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들이(2)
둘째 날에 중앙박물관에 간 것은 지인의 연락을 받고 ‘세한도’의 특별 전시회를 보기 위함이었다. 몇 해 전에 소장자가 국가에 기증한 세계적인 보물로 이번에 다섯 번째 일반 공개한다고 하였다. 이 땅에서 맨 처음으로 일반 공개를 하던 지난 1986년엔가 당시 중앙청 자리에 있었던 박물관에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을 하였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는 「완당」이 그의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정성에 감복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 천하의 명작을 선물로 받은 「이상적」은 연경으로 가져가 청나라의 명사들이 보는 앞에서 ‘세한도’를 내보이니 모두가 격찬을 아끼지 않으며 제(題)와 찬(贊)을 시와 문장으로 썼다. 이것이 소위 ‘세한도’에 두루마리처럼 붙어있는 청유 십육가(淸儒 十六家)의 제찬이다.
여러 사연 끝에 일본인 학자인 「후지츠카」로 부터 ‘세한도’를 찾아온 분은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 수집가였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선생이다. 이 작품을 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등이 ‘세한도’의 감격적인 귀환을 칭송하는 글을 추가로 썼다.
‘세한도’는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고,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사실 그런 형태의 둥근 창을 낸 집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발문을 해서체(楷書體)로 썼는데 글씨의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그 글의 논리는 시문(詩文)의 대가답게 밀물처럼 도도하고, 그 비유는 드넓은 학자답게 고증으로 감싸여 있다. 또한 글의 내용에는 「완당」의 제작과정에 서린 처연한 그의 심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세한도’라는 화제(畵題) 글씨와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는 낙관도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준다. 「우선」이 추가했다는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의 낙관도 격을 높이는 역할에 충실하다.
필자가 ‘세한도’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78년 무렵으로 당시 ‘두보시(杜甫詩)’의 국내 최고권위자였던 동국대의 「이병주(李丙疇)」교수의 글을 읽은 후였다. 벼락에 맞아 가지가 부러진 노송은 「완당」 자신이고, 세 그루의 잣나무는 각각 제자인 추금(秋琴) 강위(姜瑋), 소치(小癡) 허련(許鍊),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라고 소개하였다.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문장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한 일이 있다. 즉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비로소 송백나무가 더디게 조락(凋落)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문장에 대한 해석문제였다. 여기서 송백(松柏)을 놓고 소나무는 별 문제가 없으나 백(柏)은 측백나무도 되고 잣나무도 되는 것이다.
작년 가을에 조선의 동기창(董其昌:명나라의 서예 및 문인화의 대가)이라 불리는 「석정 이정직」선생의 유품전시회가 있었던 ‘추사박물관’에서 만났던 성균관대의 「임형택」 교수에게도 질의하였다. 지금은 공자는 그 시대의 늘 푸른 측백나무를 일컬은 것이고, 「완당」은 우리 주변에서 소나무와 쉽게 비견되는 잣나무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보다 「완당」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소치」,「고람(古藍) 전기(田琦)」와 같은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고차원의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였다. 특히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를 탄생시켜 이 풍조가 일세를 풍미했는데 이를 후대 사람들은 ‘완당바람’이라 부른다.
여하튼 우리나라를 벗어나 이제는 세계적인 보물이 된 ‘세한도’를 다시 만나 매우 기쁜 마음이 들었다. 소장자가 국가에 기증했으니 그 정성은 어느 애국지사의 충정 못지않은 고귀한 일이다. 생전에 다시 만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어서 인사동으로 직행하여 ‘아내의 친구 그림 전시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물론 사전에 ‘누드전’이라는 것은 안내문을 보고 알았지만 실제로 막상 대하고보니 선뜻 가까이 하기가 겸연쩍은 일 이었다. 일부의 인물화와 정물화를 빼고는 온통 누드 작품이었다. 반갑게 작가를 소개받았지만 설명을 듣기엔 미안한 일이라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 나중에 커피를 마시면서 일부 궁금증을 해소하였다. 작가는 영문과 출신의 작가로 14년 째 그림을 그려와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다고 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다른 장르에 비해 인물화를 그리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들어 왔었다. 전공도 아닌 작가의 솜씨가 빼어나 프로 작가다운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서양의 유명한 화가를 보면 하나같이 특정 인물의 묘사에 뛰어나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 역시 초상화를 그리는데 빼어난 재주를 보였다. 지난 번 ‘운림산방’에서 만났던 「허소치」 역시 「완당」 등의 인물화를 그렸는데 엄청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김시습」의 ‘초상화’나 「윤두서」의 ‘자화상’ 그리고 역대 조선 왕조 임금들의 어진(御眞)들도 하나같이 인물화에 탁월한 서양화가를 능가하는 빼어난 솜씨임에 틀림없다.
파리에 네 차례 갔는데 그때마다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다. 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수작들이 전시 된 곳이다. 사실 사전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그림을 보다가 한 작품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흘낏흘낏 바라보고 지나쳤다. 바로 여자의 은밀한 곳을 정밀하게 묘사한 「쿠르베」의 그림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세상의 기원 L' origine du monde』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누드는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있다. 모델의 얼굴이 없이 특정부위를 강조하여 금단의 열매를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관음증을 만족시켜 주는 그림이다. 어느 누구도 이 작품 앞에서는 오래 감상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서양인마저 그러할 진데 윤리도덕으로 무장한 한국인으로서 어찌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았겠는가.
서양에서도 여인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겨우 신화 혹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로만 그렸다. 중세에 비너스의 그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유명하다. 이런 금기를 깬 사람은 『옷 벗은 마야』를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이다. 노골적으로 몸을 노출한 여인의 자세와 도전적인 눈동자 등의 표현이 외설과 신성모독의 논란까지 일으켰다.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이나 『올랭피아』 역시 누드화의 압권으로 평가받는다. 세상에 첫 선을 보이자 발가벗고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그림 속 모델을 비난하면서도 관객들은 「마네」의 그림 앞에만 몰려들었다고 한다.
연이어 이틀 동안에 매우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 더구나 일부 지인들도 감상할 수 있도록 전화로 연락을 해주니 잘 보았다는 인사에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가까운 곳에 좋은 시설이 있으니 평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일이다. 육체의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 더욱 값진 일이라는 생각이다. 어린이날에 박물관을 비롯한 시설을 찾아가는 나들이도 좋겠는데, 이는 우선적으로 해당 젊은 부모가 판단할 일이다.
(2024.5.5.작성/5.22.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