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춘도
조춘도(부분)
곽희(郭熙1000? - 1087)에 기록이 많지 않다. 송나라 때의 곽약허가 쓴 도화견문지에는 곽희를 하양 온현(오늘의 하남성 맹현의 동쪽) 사람으로 화원의 예학(藝學)이다, 라고 하였다. 생몰년대도 불확실하지만 대략적으로 1000년에서 1087년 쯤에 생존하였으리라 추측한다.
곽희의 아들 곽사가 쓴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의하면 가우(嘉祐) 년간(1056-1063)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명사들과 교유를 나누었다. 그때 물난리가 나서 상국사(相國寺)가 물에 잠겨서 벽화가 훼손 되었다. 조정에서는 벽화를 새로 그리기 위해서 쟁쟁한 화가들을 불렀다. 곽희도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아들이 기록한 것이어서 조금은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그때까지는 곽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산수화의 한 유파를 대표할 만한 화가도 아니었다. 중국인 말하는 북송의 3대 화가(이성, 범관, 동원)에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임천고치에서는 곽희를 화원화가로서는 최고의 지위읜 대조(待詔)였다고 하였다. 이런한 기록들을 미루어 보면 북송 희령 7년(1054) 무렵에 예학이라는 벼슬을 하였고, 신종이 죽기 전(1085)에 이미 대조의 직책에 있었다.
1086년에 철종이 죽고 난 후로는 곽희에 관한 화원의 기록이 없다. 이때는 아마도 신파의 몰락으로 화원에서 은퇴하였으리라고 추정한다. 한편으로는 북방 산수화가 쇠락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곽희가 활동하였던 때는 왕안석이 재상에 있었고, 구양수가 문학 방면에 크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1086년은 단순히 왕의 교체만 일어난 해가 아니다. 신, 구파의 당파 싸움에서 왕안석의 신파가 밀려나고 구파가 득세한 해이다. 곽희도 신파 계열의 화가로 몰려서 화원에서 쫓겨 났는지도 모른다.
재미 있는 사실은 북송의 초에는 이성의 그림이 인기가 아주 높았다. 곽희의 그림은 이성의 화풍을 이었으므로 덩달아서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이성의 명성을 넘볼 수는 없었다. 철종시대(1086년 이후)에는 심미의식에 변화가 왔다. 북방 산수화는 선호도가 떨어지고 남방 산수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당파가 집권하면서 소식을 위시한 문인 사대부의 미에 대한 취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장방기(張邦基)가 쓴 묵장만필(墨莊漫筆)에 의하면 아들인 곽사가 아버지의 그림을 비싼 돈을 주고 사 모았다고 하였다. 당시의 풍조가 북방 산수화를 직업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낮추어 보았으므로 부끄럽게 여기고 없애려 하였다.
선화화보에서는 곽희를 평하기를 ‘그림의 화풍은 이성을 본 받아서 표현이 정치하고 섬려하다. 나중에는 스스로 화법을 얻었다.’고 하였다. 선화화보를 쓸 무렵에는 궁중회화에서 북방 산수화는 푸대접을 받았다. 궁중회화의 특색으로 새장에서 키우는 새처럼 아름답고 꽃 향기처럼 퍼져나가는 화려함이 인기를 끌었다.
후대에는 곽희를 이성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이성보다 후대 사람이면서도 이곽화파의 창시자로 꼽는다. 그가 남긴 조춘도(早春圖)를 이곽화풍의 대표작으로 다루고, 이론서로서 그를 다룬 임천고치 때문이다.
곽희는 한 폭의 그림에 삼원(三遠)을 같이 그려 넣은 최초의 화가이다. 앞의 화가들은 고원(高遠)과 평원(平遠)의 이원(二遠)을 그리기는 하였어도 삼원을 그리지는 않았다. 산수화에서 고원의 기법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평원은 당말과 송초에 나타나서 이성이 완성하였다. 곽희의 삼원 화법은 남송의 화원 화가들이 즐겨 본 받았다. 한편으로 아침과 저녁에 나타나는 빛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여 밝고, 어둠을 표현하였다.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작은 변화도 예리한 감수성으로 표현해 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린 대표적인 산수화가 조춘도이다. (158*108cm-1072년)
조춘도는 대산대수(大山大水)를 그린 대표작으로 꼽는다. 가운데 봉우리를 우뚝 솟아오르게 그린 삼정(三鼎)의 구도이다. 산봉의 돌은 마치 움직이는 구름처럼 그렸다. 겨울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봄의 기운을 그렸다. 봄빛이 녹아드는 초목과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물이 폭포수가 되어 굉음을 지른다. 어슴프레한 달빛 아래에 떠 있는 돛배와 봄길을 걸어가는 여행객이 봄을 알린다. 게발 같이 그린 해조묘의 나뭇가지도 곽희 그림의 특징이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표현해내는 기법은 곽희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여행을 다룬 행려도(行旅圖)를 10폭 쯤 남겼다.
곽희가 전혀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지는 않았다. 앞 선 화가의 기법을 따르면서 자신의 개성미를 돋 보이도록 그렸다. 한 평자가 ‘널리 배우고, 깊이 보고, 많은 것을 거치고, 좋은 점을 취했다.’고 하였다. 이 말이 적절하다.
곽희를 중국 회화사에서 특출한 화가로 만들어 준 것은 그의 저서(아들이 주석을 달고 정리하였다.)로 알려진 임천고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산수화론은 임천고치에 실려 있는 산수훈(山水訓)에서 시작했다고 말할 만큼 유명하다. 산수훈에 의하면 산과 물과 나무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여야 그림이 생기를 가지는 지를 설명하였다.
첫째는 정확한 관찰을 주장하였다. 산수훈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다.
“무릇 산이란 물을 얻어야 살아 움직일 수 있다. 풀가 나무가 있어야 빛이 난다. 안개와 구름이 있어야 뻬어나고 예쁘다. 산에 길이 없으면 움직임이 없고, 나무가 없어면 살아 있을 수 없다. ”
다시 말하자면 산수화는 산과 물과 초목과 길이 있어야 한다. 이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이 생명을 얻어서 숨을 쉰다.
“산수에는 갈만한 곳, 볼만한 곳, 놀만한 곳, 머물만한 곳이 있다. 그림에도 이런 곳을 표현해내어야 좋은 작품이 된다.”
산수화법에서 삼원(三遠)과 삼대(三大)는 그가 찾아 낸 회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삼원은 앞 서 설명을 하였다. 삼대(三大)란 산, 나무, 사람 사이에서 크기 사이에 나타나는 비례 관계를 말한다. 중국 회화사에서 곽희가 남긴 공적이라면 선대의 그림을 후대의 화가에게 연결시켜 준 것이다.
곽희의 화풍은 조선 초에 우리나라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있다. 그 외에도 이곽화풍의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 이곽화파의 그림은 우리 나라의 안견이 받아들인다. 조선 초에 안견이 이곽화풍으로 그린 그림이 크게 유행함으로 아를 따르는 화가를 '안견화파'라고 부르기고 한다. 이후로 이곽화파은 우리나라 회화사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
산수에는 ᆞᆞ그림에는 이런곳 좋은작품 ᆢ 감사합니다 머리에 쏙 쏙 잘 들어오는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