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견인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심지어는 교회 생활과 사역에 깊이 관여하면서 신앙의 강한 증거를 나타내 보였다가, 후에는 믿음을 저버리고 영적으로 낙오된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 증거들은 언제나 이런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의 구원을 다시 잃을 수 있는가? 신자들에게 배교는 정말로 실재하는 위험인가?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람이 실제로 자신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약 사람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면, 그런 죄는 그의 영혼에 자리한 칭의의 은혜를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고해성사의 성례를 통해 은혜의 상태로 회복되기 전에 죽는다면, 그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인도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잃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히 6장의 경고와 “버림을 당할까”(고전 9:27)라는 바울의 염려, 그리고 사울 왕 및 다른 이들의 사례 때문에, 어떤 이들은 사람이 은해에서 완전히 최종적으로 낙오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친다. 이 교리는 때로 “영원한 안전"이라고도 불린다. 본질적으로 이 교리는 정말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한다면, 결코 그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지만, 만약 그것을 잃는다고 한다면, 그는 애초부터 그런 믿음을 결코 가전 적이 없었던 사람이 분명하다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나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전혀 영접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어떤 특정 요소에 이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 사람은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묘사된 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밝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눅 8:5~8).
이 비유는 처음에는 믿었지만 후에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아니면,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견해처럼 그 "믿었던" 자들이 사실은 거짓 또는 겉치레 믿음을 가졌던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직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이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착하고 좋은 마음”(눅 8:15)으로 말씀을 듣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믿음은 진정으로 중생한 마음에서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견인의 교리는 심지어 우리가 중생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인내하는 능력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를 보전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그리스도인이 인내하는 것은 은혜로써, 오직 은혜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친히 시작하신 일을 마치신다. 하나님은 택하심에 담긴 자신의 뜻이 결코 좌절되지 않을 것을 확증하신다.
소위 구원의 황금 사슬로 알려진 롬 8장은 이런 소망에 대해 더 증언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8:30). 바울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라고 선언한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는 그의 소유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주님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그가 시작하신 일을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모든 신자를 성령으로 인 치신다. 이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증표를 주셨고, 자신이 거래를 마치실 것을 보증하는 개인적인 보증금을 우리에게 지불하신 것이다.
확신의 마지막 근거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러나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우리가 흔들리고 넘어질 때, 우리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신다. 우리도 잠시 넘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넘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처음부터 멸망의 자식이었고, 그 믿음의 고백도 거짓이었던 유다만 빼앗겼을 뿐이다. 참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결코 빼앗기지 아니한다(요 10:27~30).
출처: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p.1997.
첫댓글 내용이 아주 훌륭합니다. 은혜롭고 읽을거리가 풍성하네요.
네,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몇 년 전 소천한 스프로울 등이 편저한 명불허전의 책입니다.
@장코뱅 네, 잘 알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설명하는 영생의 확신
https://cafe.daum.net/1107/Z4mc/54
네, 다시 잘 읽어보고 위 포스팅과 함께 시너지 효과가 나네요^^
@노베 공감에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들에 대한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한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들이 영원 전에(선택을 통해), 과거 역사 속에서(구속을 통해), 현재에(효력 있는 부르심, 칭의, 성화를 통해), 미래에(영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향유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표현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고 연합되는 일은 성령이 효력 있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부르시고(유효적 소명)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붙들어(성도의 견인)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실 때 발생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소위 구원의 서정과 같은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참 믿음은, 주관적 신앙고백이나 지적인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화(聖化)하고 성도의 견인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화와 성도의 견인은 믿음이 진실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골2: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성도의 견인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가 머리(그리스도)를 붙들고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는 것입니다.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의 참 믿음은, 없어지거나 언제나 똑같이 정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자라납니다. 성도들 각자의 모양에 따라 속도와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자라나고 성장합니다. 그 결정적 원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합된 몸(참 교회)의 일부가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믿음을 증명하고 성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장코뱅 아멘!
@장코뱅 아멘22
예수를 믿는 믿음은 무조건 만능이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성경의 일부만을 뽑아내 강조하며 긍정적 사고방식을 설파하는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선인견과 주입식 교육으로 배웠는데, 왜? 벧전4:18 말씀은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고 왜? 겁을 주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실까요? 그 ‘왜?’를 알려면 벧전4:18이 있는 문단(벧전4:12∼19)과 베드로전서 앞부분(벧전1:6∼7)도 훑어보아야 합니다. 명목상∙외견상 구원을 받은 자 같이 보일지라도, 신자는 믿음의 확실성을 시험 받고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벧전1: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진실하고 확실한 믿음은 시험(test)을 목적으로 불에 노출시키는 연단(불 시험)을 견디어냅니다. 그런 믿음만이 주님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데요. 성도의 견인(堅忍)과 천로역정을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됩니다.
벧전4:12∼19) 전체를 훑어보면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내세의 천국은 영생복락의 기쁨만이 있겠지만) 이 땅의 현세에서는 참 성도에게 오히려 불같은 시험이 오거나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불 시험을 당하며 믿음을 증명하는 성도의 견인(堅忍)있어야 하는 것을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구원파나 신비주의 기복종교가 말하는 것과 같이 구원받은 자에게 쉬운 길만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 참 성도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흔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불 시험(painful trial)을 당할 때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넘어지고 타락할 것이며 의인으로 가장하거나 스스로 착각한 위선자도 불 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다가 쓰러지고 패망할 것입니다. 자신의 주관으로 구원을 결정한 자기 신념, 소속한 조직이 승인한 구원 같은 것은 애시당초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원동력은 사람이나 조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코뱅 네, 다시 읽고 매우 공감합니다.
고전1: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1:6의 견고하게 되는 것은 성도'가' 견인(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하는 것입니다. 굳센 믿음으로 인내한다는 것을 한자로 표현하여 견인(堅忍)이라 합니다. 견인차가 고장 난 차를 견인해 가는 그 견인(牽引)이 아닙니다.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 결국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가 되며 이것이 영화입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전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성도는 죄와 투쟁하며 점진적 성화의 길을 걸으며 성도의 견인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영화의 단계에 이르는데 영화의 상태는 책망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고전1:8)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영화 또는 완전히 거룩한 상태(완전 성화)는 현세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가능합니다.
영화를 기준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완벽히 증명되는 시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성도의 견인을 하는 것인데요. 혹시라도, 이것이 많이 지루하고 답답하십니까? 미래를 보면 견인이고 인내하는 것이지만 과거를 보면 이미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는 후회나 번복이 없습니다(롬11:29). 그러므로 지루하거나 불안하거나 답답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이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28).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장코뱅 아멘!
@장코뱅 아멘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