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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뜻밖에 들려온 소식 / 눅 2:8-14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많은 이념 서적을 저술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리영희 선생이 계십니다. 1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흔히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이 '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던 분이지요. 독재 정권에 의해 여러 차례 구속되어 모진 고생을 했지만, 한 번도 지조를 꺾거나 신념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통역장교로 복무할 때 겪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술자리가 마련됐습니다. 그동안의 피로를 풀 겸 소문난 술집에서 거나한 술판을 벌였습니다. 술자리가 파한 뒤 취기가 오른 장교들은 한 사람씩 기생을 데리고 2차를 나갔습니다. 리영희 선생 역시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기 옆 자리에 앉은 기생과 2차를 나가도록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행들과 어울려 한참 술을 마시다보니까 그 기생이 사라진 것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리영희 선생은 운전병이 모는 지프를 타고 그녀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 기생은 한참을 기다렸다가 나왔습니다. 나와서도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오만한 자세로 내려다보자 리영희 씨는 권총을 꺼내 공중을 향해 발사했습니다. 그러면 허둥지둥 툇마루에서 내려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생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한참을 내려다보더니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젊은 장교님, 아무리 하찮은 기생이라도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과 몸으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진주 기생을 잘못 보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그렇게 천하게 굴지도 않습니다.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 사람이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이 기생의 너무도 당당한 기품과 위엄에 청년 리영희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마냥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신의 왜소해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리영희 씨는 그 기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새삼 이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그 기생이 했다는 말 한 마디 때문입니다. 총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지 말고 마음의 감동으로 하라는 충고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힘을 통하여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반대로 사랑으로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내주신 분이 아기 예수님이시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후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 눈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성탄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단순히 기다리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되시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시고 천해지셨습니다. 가장 순하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유럽에서는 반(反)산타 운동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사가 장삿속에서 만들어낸 캐릭터여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청 앞 크리스마스 시장에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모든 제품이 전시돼 있지만 유독 산타클로스만은 없답니다. 아예 전시를 하지 않는답니다. 산타는 가끔씩 눈에 띄는 '反산타' 스티커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랍니다. 비엔나시 대변인은 "산타클로스는 영어에서 나온 것이니 산타가 보고싶은 사람은 코카콜라의 나라 미국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반산타 움직임은 독일로도 확산이 됐습니다. 독일 성 니콜라스 재단의 베티나 스케드는 "우리는 여기저기서 붉은 옷을 입고 수염 기른 사람이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손상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예수의 탄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선물과 상술만 남은 축제로 전락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호주에서도 반 산타 운동은 불이 붙었습니다. 호주의 한 목사님은 산타는 어린이들에게 탐욕과 이기심을 가르치는 '거짓된 신'이라고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빅토리아주 와남불의 새생명교회 스티브 맥닐리 목사는 산타가 하나님의 불경스러운 대역으로 부모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어린이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맥닐리 목사는 산타 이야기가 상업적인 경쟁심을 조장하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물질주의와 이기심을 심어준다면서 "산타가 어린 꼬마들의 사랑과 헌신과 신앙심을 빼앗아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도 반산타 운동이 이제야 시작되고 있는데 더욱 거세게 벌여야 할 때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산타 복장, 산타 트리, 산타 카드, 산타 캐럴, 눈썰매, 루돌프 사슴 등, 이 모든 것을 교회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산타클로스는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시에서 출생한 성 니콜라우스의 이름에서 유래됐습니다. 그는 일생에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래서 니콜라우스는 성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아요.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선행을 누군가가 이용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어야 하겠는데, 누가 줄 것인가? 그래서 선물을 주는 이로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니콜라우스로 대체시킨 겁니다. 라틴어로 그의 이름은 상투스 니콜라우스인데, 이를 '산 니콜라우스'라 발음하던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 아메리카에 건너가 영어와 섞이면서 '산테 클라스'가 됐고, 전 세계로 크리스마스가 전파된 19세기엔 '산타클로스'로 굳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성탄절에 산타가 예수님 대신 주인공 노릇을 하게 된 데에는 코카콜라의 상술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김병도 씨가 쓴 ‘코카콜라는 어떻게 산타에게 빨간 옷을 입혔는가’라는 책에 보면, 1822년 치과의사 클레멘트 무어가 '성 니콜라우스의 방문'이라는 시를 발표할 때만해도 산타는 왜소한 몸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요? 굴뚝을 드나들며 선물을 나눠주려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920년 코카콜라는 항상 웃는 모습의 뚱뚱한 할아버지로 이를 재창조했습니다. 거기에 코카콜라를 연상시키는 흰 털(하얀 거품) 달린 빨간색(콜라 색깔이 빨갛게 보이잖아요?) 외투를 입히고 커다란 벨트를 채웠습니다. 겨울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고심하던 코카콜라는 광고를 통해 선물 배달 후 코카콜라를 마시는 산타를 보여줬는데, 이때 화가 하든 선드블롬이 자신을 모델로 그린 것이 현재의 산타의 모습입니다. 이런 코카콜라의 상술로 인해 산타클로스는 전세계인의 마음에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성탄절은 세상 기업의 교묘한 상술에 의해, 주인공이 아닌 가짜 주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부터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잘못된 성탄 문화를 속히 교회로부터 추방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성탄 문화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성탄절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이 날이 왜 의미 있는 날인지, 왜 우리는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먼저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보십시오. 목자들에게 일러주신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0절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 예수님의 탄생, 이것이 바로 기쁨의 좋은 소식의 내용입니다. 그러니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성탄절은 무슨 날이지요?" "산타클로스의 생일입니다"라고 대답한 학생이 64%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탄절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고 싶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핸드폰입니다. 또 물었습니다. "성탄절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가장 많은 대답이 크리스마스 트리 꾸미기였습니다. 두 번째가 영화 보러가기였습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성탄절이면 호텔 예약이 제일 많은 때입니다. 우리나라 콘도 예약률이 가장 많은 날입니다. 성탄 이브는 모두 술 마시고 노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인데 주인공인 예수님은 없는 것입니다. 아들딸을 잘 기르고 결혼을 시켜서, 손자 손녀까지 둔 홀로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생신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모여서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겠다고 다 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딸, 손자, 손녀가 다 온다고 하니까 아침부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자녀들이 와서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TV를 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났는데도 그 많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가운데 상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70이 가까운 어머니 혼자 부엌에서 덜거덕거리며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으면서도,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고, 어머니에게 설거지까지 시켰습니다. 누구 생신입니까? 누가 누구를 축하해 준 것입니까? 오늘날 성탄절이 그렇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에는 오직 예수를 생각하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무슨 성탄절입니까? 그런데 혹 우리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쉬는 날이기에, 선물을 받는 날이기에, 가족끼리 놀러가는 날이기에, 애인과 데이트하는 날이기에, 성탄절 행사 때문에, 흥청망청 재미있는 성탄절 분위기 때문에 기다려진다면, 이미 예수님 없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미국의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작은 도시 소머빌에서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시청 앞 광장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시청 앞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에서는 오색등이 깜빡거렸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았던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아기 예수를 몰래 훔쳐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멀리서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방박사들, 아기 예수를 싸 놓았던 포대기, 누워 있던 말구유도 모두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아기 예수,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시민들이 안타까워하였고,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던 주위의 모든 장식물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시 당국은 급기야는 방송을 통하여 호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민들과 각 기관 단체에서도 거리로 나와 전단지를 나누어주면서 아기 예수를 제자리에 갖다 놓기를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며칠 후 아기 예수를 훔쳐간 사람은 다시 예수를 그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여러분, 아기 예수가 없는 성탄절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장식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선물이 오고가고, 성탄 축하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우리의 마음이 그것들로 인해 기쁨이 넘칠지라도, 아기 예수가 없는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탄절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깨닫는, 그런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성탄 문화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지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탄 행사나 성탄 문화를 가만히 보면, 주인이 객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 전날 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성탄축하 연극을 하는데, 산타 복장을 한 사람이 슬퍼하고 있는 아이에게 와서 선물을 주고는 "메리 크리스마스!" 그럽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데 보니 완전 산타판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입으로 부르는 캐럴송이 '징글벨, 루돌프 사슴코이고,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엔 선물을 안 주신 대요"를 부르면서 율동을 하고,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도대체 누가 주인공입니까? 산타입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성탄 문화를 바로 가르치고, 올바른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성도의 가정에서 산타가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모든 문화를 추방해야 합니다. 성탄절 행사의 모든 면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공이 되고,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이 성탄절이 있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의 성탄이 되도록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제자리로 돌아갑시다. 우리부터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탄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손님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이번 성탄을 맞는 우리는 진정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날의 주인공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잔치, 예수님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그런 성탄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성탄절은 구주가 나신 날임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천사가 전하여 준 기쁨의 좋은 소식의 핵심도 "구주의 나심"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나신 날이 바로 성탄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주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날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살리려면, 우리를 구원하려면, 누군가 죄 없으신 분이 오셔서 우리 대신 피를 흘려주셔야 합니다. 히 9:22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구속의 원리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원하셔서, "내가 가마. 내가 사람이 되마. 내가 피를 흘리마. 내가 죽어주마. 내가 너희를 살려주마" 하시고는 이 땅에 구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성탄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갈보리의 십자가로 이끌어 가는 길목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십자가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말구유, 예수님의 탄생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배경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크리스마스는 복음도, 은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탄이 우리에게 왜 의미 있는 날이 됩니까?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왜 우리 마음이 감동을 받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성탄을 맞이하기에, 우리에게는 성탄절이 감격스런 날이 되는 것입니다. 날 위해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가슴이 벅차 오르고, 그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나의 전 인격이 가만있지 못하고 흥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주로 오신 예수님,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새롭게 깊이 깨닫는 그런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3.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10-11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천사가 전하여준 그 소식의 성격을 세 가지로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넘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부분적이거나 제한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 좋은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세상 모든 사람, 어떤 계층, 남녀노소, 누구에게든지, 그리고 어떤 시대이든지 모두 통하는 소식입니다. 미국 사람에게도, 중국사람에게도, 흑인들에게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오늘 우리들에게도,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들이나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소식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소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뉴스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갈 수가 없고, 언제나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지속적으로, 변하지 않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구주 탄생 소식은, 오랜 세월이 흐른다고 퇴색되어질 소식도 아닌, 시대를 초월하여 오고가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미칠, 영원토록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둘째, "큰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이란 말은 헬라어로 ‘메갈렌’인데, 그 의미는 '큰, 중대한, 위대한, 굉장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주 굉장한 소식, 놀라운 소식을 말합니다. 태초에 사람이 창조되어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있었던 수많은 소식들 중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보다, 더 크고 굉장하고 중대한 소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일 크고 놀라운 소식이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기쁜 소식은 많이 듣습니다. 누가 칠순, 팔순을 맞아서 기뻐하고, 수능시험을 잘 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자식이 이번에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은 그 정도 기쁘고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 불 심판을 받아야 하는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구주가 나셨다는 이 소식은, 한 마디로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주가 나셨다는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의 인생 전부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그런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형수에게 1년 그 사형집행 날짜가 연장되는 것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10년 연장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사형 면제가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주로 탄생하셨다는 것은, 죄악으로 멸망 받아야 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바로 이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도의 성자 썬다싱을 알지요? 그도 한 때 죄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몸이 수척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돈으로 해결이 불가능했고 감옥에서 죄의 대가를 치른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무도 괴로워 라호라로 가는 기차길 옆에서 밤 10시에 결사적인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만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내일 아침 5시에 지나가는 첫 열차에 투신 자살할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은 계십니까? 계시다면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심장이 찢어질 듯이 절규하였습니다. 그러나 4시45분 거의 7시간 가까이 절규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허탈해진 그는 죽기로 결심하고 기찻길로 내리려 하였습니다. 이때 갑자기 환한 빛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썬다싱에게 속삭이고 계셨습니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원망하려느냐?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너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구나. 나는 네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겠다. 내가 바로 그 길이다." 썬다싱은 비로소 죄의 문제 해결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강물 같이 흘러 넘쳐 죄 사함의 큰 기쁨을 만끽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로 고통받고 괴로워하던 그가,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느낀 그 기쁨, 그 감격, 그건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에게는 이 기쁨이 있습니까?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탄을 맞이하여 즐겨쓰는 인사가 "Merry Christmas!"입니다. 즐거운 성탄, 기쁨의 성탄이라는 의미입니다. 올해도 우리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수없이 말하였을 것인데, 혹 내 마음에는 진정한 큰 기쁨이 없이 형식적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쁨을 간직한 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성탄을 맞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진정 이 세상에 구주가 나신 이 차원이 다른 기쁨, 이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그런 성탄절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이번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심을, 구주가 나신 날임을 새롭게 깨달으시고,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어서, 지금까지의 그 어느 성탄절보다도 더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Merry Christmas!"를 외치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9성탄)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화해의 제물’로, ‘평화의 아기’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예수님은 한 알의 희망의 씨앗이 되셔서 우리 가슴에 심겨졌습니다.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하여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이 희망의 소식을 듣고 돌아가, 이웃에게 예수를 널리 증언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온 세상이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이 세상 속에 함께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