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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진보적 정치리더십 필요할 때
대중 급진화, 차이 인정 반MB 연합을
[기고] 노회찬-심상정 '외로운 투혼'에 박수 보내는 이유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얼마 전 여의도에서 택시를 탔다. 한나라당 당사 부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고 있었는데, 편하게 한나라당 당사 앞에 내려달라고 했다. 택시 운전사는 내가 한나라당에 근무하는 줄 알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인 즉, “지금 구도는 60년대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와 같다. 공화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 지지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당이 비젼도 없고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요즘 나는 조금 다르면서도 유사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단지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었다. 즉 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60년대 중반 한일회담 투쟁 때는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킬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발전하기도 했다.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할 때
그러나 60년대에는 민주당이나 신민당(67년에 만들어짐)이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것은 박정희를 넘어서는 대안적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행적 정당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한단계 비약은 바로 70년대 김대중과 김영삼이 주창했던 ‘40대 기수론’이 나타나면서였다. 박정희를 대체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희망’이 보일 때 대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도 거대한 발전을 해가게 된다. 이렇게 ‘희망으로 발동이 걸린’ 반독재 운동을 수용하기보다는 폭력으로 진압하고자 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반독재 세력을 대표하여 민주당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개혁자유주의 정당이 있었다. 그런데 평가가 어떠하건, 정작 반독재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그 정당의 새로움과 비전이 고갈되었고, 자유주의 정당의 단일 리더십이 깨졌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것이 바로 현단계 한국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정체 지점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MB정부 하에서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하여, 자연히 반MB 연합을 위한 노력들이 나타났다. 힘이 부치니 연합해서라도 희망을 만들어보고, 단일 리더십이 없으니 집단 리더십을 가지고라도 MB에 대항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4로 상징되는 반MB 연합 시도는 민주당의 리더십 부재와 민주당 내부의 다양한 이기심들로 인하여 좌초했다. 그렇게 되자 불안이 커지는 시점에서, 국민들은 수도권의 유력 후보들, 예컨대 김진표-유시민의 단일화에 대해서도 반가움을 느꼈고,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이 더 해져, 단일화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노회찬・심상정, 전진 보폭 만큼 반MB는 풍부해져
이러한 상황의 반전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 시각에서 보면, 전 정권의 두 정체성을 상징하는 연합만으로는, 자칫 ‘전 정권 대 현정권’의 대립구도로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친노세력이 부상하면 한나라당이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하는 한나라당 일각의 분석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유시민-김진표의 연합이나, 한명숙과 이상규의 연합만으로는, 한나라당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히 풍부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부분을 넘는 더욱 높은 수준의 희망을 상징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그들이 우뚝 대중들 사이에 서고, 그 기초 위에서 연합을 해야 그때의 반MB가 MB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반MB가 국민적인 것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새로운 대안적 리더십들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 보수언론에 의해 과잉 폄훼당했던 참여정부를 국민들이 재평가하고 있지만, 분명 참여정부 하에서 실망한 국민들도 존재한다. 한나라당이나 참여정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빈민들도 존재한다.
물론 MB정부의 신권위주의에 절망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정치 일반에 대해 허무주의적으로 느끼는 젊은 유권자들도 또 따로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한 국민들이 새 정치라고 느낄 수 있어야, MB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온전한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다.
노회찬과 심상정의 외로운 투혼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어려운 완주’를 하건, 완주하지 않고 ‘막판 단일화’를 하건, 그들의 전진의 보폭 만큼, 한국정치의 희망이 자라고 반MB는 풍부해진다. 그들의 어깨에 MB를 넘어서는 희망이 걸려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79년과 07년,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가는 병목지점
약간 구조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한국사회가 아시아의 여러 민주화 국가들과 비교하면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를 상대적으로 성공적으로 거쳐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발전해왔지만, 79년 박정희의 죽음이라는 계기가 주어졌을 때, 결국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병목지점을 통과하지 못하고, 전두환 정부라고 하는 ‘우회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하에서 국민들이 고통받으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대중 자신의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고, 결국 민주화의 대전환점인 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하였다. 현단계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실 노무현 정부 말미에 이미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추동하는 대중적 힘이 부족하였고 결국 MB정부라는 ‘우회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제 MB정부 하에서 고통받으면서 진보개혁운동과 대중 자신이 변화하면서 또다른 추동력을 얻어, MB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두가지 도전
변화와 새로운 도전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포스트-민주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87년 이후 지난 20년간을 ‘민주화’ 시대라고 표현한다면, MB정부 이후 한국사회는 ‘포스트-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민주화 체제 하에서는 여전히 많은 민주개혁의 과제-예컨대 보수언론의 개혁 등-가 남겨져 있음으로 해서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일정 측면 유효하게 남아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대치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치를 현실화하기 위해 두가지 주체적 변화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이다. 앞서 노회찬·심상정의 투혼을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반독재 개혁자유주의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을 대체하는 더욱 새로운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출현시켜야 한다.
아니 87년 6월 민주항쟁에 담겨진 민주주의적 과제를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고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리더십을 창출해야 한다.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치적 리더십의 소진은 이들이 “독재와 싸우는 데는 선전(善戰)하였으나 결국 세계화의 도전에 선전하지 못한" 데서 주어진다.
즉 반독재 민주정부 시기에 반독재 자유주의세력이 대중들의 민주개혁적 정치요구를 일정하게 실현하였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을 수용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파괴적 현상들-예컨대 양극화와 고용불안정 등-에 급진적인 사회경제정책으로 응전하지 못함으로써 대중들이 이반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로 대중에게는 더 이상 희망의 언어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최장집의 표현을 빈다면, “한국의 민주정부는 급진적 신자유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허무는 위험지역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담론을 자신의 정당성의 기반으로 두고 있는 반독재 민주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고, 이명박 정부의 출현에서 상징되듯 새롭게 보수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최근 ‘연합정치’의 공간은 반독재 개혁자유주의세력이 세계화의 도전 앞에서 좌절했으나, 진보정치세력이 그 리더십을 대체하지 못함으로써 출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지난 20년 간의 정치적 리더십을 넘는 새로운 리더십을 진보정치세력이 주도적으로 형성하고 담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모두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견결하고 급진적인 계승자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혹은 지난 10년 동안 대중들이 좌절하였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극복의 희망을 담지하는 세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않된다. 여기에 지난 민주정부 시기에 더욱 급진적인 입장에 서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자 했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세금폭탄이라는 ‘선동’에 주눅들지 않는 국민
둘째의 과제는 국민들의 진보적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진보적 세력들이 아래로부터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진보적 세력들이 대중적인 기반을 가져가는 과정과 동일한 과정이다. 이를 필자는 ‘대중의 급진화’로 표현한다.
이명박 정부라는 ‘우회로’를 도약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담지하기 위해, 대중들 자신이 새롭게 변화해야 하며, 진보세력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한단계 높은 민주주의는 ‘증세와 복지확대’를 피해갈 수 없다. 그럴 때 ‘세금 폭탄’이라고 하는 보수언론의 ‘선동’에 주눅들지 않고 과감하게 ‘부유세’를 요구하는 대중이 출현해야 한다.
민주정부 10년에 약간 제도화된 복지에 대해서 보수언론들이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융탄폭격할 때 “또 장난치는군”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진보세력은 지역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보수 일색인 대중들의 생활세계 현장에서까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어려운 ‘하방(下方)적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차이 속 연합’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나는, 앞으로의 정치연합이나 반MB연합은 '차이 속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연합 논의는 사실 대중 앞에 충분히 차이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MB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들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고,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과 다른 정치세력들이 대중 앞에 부상하고 대중 속에 기반을 갖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대중들의 좌절된 요구와 이해가 수렴될 수 있는 새로운 ‘차이로 이루어진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진보의 전진을 위해서 반MB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토론회에서 김민웅 선생이 반MB야말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라고 한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반MB가 ‘폭력적으로’ 작동해서는 않된다. ‘제2의 6월 항쟁’을 기대한다거나 민주세력이 다시 결집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묻지마식 반MB'에 대해서는 전략적 입장에서도 그리고 실리적 입장에서도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서둘러 반MB로 모인다고 그 연합이 대중적 효과를 갖는 것도 아니다. MB가 잘못한다고 우리에게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며(지금도 많이 잘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역전의 노장’들이 모인다고 지지가 다시 모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차이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앞에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넘는 ‘차이’를 갖는 세력들이 대중적으로 부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연합이 이루어져야 MB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2012년 예고하는 낯선 풍경들
[집중분석-반MB④] "1회적 아니다…연립정부의 꿈"
장석준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이번 지방선거에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광경과 낯선 광경을 함께 목격하고 있다. 낯익은 광경은 진보정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악전고투다.
낯익은 광경, 낯선 광경
이것은 2002년에도, 2006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보정당은 양대 보수정당의 틈바구니에서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 경험하는 낯선 광경도 있다. 그것은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이 과거 10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민주당을 아낌없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대표가 ‘후보는 민주당(혹은 국민참여당)에, 정당은 민주노동당에 투표해 달라’고 이야기한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선다.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의 ‘반MB’ 선거연합의 결과다. 필자의 글 이전에 <레디앙>에 실린 박상훈, 이대근 등의 글은 이 ‘반MB’ 연합의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 분들의 글에 더해 필자가 약간 첨언하고자 하는 것은 지방선거의 이 낯선 광경이 결국은 2012년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모습의 예고편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바로 이 ‘2012년’과의 연관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선택과 진보신당의 처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반MB’ 연합, 2012년까지 간다
누구나 다들 2010년 지방선거가 2012년 총선,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2012년 초의 총선을 거쳐 2012년 말의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 과정의 첫 출발점인 셈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이 출발선에서 유례없이 단결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여야 간 대립을 무색케 했던 불과 몇 달 전의 친이와 친박 격돌은 이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한나라당이 2012년에도 단일한 대오로 재집권을 도모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박근혜발 정계 개편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나라당의 대동단결과 쌍을 이루는 것이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등의 ‘반MB’ 선거연합이다. 한나라당 내 친이와 친박이 결별하지 않는 한 ‘반MB’ 연합은 곧 ‘반한나라당’ 연합이다. 굳이 고상한 논리를 동원하려 애쓸 것 없이, 이것은 양강 구도의 한 축을 구성하는 데 한 몫 끼는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다.
꽤 괜찮은 세력 배합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호남 지지세와, 민주당, 국민참여당을 횡단하는 친노 세력의 비호남 지지세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 기반을 결합시킨다면 대선 승리도 노려봄직하다. 미래 집권연합으로 손색이 없다.
민주노동당 '단호한' 선택의 배경
그래서 ‘반MB’ 연합은 결코 일회적인 제휴로 끝나지 않을 운명이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 때까지 ‘반한나라당’ 연합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지방 공동 정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때에는 이른바 ‘공동 집권’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다른 당은 모르겠지만 민주노동당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민주당 혹은 친노 성향 광역단체장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단호하게 ‘진보대연합’이 아니라 ‘민주대연합’을 선택했다. 설령 민주노동당이 계속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민주대연합’으로 나아가는 전 단계임을 전제한다는 게 드러났다.
이것을 단지 이번 선거에서 실리를 쟁취하려는 행태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렇게 보기에는 민주노동당 쪽이 너무 진지하다. 민주노동당의 단호한 선택 이면에는 ‘반MB’ 연합을 2012년의 선거연합, 연립정부 추진 세력으로 발전시키려는 전망이 자리한다. 민주노동당 3만 당원이 다 이런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으리라 믿지만, 어쨌든 지금 이 당을 이끌고 있는 ‘민족해방파’(NL) 성향의 지도자들은 그렇다.
필자는 지방선거 전에 열린 이른바 ‘5 + 4’ 회의의 정책연합 협상에서 이것을 실감한 바 있다. 이 협상에서 민주노동당 측은 한미 FTA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쟁점에 대해 가장 먼저 타협안을 제출하고는 했다. 이들 쟁점에 대해 진보 진영의 입장을 관철하려 하기보다는 정당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더 역점을 두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반MB’ 연합에 관한 한 민주노동당의 진정성(?)은 알아줄만 했다.
사실 이것은 민주노동당 현 지도부만의 입장도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도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통합을 원하는 분들이 있다. 시류인 것이다.
보수 양당 체제에 의한 진보 운동 흡수의 대단원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유연한’ 연합 전술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진보’정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글쎄, 이런 반문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굳이 장황한 논리를 동원해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앞으로 계속 반복될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MBC의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에서 한미 FTA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념을 밝혔다. ‘개방형 통상국가’라는, 예전에 현재의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이것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당의 국회의원과 전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총출동해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유세를 대행해주고 있다.
이럴 거면 민주노동당은 3~4년 전에는 왜 그토록 한미 FTA에 반대했던 것인가? 왜 2006년 말 도심 시위를 벌여서 지금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인 당시의 국무총리가 ‘불관용 선언’까지 들고 나오게 만들었던 것인가? 왜 민주노동당의 당시 대통령 후보가 2007년 11월 11일에 한미 FTA에 맞서 총궐기하자고 부르짖고 나섰던 것인가?
그렇다고 ‘한미 FTA 반대’가 무슨 대단히 급진적인 주장도 아니다. 기왕의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제 체제를 더욱더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악하지는 말자는 정도다. 그런데 이조차도 ‘반MB’ 연합에서는 ‘걸러져야 할’ 쟁점 중 하나가 된다.
보수 양당 체제에 헌납된 진보운동
여기에서 ‘반MB’ 연합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범민주당 세력은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떠한 실질적인 재분배적 조세 체계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복지’ 유행에 편승하는 모습 정도가 그나마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까. 이런 민주당과 높은 수준의 정당연합을 구성하자면 결국 민주노동당 쪽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 2~3년간 ‘반MB’ 연합이 지속, 강화되는 과정에서 계속 반복될 것이다. 2012년에 야당연합이 제시할 정책 비전의 왼쪽 경계가 어디일지는 ‘비정규직’, ‘사회복지세’, ‘한미 FTA’ 등의 쟁점은 하나같이 비껴간 이번의 정책 합의가 이미 잘 보여준다.
이런 류의 정당연합은 결국 진보정당운동의 나름의 성과인 민주노동당을 보수 양당 체제에 고스란히 헌납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상황이 더욱 심각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이른바 ‘배타적 지지’ 방침을 통해 민주노총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즉, 민주노동당의 헌납은 진보정당운동만이 아니라 1987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지속된 진보 운동 전반을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 정치권은 끊임없이 진보 운동의 일부를 흡수해왔다. 1988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에 ‘재야’ 인사들이 참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면, 이제 2012년 총선, 대선은 그 대단원을 장식하는 무대가 되려 하고 있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2012년 진보 독자 대응을 지지하는 세력의 결집으로
사실 민주노동당만 비판할 일이 아니다. 진보신당도 흔들렸다. 진보신당은 ‘반MB 대안연대’, ‘진보대연합’ 등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5 + 4 회의’에 참여하면서 길을 잃었었다. 그리고 진보신당 부산시당은 끝내 광역 수준에서 ‘반MB’ 연합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진보신당은 선거 이후 이러한 동요를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다수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진보정당운동의 횃불을 움켜쥔 유일한 세력으로 분투하고 있다. 스스로 단호히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진보정당운동의 명맥을 잇고 새로운 성장 기회를 모색한다는 과제가 진보신당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단지 이번 선거만이 아니라 이후 정치 과정 속에서 계속 이 운명을 짊어지고 나갈 것인가. 이것이 진보신당이 마주한 실존적 물음이다.
지금도 인터넷은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 경기도지사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는 글들로 넘쳐난다. 지지율도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지방선거에서 이 정도라면 총선, 대선에서는 어떨지 짐작할만하다. 진보정당이 현실 정치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상과 지분도 크게 낮춰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방선거 이전 몇 달처럼 진보정당의 독자성도 강조하면서 ‘반MB’ 연합에도 문을 열어놓는다는 식의 어정쩡한 태도를 계속 취할 것인가?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현실은 이미 민주노동당 식의 신념에 찬 ‘민주대연합’의 길과 고난에 찬 ‘독자 진보정당’의 길을 확연히 갈라놓았다.
한 세대의 진보 운동을 스스로 정리하는 대열에 함께 하고 싶지 않다면, 선택은 하나뿐이다. 길게 보고, 단호해져야 한다.
진보의 내포와 외연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것은 결코 ‘진보신당 고수’ 류의 자폐적인 입장으로 퇴행하자는 게 아니다. 진보신당은 ‘진보의 재구성’을 창당 정신으로 내세웠다. 진보신당은 ‘제2, 제3의 창당’을 염두에 두고 진보신당 ‘연대회의’라는 꼬리말을 당명에서 떼지 않고 있다. 진보신당은 지방선거 직전에도 ‘진보대연합’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로 이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누차 밝혔다.
이 지향에서 바뀔 것은 없다. 다만 지방선거를 계기로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까지 모호했던 ‘진보’의 내포와 외연이 이제는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이제 진보신당이 재구성하고 통합해가야 할 ‘진보’는 2012년 권력교체기를 ‘반한나라당’ 연합이 아닌 진보 정치의 독자적인 전망과 실천으로 돌파하려는 개인과 흐름, 세력을 뜻한다. 진보신당이 앞장서서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진보정당은 곧 2012년 진보 독자 대응을 지지하는 모든 세력들의 결집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민주노동당의 많은 당원들도 포함된다. 민주노동당 당원들 중에는 민주노동당의 현 지도부와 견해를 달리 하는 분들이 다수일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민주노총의 수많은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2년 진보 독자 대응에 동의한다면 모두 함께 모여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히 진보정당운동을 살리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보 운동 자체의 해체를 막고 새 출구를 열자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이러한 새로운 결집을 위한 만남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외롭지만 확신에 찬 진지가 되어야 한다. 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반MB는 이미 하나의 정당이다"
[집중분석-반MB③] '비지론' 20년 & 진보정치의 딜레마
정종권 진보신당 부대표
1. ‘독자적 진보정치론’과 ‘비판적 지지론’의 20년 대결
87년에도 그랬다. 선거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와 이들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92년에도 그랬다.
신한국당 김영삼의 당선을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 김대중을 지지해야 한다고. 그래서 전국연합은 김대중과 정책연합을 하고 지지선언을 하였다.
97년에는 좀 더 화려했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은 김종필의 자민련과도 연합하고, 재야와 시민사회는 김대중에 대해 또다시 비판적 지지를 하였다.
2002년에는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정치상품을 홍보하면서 ‘이번만큼은 지지해달라’라는 전혀 새롭지 않은 논리로 다시 비판적 지지를 사람들에게 강요하였다. 2007년에도 마찬가지 논리가, 그리고 지금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반MB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다.
오래전에 이런 글귀가 어느 술집에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 직접 경험하고 닥치는 것은 언제나 오늘이고, 오늘의 내일도 닥치면 오늘이 되기 때문이다. 우스개 소리였지만 오랫동안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비판적 지지론의 논리가 거의 이와 똑같다. 지금은 시급하고 중요하니 유력한 보수정당에게 힘을 주고, 여유가 조금 있는 내일은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힘을 보태겠다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일은 오지 않고 언제나 오늘의 논리가 지배한다.
87년부터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흐름은 이러한 비판적 지지론과 대결하고 극복해온 역사이다. 언제나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이 무엇이고 차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 독자적인 진보정치론이었다. 그렇게 민중당,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고민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독자정당론과 고립-자족주의는 달라
분명하게 하자. 독자 진보정당론이 고립주의, 자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치도 연대를 고민하고 국민여론과 흐름에도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진보정치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관점과 방향에 서서 수렴하고 실천해야 한다.
지금은 정치적 힘과 영향력이 부족하고 미약하더라도 그것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을 고민해야지, 힘과 영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진보신당은 반MB를 당연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신당의 전략은 결코 될 수 없다.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이탈리아 중 누가 우승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토론하고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우승권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지만 한국 축구를 그 정도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10년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민주노총, 민중운동의 ‘정치’와 시민운동단체의 ‘정치’가 맥락과 결이 달랐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지금 당장의 한나라당이냐 민주당이냐의 선택 틀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키우고 성장시키는 정치 전략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시민운동단체는 늘 차악의 정치를 선택해왔다. 최악이 아닌 차악을 지지하고,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는 그러기에 당연히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을 가진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게 되는 차악의 선택이라는 정치 전략을 선택해온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정치관이어야 하는가?
솔직히 하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슨 길이 올바른가?" 라는 질문이 "그 길을 유능하게 개척하고, 풍부하면서 지혜롭게 걸어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뼈아픈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2. 과연 한국형 국공합작인가?
일각에서는 반MB연대라는 이름으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이 연합한 것을 한국형 ‘국공합작’으로 논리화하기도 한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본의 침략에 맞서 거대하지만 무능한 중국국민당과 작지만 탄탄한 중국공산당이 전략적인 연합을 하고 항일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을 한나라당이라는 절대악(?)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과 나머지 소수정당이 연합한 것을 비유한 논리이다.
이것은 두가지 성격을 가진 논리이다. 하나는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이 아니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연합이 일시적 의미가 아니라 중장기적 성격을 갖는 정치 전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국공합작과 유사한 정치실험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긍정적일 수가 없다. 뚜렷하게 대중들에게 인식된 정치적 조직적 독립성, 독자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할 정도의 전투력과 물리력, 대중적 지지와 신뢰를 가진 정치지도자를 가졌던 중국공산당에 비유할 수 있는 정당이 지금 반MB연대 진영에 과연 있는가? 라고 자문했을 때, 대답은 ‘없다’이다.
반MB 연대의 비극성
최소한 국공합작을 할 당시에는 형식적으로는 국민당이 주요 보직과 역할을 맡았지만 공산당이 맡은 역할과 비중도 작지 않았고, 상당한 지역에서는 항일전쟁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다. 허수아비 공조가 아니라 실질적인 공조였고, 그 상당한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중국공산당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지방선거의 반MB연대에서 민주노동당이 대부분 민주당을 지원하는 역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명백한 ‘팩트(사실)’이다.
그래서 중국의 국공합작과 같은 정치모델을 유연하게 고민하고 선택할 수도 있다고 분명히 생각하지만, 현재의 반MB연대가 국공합작과 유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견강부회의 논리일 뿐이다.
오히려 현재의 선거연합과 유사한 것은 92년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 정책연합이라는 것을 하고, 지지를 선언한 전국연합의 사례이다. 전국연합의 입장에서는 일방적 지지가 아닌 정책연합을 통한 지지라고 보겠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92년 전국연합이 민주당과 정치연합을 한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정치집단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상 민주당 김대중후보를 지지한 수많은 지지그룹의 하나였을 뿐인 것이다. 그 역사가 지금 반복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하나의 사회단체였고, 지금은 상당한 기반과 지지도를 가진 독립적인 정당이기에 상황이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기반을 자신 스스로 허물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3. 반MB는 이미 하나의 정당이며, 반MB연대는 한국형 양당제론이다
민주노동당 시절 국회에서 의회활동을 고민할 때 다양하고 적극적인 연대를 추진했었다. 무엇인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목표를 위해 다양한 연대를 추진했다.
때로는 개혁연대라는 이름으로 열린우리당과 연대도 했었고, 때로는 야당연대라는 이름으로 한나라당과 공조를 하기도 했었고, 또 때로는 진보연대라는 이름으로 국회 바깥의 민중진영과 시민사회와 연대하기도 했었다. 그게 연대이다. 연대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대한 의견 접근이 이루어질 때 실현되고 강력해지는 것이다.
반MB연대는 말 그대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고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낙선운동이다. 그것은 당연히 한나라당을 낙선시킬 수 있는 유력정당과 유력후보에 대한 지지운동이다. 그 논리는 워낙 단순하다. 그래서 강렬하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논리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논리가 아니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든다면, 대전시장 선거에서 현재 자유선진당과 한나라당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고 민주당 후보는 한참 떨어져서 3위를 달리고 있다. 반MB의 논리이면 민주당 후보는 당선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자유선진당 후보를 지지하고 한나라당의 당선을 막는 것이 논리적 순서인데, 현실은 또 전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웃기는 논리이고 웃기는 현실이다. 그래서 진보신당이 반MB에는 찬성하지만 ‘묻지마 연대’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반MB 대안연대, 가치연대를 주장하였지만, 그 힘은 미약하였다.
웃기는 논리, 웃기는 현실
지금의 정치지형을 보면, 한나라당에도 친이, 친박세력이 있고, 민주당에도 내부에 주류, 비주류세력이 있듯이 현재 반MB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정당들은 독립적인 정당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당 내에 존재하는 계파, 의견그룹 정도의 위상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미 반MB는 하나의 정당,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이 논리와 이 흐름은 궁극적으로 한나라당과 반한나라당이라는 양당제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며, 이것은 민주노동당 등 소수정당에게는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는 독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국민참여당은 성격이 다르다. 본질적으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은 한 뿌리에서 나온 내부 분파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에서 자민당-사회당의 보수/혁신체제가 무너지는 과정과 유사하다. 자민당 내의 일부 세력과 사회당의 다수세력,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지원을 받아서 일본 민주당을 창당하고, 일본 사민당과 공산당의 혁신세력을 주변부 정당으로 전락시키고 자민당과 민주당의 보수양당제를 만들어가는 정치지형 변화과정과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보수양당제로 촉진하는 역할을 민주당의 유능한 전략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의 일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대통령이 생전에 민주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상당한 지분을 보장하더라도 함께 해야 한다, 강기갑 대표가 괜찮은 정치인 같다”는 발언을 한 것도, 그리고 이해찬 전 총리가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의원에게 상당한 애정과 관심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위의 국공합작 논리와 연계하여 본다면, 반MB는 하나의 통합된 보수야당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민주당과 소수정당이 전략적 동맹을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의 이름은 보수양당제로 붙여질 것은 명확하다.
4. 민주노총의 고뇌는 이해하나 5/13 중집결정은 역사적 퇴보이다.
민주노총의 5월 13일 중집에서는 기존에 결정하였던 정치방침, 즉 ‘진보정당의 통합과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진보정당의 후보 단일화를 촉진한다. 복수의 진보정당 후보가 출마할 경우에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 진보정당 후보를 단일화하거나 단수의 진보정당 후보일 경우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한다’는 결정을 사실상 폐기하였다.
이 방침에 새로운 심의기준을 5월 13일 회의에서 추가하였고, 그 내용은 ‘진보정당이 포함되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반MB연대 후보와 (단일화 하지 않은)진보정당의 후보가 양립한 경우, 확정된 심의기준 3항을 준용하여 민주노총 후보/지지후보로 보지 아니한다. 단 조합원은 예외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민주노동당 이상규 후보와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가 서로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양쪽 후보를 지지할 수 없는데, 이상규 후보가 노회찬 후보와 단일화를 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하였는데, 이 경우 기존 방침에 의하면 노회찬 후보가 민주노총 지지후보가 되어야 하지만 5월 13일 중집에서 결정한 새로운 심의기준을 적용하면 노회찬 후보와 한명숙 후보 중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인터넷 언론의 한 기사 구절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은 기괴한 논리가 등장한다 "... 민주노총 다른 관계자는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일신상의 사유로 사퇴한 것이 아니고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를 통해 사퇴했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노동당 후보가 살아있다고 보는 것'이라며 '서울의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민주노동당 후보와 진보신당 후보가 양립한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이상규 후보는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의식적으로 단일화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당 한명숙 후보 안에는 민주노동당 이상규 후보가 살아있다는 기괴한 논리인 것이다.
민주당 안에 민노당 있다?
논리를 더 나아가면 민주노총의 기존 방침은 이상규 후보와 노회찬 후보가 단일화하라는 것이었다. 둘이 단일화하지 않으면 지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회찬 후보와 한명숙 후보 중 지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노회찬 후보와 한명숙 후보가 단일화하라는 것을 방침으로 결정한 것과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정치방침, 즉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그리고 현 6.2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는 전술방침을 결정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대중조직, 노동조합운동의 본질이 단결에 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화 이후, 특히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의 처지가 곤란하고 어려움에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대중운동에 어려운 부담과 조건을 만드는데 진보신당도 일정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곤란한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노총의 독자 진보정당의 건설과 성장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침을 무력화시키고, 민주당이라는 보수정당 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결정을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예전에는 민주당과, 지금은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시키려는 한국노총식의 정치와 질적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대중운동이 가지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5월 13일 민주노총의 중집 결정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역사에서 중요한 퇴보이다.
5. 무엇을 다시 생각할 것인가
민주당과 연대도, 공조도, 협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할 수는 없다. 민주당 내에는 보수파도 있고, 개혁파도 있을 것이다. 같은 노무현 정부 출신이더라도 민주당에 속한 사람, 국민참여당에 속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의 차이일 뿐이다.
약간의 포지션 차이가 있더라도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진보정치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민주노동당 10년과 진보신당 2년으로 대변되는 진보정치의 독립적인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경제/노동정책을 추진하면서 사후적인 보완장치를 추진하는 것, FTA와 초국적자본, 투기자본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양극화 등 부정적 후과에 대해 일부 보완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 교육 의료 주택정책 등에서 경제적 효율성과 경쟁주의를 옹호하면서 공공성을 거론하는 것, 부동산정책과 재개발정책 등에서 자본과 이윤의 논리를 정면에서 규제하고 재구성하지 못하면서 몇가지 보완책으로 땜질하려는 것, 이것이 민주당 정치와 정책의 핵심이고 본질이다.
그러기에 그 원인에 대한 근본적 처방과 새로운 접근은 없고 일부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만 보완책을 모색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반성이 된다. 진보가 민주당과 동일하게 반MB를 외치고 실천하더라도, 왜 진보는 민주당과 운명공동체가 될 수 없는지를, 진보정치의 정책과 대안, 대한민국 개조 비전이 민주당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대중적으로 알려내는데 부족하고 미흡하였다는 점을 반성하게 된다.
진보진영 남 탓할 때 아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고 미흡하기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존재하는 여전히 대중성 있는 일부 인사들의 역량에 의존하려는 관성과 자족주의적 정치에 안주하려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기에 반성하게 된다. 당 대표단의 한 사람이기에 그 반성에서 더더욱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와는 별개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고가 있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공조하면서 사실상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훼손하고 진보정치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민주노총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역사에서 퇴행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진보적 시민사회가 사실상 민주당 지지 활동을 하고 있다는것은 현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잘되었다. 저네들은 어차피 그런 세력이었다. 저런 세력과 공조는 안하는 것이 더 낫다. 오히려 진보신당의 입지가 넓어지고 독자 발전을 할 기회가 높아졌다” “애초에 저런 세력들과 무엇인가를 해볼려는 것이 문제였고 잘못이었다”라는 발상과 생각을 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고 동의하기도 어렵다. 남 탓으로 자신의 올바름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 남 탓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진보정치의 발전과 성장을 도모하고 실천하는 것에는 그 발전과 성장에 우호적인 환경과 조건을 형성하는 실천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환경과 조건을 악화되는 것을 방관하면서 혹은 그러한 흐름에 삿대질만 한다고 해서 진보정치의 성장과 발전이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정치전략이 후퇴하고 민주노동당이 보수양당제 담론에 포섭되어가는 것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성장 발전을 가로막는 것만이 아니라 진보신당의 성장과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그들의 위기는 우리의 기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위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지방선거의 성적표가 어떠하든 이러한 환경과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것이 지방선거 이후 진보정치의 전략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2010년 6·2 지방선거가 진보정치 항해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 같다.
반MB, 무능 민주당의 썩은 동아줄
면죄부 준 민노, 진보일 필요 있나?
[집중분석-반MB②] "민주, 선거 이겨도 이명박 상대 못돼"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
지난 5월 11일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가 기자들 앞에서 한 가지 자랑을 했다. 청와대 자체 여론 조사 결과,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51.7%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5년 전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20~30%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자랑할 만한 성적이다.
청와대 조사가 아니더라도 이대통령이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다른 여론 조사 기관의 결과와 비교할 때 이론의 여지가 없다.
청와대가 자랑할 만한 수치
그런데도 지방 선거에서 이대통령을 심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임기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떨어지기는커녕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통령을 견제하자고 많은 시민들이 벼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아니, 국정 운영을 잘한다는 대통령을 심판하겠다니 불공정한 일이다.
그의 지지율로 그를 심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나라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서민들의 삶을 위기에 빠뜨린 국정의 실상과 지지율간의 괴리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즉, 야당의 역할이라는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민주당의 지리멸렬, 무능과 무기력, 정체성 상실에 관해 논해야 한다. 민주당이 MB에 맞서 싸우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이다.
우선 민주당은 반MB가 어떤 전망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제시하지 못했다. MB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대안적인 지도력, 노선, 조직이 필요한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원죄를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그 원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 듯 이명박 정권 반대에 앞장섰다. 그러나 왜 반대하고 무엇을 위해 반대하는 것인가라는, 반대 너머의 것이 없는 공허한 반대였다.
당연하게도 이 대안 없는 반대 혹은 대결은 이명박 정권을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아무런 준비도 비전도 없는 이 대결은, 이명박 정권이 간단(間斷)없이 던지는 의제를 뒤따라가며 반MB를 외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반MB로는 이명박 정권의 독단과 독주를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당이 이렇게 세월을 보내는 사이 민주당에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시민들은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져갔고 민주당에 대해 이런 실망은 ‘이명박 정권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는 체념적 지지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이대통령의 높은 국정 지지도는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당은 집권세력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해당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체념적 지지
그런 민주당이 지방선거를 홀로 치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민주당이 이같이 지방선거에서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지도 않고, 자신감도 없을 때 등장한 것이 반MB 연합론이다. 이명박을 반대하는 세력이 무조건 뭉쳐야 한다는 이 담론은 하나의 권력이 되더니 곧 야당이 준수해야 할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뭉쳐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출발했던 야당 연합논의는 뭉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론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MB 연대는 민주당 중심의 무조건 결집으로 왜곡되었다. 민주당이 집권세력을 심판하는 장에서 중심을 차지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따져 보아야 했지만, 그런 노력은 민주당 내에서도 민주당 밖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연합은 단순하게 각자의 무게를 합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창조적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의 폭발이어야 했다. 민주당이 혁신을 통해 반MB 연합을 주도하지 않았다 해도 연합의 과정을 통해 혁신의 계기를 찾았다면, 반MB연합이 단순히 반대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고, 그 때문에 진보정당과의 연대도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민주당은 조직과 노선, 정책을 재점검하고 신뢰할 만한 야당으로 거듭나고 이명박 정권에 맞설 야당의 구심으로 자리 잡는 전기를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 인사가 야당 연합을 위한 공동 정책 과제를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 것은 그 내용이 빈약할 뿐 더러 형식적인데다 최소 합의주의에 기반한 것이어서 실패한 과거를 성찰하게 하거나 혁신을 자극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대신 단일화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기능만 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야당 연합 논의 혹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이 특별히 잘해 보려 할 이유가 없었다.
민주노동당, 진보정당일 필요 있나
오히려 민주당은 제1야당이라는 기득권을 활용해 내외부의 도전으로부터 견고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선거라는 중요하고도 민감한 시점을 맞아 더욱 긴장해야 할 때 민주당이 긴장감을 잃었지만, 시민들은 그런 민주당을 관용했다.
평소 민주당에 대한 반신반의,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는 불신과 비관, 비판은 사라졌다. ‘이도 저도 안 되니 민주당이 알아서 잘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겠지만, 그런 체념은 오히려 민주당을 해방시켰다. 민주당이 변화의 압박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게다가 혁신에 실패한 민주당에 대한 정치적 승인도 이루어졌다.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민주노동당이 담당했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진보성의 구현이 아닌, 반MB의 선명성에서 찾은 나머지 민주당의 후원세력이 되어 민주당 가림막 역할을 했다.
변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민주당에게 진보의 월계관을 씌워준 민주노동당은 반MB의 단순함에 진보적 내용을 채워야 하는 진보정당의 책무를 방기한 것이다. 허약한 민주당에 긴장과 자극을 줌으로써 강한 민주당이 될 기회를 열어 주기 보다 자기 만족과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민주노동당이 반드시 진보정당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 지방선거에서 이겨도 민주당은 이대통령의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민주당이 반MB를 넘어 MB의 대안이 되려는 꿈을 접고 제1야당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당이 이겨도 이대통령 상대 안돼
선거에서 이긴다 해도 대안이 되지는 못하는 이런 이상한 불균형을 깨는 것, 이 잘못된 판을 뒤 흔드는 것, 이 것이야 말로 이명박 정권 심판의 본질이다. 그런 정치적 진보를 위해서는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의 한계를 모두 뛰어 넘어야 한다.
사실 그 것은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명박 정권 지지가 50%를 넘나든다고 하지만 잠재적 다수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일련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견제론이 안정론보다 많다.
물론 반MB로는 이 잠재적 다수를 조직할 수 없다. 지난 정부의 부정적 유산을 계승한 과거 세력과 실패한 세력의 대결로는 이 다수를 차지할 수 없다. MB와 민주당의 적대적 공존 구조를 깨지 않고는 이 다수를 얻을 수 없다.
"반MB,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집중분석-반MB①] "진보개혁세력, '진보'를 소외시키다"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1.
누군가 필자에게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라면, 진보가 배제 혹은 소외된 정치경쟁의 구도가 실현된 점을 꼽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보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내지 진보 개혁 세력 내부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속칭 ‘반MB’라고 불리는 강력한 반정부 투쟁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향후 한국정치는 미국이나 일본과 유사한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후보들의 표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문제보다 이 점을 훨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2.
권위주의 시절의 민주주의는 반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민주화는 곧 전복적인 열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민주화가 된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결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운영권을 둘러싼 다툼 내지 경쟁의 내용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 상대를 절멸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세력은 정치의 장에서 힘을 갖기 어렵게 되며, 공존을 전제로 한 경쟁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 초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던 많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만큼 혁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안티테제는 없다.
결국 민주주의가 지속될수록 점진주의적 진보파만이 살아남고 ‘관용’, ‘타인에 대한 정중함’, ‘상호성’ 등의 가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아는 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나라들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이를 벗어나는 경향을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와 혁명
이 점에서 반MB는 민주주의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 보수파들의 잘못된 열정으로 표출된 ‘반DJ’나 ‘반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인격적 모독과 인간적 무례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우리 사회 보수파가 갖는 권력 상실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내지 적대감이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적으로 별다르지 않은 반MB 담론이 진보와 개혁 세력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현직 대통령이나 보수를 존재해서는 안 될 ‘악의 축’으로 보는 태도는 권력을 상실한 개혁파나 누구보다 강한 반정부성을 자랑하고 싶은 진보진영 내부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보통의 상식을 갖는 시민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생각한다.
집권 2년 반을 지나고 있는데도 역대 정부와는 달리 현직 대통령이 급격한 지지율 하락과 같은 사태를 맞지 않고 있는 데에는, 지금 정부와 대통령이 잘해서라기보다 반대세력의 잘못과 과도함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3.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그때의 다수는 수많은 소수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보면 다수 지배는 ‘소수파들의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수를 형성하고 정치경쟁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잠재적 다수를 구성하는 내부의 이견과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견과 차이가 민주정치가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비용이나 장애가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논리적 순서를 제대로 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이견과 차이를 다루면서 광범한 대중의 에너지와 힘을 조직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의 비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치에서 이견을 다루는 방법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견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방법이다. 총화단결을 강조하고 연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견과 차이가 희생되는 게 필요하다는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견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상호 조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도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각각의 견해를 일정한 영향력으로 환산해서 거래하고 타협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협의와 토론을 통해 현재의 이견을 변화시켜 새로운 견해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조정 이후에도 기존의 이견은 그대로 존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견의 구조나 분포 자체가 달라진다는 차이가 있다.
시민 원로 사제적 권력의 반민주성
반MB 연합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악의 축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도덕주의적으로 강요되었고 따라서 협력과 연대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됨으로써 그 자체 매우 강한 이데올로기적 권력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 원로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컸다. 그들이 발휘했다고 알려진 영향력의 기초는 물론 역사적 요청을 대행하는 윤리적 명령이었다.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사제적’ 권력 행사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반MB 연합이 후보단일화의 문제로 집약되었을 때, 누가 왜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기준은 사라지고 후보가 누가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무규범적 공리주의 내지 맹목적 성과주의로 전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후보 조정의 최종 단계는 어느 후보가 더 협박 능력이 강한가를 시험하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의 부정적 결과는 반MB 연합 내부적으로는 경선이라는 민주적 후보선출 과정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외부적으로는 진보정당들을 포함한 약한 정치세력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번 선거 이후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명박 정부를 중심에 두고 김대중 정부(민주당)와 노무현 정부(국민참여당), 나아가 박정희 정부(박근혜당)라는 과거 세력들이 경합하는 구조로 퇴락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4.
반MB가 이견을 억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편으로 집권세력 대 반MB 세력 사이의 정치적 적대는 격렬하게 나타나는 반면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오히려 위축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에서는 경쟁이 참여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한국정치에서 지금의 경쟁 구도는 대중 참여를 오히려 약화시키고 언론의 영향력에 대한 의존을 높이며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독점적 지지 시장을 갖고 있는 정당들 사이의 퇴행적 다툼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선거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열정을 갖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난 주 마감된 후보등록 상황만 봐도,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새로운 정당이 더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출마자 비율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출마자 비율이 낮아진 이유
유권자는 어떨까. 중앙선관위가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투표 참여 독려 광고를 보면, 4명씩 두 번 나눠서 기표하는 선거 방식이 쉽고 편하니 이제는 ‘투표로 말하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그야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사는 선거구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8명을 선택해야 하는 이번 선거에서 필자가 놓고 고민해야 할 후보의 숫자는 23명에 이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무슨 세탁기 세제 고르듯 선택해야 할 판이다.
물론 선관위는 각각의 후보들이 만든 홍보물과 공약자료를 우편으로 보낸단다. 선거법의 규정대로 모두가 다 보낸다면 아마 그 분량은 500쪽 가까이 될 것이다. 과거 선관위가 보낸 후보 관련 우편물을 받아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그런 자료를 보고 투표 결정을 하긴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는 누군지로 모르는 후보들 이름을 놓고 장막으로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의 고독한 독백’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선거를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선거에 책임을 져야할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굳이 반MB 연합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6.2지방선거와 노동자정치의 파탄
2010.5.31 노동자전선
민주노동당 창당과 의회주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본과 정권의 공세 속에서도 투쟁하며 꾸준하게 현장을 일궈 온 노동자들은 1996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투쟁(노개투)에 나섰다. 민주노총을 건설한 지 1년 째 되는 해에 전개한 총파업은 광범한 노동자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민주노총은 투쟁할 때 대중의 지지를 획득했다.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면서 민주노조 운동의 전략목표로 세운 산업(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현장투쟁에 기초할 때만이 가능한 과제였음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상층부는 노개투 총파업의 성과를 곧바로 1997년 말 대통령선거에 출마함으로써 소진시켰다. 그리고 1998년부터 시작한 IMF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이후 민주노총은 위력적인 총파업을 전개하지 못했고 노동운동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은 민주노조운동 진영에서 많은 활동가들을 포섭해 갔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전도사가 되었고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로 포장되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진보정당 건설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민주노총 내 활동가들은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의회주의 전략에 빠져들었다. 많은 활동가들이 민주노총에서 당으로 이동했다. 민주노총에는 서서히 공동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국회의원선거에서 10석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후 너나할 것 없이 국회의원 뱃지에 대한 기대감이 넘쳐흘렀다. 이후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앞장서던 세력들도 민주노동당으로 몰려들었다. 동시에 민주노총도 자주파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2012년 집권전략까지 만들면서 한층 고무되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와 노동자정치의 실종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배타적 지지를 결정했다. 일부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만장일치로 몰아갔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통해서만이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이후 의회주의 선거 전략에 매몰되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본래적 의미는 퇴색되기 시작했다. 현장투쟁으로는 법과 제도를 바꿔낼 수 없고 따라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권력의 성격을 놓고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민주노동당 내부는 세력간 경쟁이 심화되었다. 패권주의와 종파주의가 심화되었다. 급기야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분당하였고 진보신당이 출범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을 떠나 진보신당에도 합류하지 않은 많은 활동가들도 있다. 한편 특정한 정파의 패권주의는 상설연대체인 민중연대도 파괴시켰고 진보연대를 발족시켰다. 민주노총 우파집행부는 민주노총을 진보연대에 가입시키기 위한 시도를 끊임없이 전개했다.
그러나 좌파활동가들의 반발에 부딪쳐 실패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과 함께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권의 공세로 촛불투쟁이 소강상태를 보인 하반기부터 상황은 악화되었다. 시민운동 수준에서는 이명박 자본독재정권의 탄압을 막아낼 수 없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대중투쟁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대중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조직 내 성폭력사건이 터졌고 5기 집행부는 총사퇴했다. 2009년 초 보궐집행부가 들어섰지만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투쟁조직보다는 사회연대노총을 표방하며 시민단체와의 연대에 몰두했다. 이명박 정권이 촛불이 되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광화문과 서울시청광장을 봉쇄했는데 민주노총은 경찰의 집회불허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여의도 외곽으로 밀려났고 집회와 시위조차 봉쇄당하고 말았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경찰과 평화집회협정까지 맺고 있는 실정이다. 77일간의 쌍용차 파업투쟁이나 용산철거투쟁에서 민주노총은 투쟁의 중심에 서기는 커녕 제대로 된 연대도 못했다.
반MB 선거와 민주노총 투쟁 포기
2009년 말부터 시작된 복수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투쟁은 정권과 자본의 일방적인 프로그램대로 진행되었다. 국회에서 날치기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집회를 끝내고 조합원들을 돌려보낼 정도로 바닥을 드러냈다. 정권과 자본은 법과 제도적으로 쐐기를 박아나갔고 민주노총의 투쟁은 절실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새 집행부는 첫 시험무대인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근심위)에 참가했고 한국노총에 여러 차례 뒤통수를 맞으며 정권과 자본의 야합과 날치기에 처절하게 당했다. 그러나 그 때 뿐이었다. 현장은 상층이 하는 일의 수순을 아는 듯 분노하지도 않았고 무관심했다. 한편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도 강도를 더해 갔다. 그러나 제도권 내 합법주의에만 머무른 채 대중투쟁은 방기했다.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노조를 무력화시키고 있으며 금속노조의 투쟁사업장을 민주노총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있다. 민주노총의 책임 있는 투쟁은커녕 지원 연대투쟁도 사라졌다. 현장이 알아서 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나아가 민주노총은 현장투쟁만으로는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반MB지방선거에 몰두하고 있다. 고질적인 비판적 지지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4월 28일 총파업을 천안함 사태를 빌미로 일방적으로 연기하였고 건설노조만 고립된 파업 상경집회를 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대의원대회 결정사항을 완전 무시하면서 총파업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6.2지방선거에서 반MB공동지방정부 요구까지 나아갔다. 내용적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넘어 민주당(국민참여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로 이어졌다. 국제적으로 다국적기업과 초국적 금융투기자본, 국내적으로 삼성재벌 등 재벌과 결탁해 한미FTA 등 신자유주의 정책과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편 정치세력과 연대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작년 하반기부터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이탈한 진보신당을 민주노동당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을 계속했다. 소위 진보정당 분열이 낳은 민주노총 내부분열을 방지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반MB 선거와 심상정의 유시민 지지까지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고수하면서 진보통합을 강제했다. 민주노총 조합원이라 하더라도 진보정당통합에 찬성하는 경우에만 민주노총 후보로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통합을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이 진보신당의 공동선대위원장도 맡았다. 그러나 실제는 민주노동당 중심이었다. 더욱이 반MB 선거승리를 위해 민주당(국민참여당)으로의 후보단일화를 시도했다. 수도권 민주노동당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들은 모두 사퇴했다. 그러면서 진보신당 후보들의 사퇴도 압박했다. 하기야 6.2지방선거 논의가 시작된 금년 초 야5당과 시민단체들은 반MB에 맞서기 위해 ‘5+4’선거연대기구를 만들고 단일화에 나섰다. 그러나 민주당으로의 단일화에 반대하는 진보신당은 이 기구에서 이탈했지만 지역적으로는 야5당 단일화가 진행되었다. 문제는 수도권이었다. 정부의 천안함 사건 발표 이후 보수진영이 한나라당으로 결집하면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승리가 어려움에 처하자 진보신당 반MB주장자들은 수도권 광역단체장 후보들에게 노골적으로 사퇴압력을 가했다.
며칠 전 우파집행부가 장악한 민주노총 경기본부는 실질적으로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는 정책연대를 맺었다.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의하면 심상정 진보신당후보는 엄연한 민주노총 후보였다. 진보신당과 국민참여당을 동시에 지지하는 모양새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심상정 후보 사퇴 압력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압력은 성공했다. 5월 30일(일) 진보신당 심상정은 유시민을 지지하면서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했다. 진보신당 당원들의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결과가 번복되지 않았다. 25년간의 노동운동과 10년간의 진보정치를 내세웠지만 단 한 순간에 그것을 지워버렸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서울시장 후보)는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레디앙 기사에서 진중권씨가 말했듯이 심상정은 은평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경기도지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경기도지사는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다음 총선에 국회의원으로 배지를 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얼굴을 알리는 통과의례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던가. 그렇다면 이번 사퇴는 다음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된 거래와 천박한 정치공학일 뿐이다. 거창한 "고뇌" 운운은 때 묻은 보수정치인들의 반복이다. 하기야 이번 6.2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의 행보는 ‘5+4’선거기구 참여와 탈퇴 과정에서 내적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 세력에 진보정치 헌납
그들이 말하는 선거는 진보정치의 씨앗을 뿌리는 여정이 아니라 정치공학의 줄타기를 통해 작은 권력이라도 움켜쥐고 정치판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노동자들에게 정치후원금을 모금해 달라고 손을 벌리고 표를 몰아달라고 구걸하는 수구 보수정치인들의 행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누가 진보정치세력의 대표를 하라고 한 적도 없고 또 누가 보수 자유주의자의 지지자로 변신하라고 한 적도 없으니 비난받을 일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을 팔아 진보정치 운운해 온 자들의 정치행보는 정말 역겹기 그지없다. 더 큰 문제는 진정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내팽개치고 현장과 현장노동자를 의회주의와 출세주의자들의 도구로 사용한 행위이다. 이라크 민중을 살상하는 미제국주의 이라크 침략동맹군으로 파병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반대하던 민주노총을 비롯한 파병반대 국민행동 단체를 비난하고. 의료민영화를 찬성하고, 완전 무상급식을 비난하고, 새만금과 한미FTA를 지지하고, 외환은행과 쌍용자동차를 해외투기자본에 팔아넘기는 것을 지지하고, 비정규직악법을 지지하던 유시민과 그 세력들을 민주·평화·평등·생태·교육·복지후보라고 강변하고 있다.
민주당정권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던 노동자 2,000여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 ‘잃어버린 노동운동 10년’ 동안 비정규직은 확산되었고 빈부격차는 확대되었다. 지금 OECD 통계가 말해주는 세계최장 노동시간, 최고 산재사망률, 최대 남녀임금격차, 최저 복지수준이 이명박 정권 2년 반 동안 생긴 일인지 묻고 싶다. 그들이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향해 전쟁옹호세력이며, 환경파괴세력이며, 공공성파괴세력이며, 공교육과 복지를 망치는 세력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위에 4대강, 언론장악, 방송장악, 집회 결사 자유 억압, 노동탄압을 더 강도 높게 펼치고 있을 뿐이다. 이명박 정권의 브레이크 없는 신자유주의 무한질주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민주당 정권이 10년 동안 닦아놓은 속도제한 없는 신자유주의 고속도로 덕분이다. 이런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거짓으로라도 한마디 사과 없이 이명박 정권을 파쇼로 몰면서 반MB로 표를 구걸하는 꼴이 가증스럽다. 더욱 비참한 것은 진보정치 운운하는 세력들이 그들에게 민주노조운동이나 진보정치운동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꼴이다.
껍데기를 버리고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요구된다!
춘궁기에 배(권력)가 고파 초근목피로 입에 풀칠을 하는 일이 있어도 봄에 뿌릴 씨앗까지 식량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농부의 심지다. 그런데 그 소중한 씨앗을 반민중세력의 입에 톡 털어 넣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87체제의 종말을 얘기한다. 그런 논리라면 87체제가 낳은 진보정치세력 역시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종말을 고해야 한다. 87체제의 종말을 말하는 자들의 논리는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의 종말을 원하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노동해방투쟁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전노협과 민주노총 정신을 빼앗아가겠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으니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달콤한 사탕발림은 자본이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세력의 상층에 기생하는 출세주의자나 영웅주의자들에게 말한다. 노동자 민중을 짓밟을 테니 눈감아달라는 것이다. 상층 관료들에게 떡고물을 챙겨주겠다는 것이다. 공동집권이니 공동지방정부니 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죽은 병사들의 무덤 위에서 훈장을 걸고 있는 장군들처럼 추악하다. 천안함 사건이 정부발표대로라면 도올 김용옥 교수의 말대로 적의 기습공격으로 부하들을 수장시킨 패잔병(장군)들이 계급장도 떼지 않고 나와서 기자회견을 하는 꼴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현장은 자본과 정권의 침탈로 민주노총을 이탈하고 붕괴당하고 있다. 반MB로 다시 민주당 정권이 잡으면 다 죽어가는 노조를 살려줄 것으로 믿는가? 일상 활동과 현장투쟁을 통한 노동자 정치가 아니라 오직 정당을 통한 의회주의 권력진출이나 권력쟁취만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오도하는 것이다. 급기야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모두 내팽개치면서 자본가 세력이나 보수주의자들의 품에 들어가 권력을 잡는 것까지 노동자정치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두들겨 패고 죽여도 아픈 줄 모르거나 아파도 다시 참으며 그들에게 복종하는 노예들처럼 적응하고 순응하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87체제의 진정한 의미는 노동(자)정치를 통한 노동자정치세력화와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투쟁을 통한 투쟁하는 산업(별)노조 건설이다. 노동해방을 향한 진정한 노동자 정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