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再遊伽倻山 (다시 가야산에서 노닐며)
古 寺 曾 遊 已 十 秋 (고사증유이십추) 옛 절에서 쉬어 간지 어언 10년 지났는데
寒 齋 獨 坐 思 悠 悠 (한재독좌사유유) 초라한 집에 혼자 앉아 깊은 생각 잠기네
故 山 春 色 渾 如 舊 (고산춘색혼여구) 봄 맞은 산 풍경은 옛날과 다름 없으련만
回 首 龜 城 雙 涕 流 (회수구성쌍체류) 구성을 바라 보면서 두 눈에 눈물 흐르네
<어 휘>
曾 遊 : 전에 놀러 온 적이 있음
十 秋 : 열 번째 가을 곧 십년
寒 齋 : 초라한 집, 싸늘하게 추운 집
悠 悠 : 1) 근심하는 모양 2) 끝이 없는 모양 3)여유가 있는 모양
龜 城 : 지명 이름으로 지금의 경북 김천 지례면(知禮面)의 옛 이름이며, 시인의 조부께서 이곳 현감을
지내다 별세한 고장이다.
<지은 이>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자는 希元 (희원), 호는 沙溪 (사계), 본관은 光山(광산), 시호는 文元이다.
1548년 7월 8일, 서울 皇華坊(황화방) 貞陵洞(정릉동)에서 태어났고, 11세에 모친께서 별세하다.
13세 龜峯(구봉) 宋翼弼(송익필)에게 四子와「近思錄」 등을 배웠고, 19세에 첨지 중추부사 曺大乾의 딸
昌寧曺氏(창녕조씨)와 혼인하다.
20세 栗谷(율곡) 李珥(이이)에게 受業(수업)하고, 土亭(토정) 李之菡(이지함) 을 保寧(보령) 에서 찾아
뵙다. 31세 이조판서 李後白(이후백)의 천거로 昌陵參奉(참봉)에 제수되었고, 33세 5월 坡山(파산)으로
牛溪 (우계) 成渾(성혼)을 찾아뵙고, 龜峯(구봉)先生에게 편지를 올려 人心道心을 논하다.
34세 가을, 宗系辨誣奏請使(종계변무주청사)인 부친 黃岡公(황강공)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어 敦寧府
(돈녕부) 參奉(참봉)으로 고쳐 제수되다. 35세 4월 부친과 함께 귀국한 후 얼마 뒤에 부친상을 당하다.
36세 龜峯과 편지로 喪禮(상례)를 논하다. ⌜喪禮備要/상례비요」를 완성하였으며, 栗谷 선생께 祖父의
碣銘(갈명)을 청하다. 이듬 해 1월, 栗谷(율곡) 先生을 哭(곡)하였으며, 6월에 服을 마치고 順陵(순릉)
參奉(참봉)에 제수되고, 이어서 平市署 (평시서) 奉事(봉사)로 승진하다.
39세 봄, 李潑(이발) 등이 栗谷, 牛溪, 鄭澈(정철) 등을 무함하자 벼슬을 그만 두었으며, 이 해 4월에는
부인상을 당하다. 44세 아들 集(집)이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다. 윤3월, 定山 縣監(현감)에 제수되다.
부임 길에 坡山으로 牛溪(우계)를 방문하다. 이듬 해 차남 集(집)이 좌의정 兪泓 (유홍)의 딸 杞溪 兪氏
(기계유씨)와 혼인, 5월에는 長子 櫽(은)과 子婦 隱城朴氏 (은성박씨)가 倭賊(왜적)에 해를 당한 소식을
듣다.
50세 봄, 명을 받고 湖南에서 糧餉(양향/군량)을 조달하다. 12월 丹陽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를
않고, 栗谷(율곡) 先生의 行狀을 짓다. 이듬 해 4월, 軍資監(군자감) 僉正(첨정)과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
으나 나아가지 않다. 6월에 牛溪 先生의 죽음을 곡하고, 가을 <近思錄釋疑/근사록석의>를 완성, 9월에
南陽府使(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빠른 승진이라 하여 論遞(논체/논의 끝에 교체)되다.
52세 1월, 楊根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2월, 翊衛司(익위사) 翊衛(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6월, 安城 郡守에 제수되다. 9월, 「家禮輯覽/가례집람」을 완성하다. 이듬 해 여름, 韓嶠
(한교)가 편집한 「小學續編/ 소학속편」의 序文을 짓다. 金宇顒(김우옹)과 癸未 三司 및 己丑獄事(기축
옥사)에 대하여 논하다. 54세 1월, 〈小學集註跋/소학집주발⌟을 짓다. 9월, 소명 받고 서울로 가다. 10월에
宗親府(종친부) 典籤(전첨)에 제수되다.
59세 宗廟(종묘) 중건시 古禮에 관해 申欽(신흠)이 묻자 편지로 답하다. 黃愼(황신) 이 찾아 와서 松江에
대해 논하다. 이듬해 崔命龍(최명룡)에게 답하여 理氣(이기)에 대해 변론하다. 63세 10월, 鐵原(철원)府使
로 옮겨 제수되다. 66세 5월, 庶弟(서제)들이 癸丑獄事(계축옥사)에 연루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連山으로
돌아가다.
70세 鄭弘溟(정홍명)의 청으로 松江行錄(송강행록)을 짓다. 3월에는 宋爾昌(송이창)과 함께 永同 (영동)
地方을 유람하다. 71세 「經書辨疑/경서변의」를 완성하다. 鄭逑(정구)가 退溪(퇴계)의 喪祭禮問答(상제례
문답)을 간행하며 古禮를 물으니 편지로 답하다. 76세 1월, 四端七情辨(사단칠정변)을 짓다. 3월, 장령에
제수되고, 5월 私廟 親祭(사묘친제) 時祝文 (시축문)의 稱號(칭호)에 대하여 상소, 6월에는 성균관 사업에
제수되어 元子를 輔導(보도)하다.
77세 2월, 李适(이괄)의 亂으로 公州로 피난 온 임금을 日新驛 (일신역)에서 맞이하고, 3월에는 경연에
입시, 상의원 정에 제수되고 司業(사업)을 겸하고,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6월에 사직소와 함께 13條(조)의
사항을 진달하다. 李廷龜(이정구), 吳允謙(오윤겸) 등과 私親追崇(사친추숭)과 典禮(전례)에 대해 논의하고
이 때 논의한 往復書(왕복서)등을 묶어 「典禮問答」이라 하다. 8월, 特命으로 通政大夫(통정대부) 공조참의
로 승진, 10월에 元子講學官(원자강학관)을 겸하다.
78세 특명으로 嘉善大夫(가선대부)가 되고,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다. 同門인 鄭曄(정엽),
沈宗直(심종직), 柳舜翼 (유순익) 등과 함께 龜峯(구봉) 宋翼弼(송익필)의 伸寃 (신원/억울함을 해소함)을
위하여 상소하다. 80세 1월,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자 兩湖號召使(양호호소사)가 되다. 2월, 公州
에서 世子를 맞이하고, 3월에 江華島의 行在所에 나아가다.
81세 9월, 형조 참판에 제수되다. 이듬 해 9월, 鄭曄(정엽)의 「近思錄釋疑/근사록석의」의 序文을 짓다.
83세 가을, 門人 宋時烈(송시열)과 格致(격치), 四七등을 논하고, 〈讀書講義序/독서강의서〉를 짓다.
84세 張維(장유)에게 편지하여 私親追崇(사친추숭)을 반대하다. 8월에 별세하다.
공은 일찍이 구봉, 율곡, 우계 등의 명현들에게 배웠으며, 그 학통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유학 특히 예법과
관련된 예학(禮學)의 제 1인자로 존경받는다. 공은 84세로 장수하였고, 남들이 은퇴할 시기에도 활발하게
국사에 참여하였으나, 그 학문과 인품 그리고 명망에 비하여 벼슬은 걸맞지 않게 품계가 높지 못함이 애석
하다.
공의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 같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그 명성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르도록 혁혁하
였다. 어려서는 모친을 여의고, 장남 부부가 임진왜란으로 함께 죽음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부인이
공의 나이 39세에 먼저 별세하는 등 가정사가 순탄치 못하였으나, 둘째 아들이 공의 뒤를 이어 학문과 명망
으로 일세에 떨쳐 부자(父子)가 나란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어 선비들 사회에서는 절대적인 선망의
대상이 된 분 이기도 하다.
오늘의 소개한 시는 공이 가야산을 찾아서 노닐다가 주변 풍경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읊은 시다.
산빛은 전과 다름없이 여전하지만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감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조부께서 이 지역과
가까운 구성(龜城)이라는 고을의 현감으로 재임 중 별세하였기에 자신의 선조를 추모하는 애절한 마음을
마지막 구절에서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