예수 이름을 부를지라도 예수님은 나는 너를 전혀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싶으시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일으키신 연쇄 사건의 과정마다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좁은 문 들어가기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죽은 다음에나 천국에 갈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천국과 지구 사이의 통로는 예수님뿐이며 그 통로의 입구는 십자가뿐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십자가라는 천국 진입로를 이미 지나친 것입니다. 살아서 넓은 문으로만 들어가느라 좁은 문을 놓친 사람들이 무슨 수로 죽은 뒤에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목회자들은 이 영적인 사실을 지적해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건강 문제가 생기면 교인들은 건강해지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건강이 좋아지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자 합니다. 지구 위에서 상황의 변화를 추구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목회자가 이러한 기도를 묵인하고 오히려 부추긴다면 지옥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목회자라면 건강 상태가 안 좋더라도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구원의 상태를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불만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끌고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같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목회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한때 그러한 엉터리 목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종교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 쉬운 삶의 현장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좁은 문을 두드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은 절대기쁨과 절대평강이 깨지지 않는 구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인간은 마음에 불만과 결핍을 느끼며 문을 두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지구상의 75억 인구 중의 대부분은 지구상에서 더 나아진 상황을 기대하며 넓은 문으로 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써 지구 자체를 탈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만이 천국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의 입구이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구원은 지구 위에서 몸이 살아있는 동안 십자가 좁은 문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살면서 넓은 문만 들어가던 사람이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소리는 영적인 사실에 비추어보자면 있을 수도 없는 난센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를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부족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지구 위에서 또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려는 넓은 문 대신에 그 상황을 포함하는 지구 자체를 탈출하는 천국 진입로인 십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삶 속에서 하루종일 구원을 맛보고 천국을 맛 볼 수 있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오감으로 접하는 삶의 현장이 바뀔 때마다 불만과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넓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천국 진입로인 십자가 좁은 문을 놓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깨워주시고 경계할 수 있게 해주시고 삼가할 수 있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