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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전투(龍仁戰鬪)는 1592년 6월5일 벌어지는 전투이다.
호남 의병들은 전주성과 남원성에 각각 5만씩 집결해 있었다.
전라 충청 순안어사겸 전라 순찰사, 전라 관찰사 이광은 한양을 점령하러 올라오는 왜군의
북상을 막으라는 선조의 명령에 남원성의 병력을 전주성으로 이동시킨 다음 도합 10만을 이끌고 북상한다.
북상하면서 충청 의병 2만을 끌어모아 북상하는데 그 길이만도 8십리에 걸쳐 늘어져 있었다.
오합지졸처럼 북상했는데, 이것은 이광이 전력 집중화 전략을 고수하여
군세가 많은 것을 내세워 싸우지 않고 이겨 보려는 전략이었다.
류성룡은 이 광경을 " 마치 봄놀이 소풍같았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 사이에 왜군이 호남을 도모하였다면 무혈입성할 뻔하였다.
왜군은 경기 광주에서 용인, 수원을 포위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광은 다시 전력 집중화 전략으로 모두 모인 다음에 군세가 많은 것을 내세워 이겨 보려 하였는데,
전라 방어사 곽영의 선봉대 조방장 백광언, 돌격장 이지시 등이 명령을 어기고
수지면 광교산 등으로 나가 모두 모이기 전에, 첫 전투에 들어가 왜군의 조총 사격에 패하자,
모여있는 의병들이 처음듣는 조총 소리에 놀라 모두 퇴각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왜군은 경기광주에서 왜군의 척후 선봉대 와키자카 수군 1천6백여 명이 수지면으로 들어와서
본대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진로의 왜군은 에버랜드에서 모현을 거쳐 김량장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부터 산발적으로 흩어져 퇴각하면서 전주성과 남원성에 5만씩 다시 배치하게 된다.
뒤에서 각각 지역대표 의병장의 지휘아래 북상하던 의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하였다.
경기 광주에서 용인으로 왜군 본진이 한발 먼저 들어왔다면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이 사이에 왜군이 호남으로 들어왔다면 호남은 무혈입성되고도 남았다.
전주에서는 주기학파 전주 부윤 남언경과 고경명이 조선 최초로 임란 창의군을 결성했던
유팽로 등과함께 호남에서 집결하는 의병들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농민군이라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광과 곽영은 호남으로 후퇴한다.
와키자카군은 수군 (1천6백여 명)이라 본군이 오기 전까지 싸울 의사가 없었는데
전라방어사 이광의 조방장 백광언, 선봉장 이지시 등이 수군이라는 약점을 알아채고 본군에서 이탈하여
선봉부대를 이끌고 선제공격하였다가 조총사격에 패하고 만다.
선봉부대 일부만 패한 것이 용인 전투다.
본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퇴각하는 전투였다.
남원의 형대원은 곡성 의병들과함께 남원성에서부터, 선조 어가호송과
한양 방어 (용인전투)출정을 거부하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같은 불만을 품고있었던 순창의 조인은 전주 인근 향교 (한옥지구)로 들어오자 형대원과함께
호남 방어를 내세우며 왜 호남인이 선조 어가 호송을 해야 하느냐며 객기를 부렸고,
전주성과 남원성을 지켜야한다며 한양 방어 출병을 반대하며 난동을 일으켰다.
1천여 명의 난동은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에게 웅치 아래에서 진압되어 조인, 형대원은 참수당하고 말았다.
결국 조인, 형대원 말대로 된 것이었다.
[선조 어가를 호송하여 호성공신으로 남아 권력을 장악해 놨더라면 정유재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음]
전라 병마절도사 [종2품] 최원은 1592년 4월 13일 개전 초기 1천기의 기병을 이끌고
여산으로 올라가는 왜군의 척후 선봉연대를 최초로 격파하는 장수이다.
그 다음이 청주성을 점령하려던 왜군 척후 선봉부대가 조헌, 영규대사에 의해서 격파되었다.
그러므로 대전투는 아니지만, 여산전투가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관군 승전 전투는 최원의 기마전 승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 7월 8일 이치 전투 이후, 조헌, 영규대사의 본격적인 청주성 전투는
1592년 9월초 6일에 벌어지고 12일날 모두 전사했다는 장계가 올라온다.
1592년 7월 7일 전주성으로 들어온
조헌, 영규대사는 고경명 명령을 어기고 이치로 출정했다가 고경명 병력 6천이 패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부지런히 싸워야 했다.
[이광, 고경명, 권율은 전주성에서 수성전으로 결판을 내려고 했음]
7월 8일 웅치 전선으로 이동하여 왜군 200명을 사살하고 9월 6일 청주성을 수성하고 산화한다.
(선조실록)
(척후 선봉부대는 본군이 진군할 때 양측면으로 나가 북상하면서 본군을 엄호하는 여단급 이상
또는 연대급 부대를 말함)
1만 명을 이끌고있었던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사령관은 용인 전투에서 광주 목사 권율,
담양 부사 (정3품) 김천일 등과함께 수원 행고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의 북상을 막아 내려다가
쉽게 격파당하고 만다.
용인에서 패전하자 사기를 잃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밀려난다.
그후 최원은 김천일과함께 권율의 조언으로 강화도로 들어가 왜 수군의 한강 입성을 막는
유격전을 벌여 한양을 방어하는 큰 성과를 올린다.
강화도에 있었던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이 이끄는 1만 대군이 1592년 10월에 선거이로 임시 교체되어
최원이 병력 8천을 행주산성으로 보내 주는 것이고 선거이는 전주성에서 6천을 이끌고
한양 탈환을 위해 시흥으로 전진배치했다가 우희다수가[우끼다 히데이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군
3만명은 최원의 전라도 병마절도사군이 명나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선제공격하기 위하여
행주로 집결한 조선군을 치기 위해 한양에서 출병하자, 선거이는 시흥에서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1593.3.14 행주대첩)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병력 8천은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와 수원 부사 김천일의 설득으로
내주게 되는 것이다.
광주목사 권율은 1593년 2월이 되어서야 전라 관찰사로 오른다.
도순찰사 전라 관찰사 권율은 군행정권을 가지고 지휘소에서 지휘하는 관료이고,
조선 주력군을 가진 전라 병마절도사는 군령권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군을 움직이며
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이다.
용인전투에서 총사령관 이광의 명령을 어긴 선봉부대가 수지면과 김량장리로 들어오는 왜군과
접전을 벌여주는 바람에 오히려 대몰살을 피하게 된 것이다.
호남 의병은 다시 남하하여 호남을 지켜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조총에 대해서 모두 인식하기 시작하고 높은 고지와 강둑을 사이에 두고
진지를 구축하여 침공에 대비하게 된다.
1593년 전라 관찰사로 오른 권율과 사수부대를 가지고 있었던 호남 창의사겸 수원 부사 김천일은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의 1천 승병과 합류하여, 강화도에서 한강 방어를 마치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고, 최원은 병력을 권율과 나눠 전주성으로 2천을 이끌고 돌아와
최경회와함께 영덕, 영해까지 화약이 떨어진 왜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장수이다.
영덕에서 왜군 200여 명을 사로잡고 돌아와서 강등된 직급에서 상호군[정3품]으로 다시 승진하고,
최원, 황진, 최경회는 거창, 고제, 지레 사랑암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최경회는 남원 부사에 이어
영덕, 영해 부사(정3품)에 오른다. (선조실록 26년. 1593년 3월 19일)
최경회는 울산까지 화약이 떨어진 왜군을 추격하여 울산전투에서도 승리하고 개선한다.
최원이 너무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강화도에서 탈영을 막기 위해 1년여 간 주둔하며
병력을 유지시키느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호남 병력을 권율이 전라 관찰사로 오른후
행주산성 (1593년 3월 14일 대첩)으로 들어간다.
이때 전주성에서 6천을 이끌고 수원에서 주둔하고 있었던 선거이가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가 되어
한양을 점령하려고 시흥으로 병력을 전진 배치하였다가 연합작전을 벌이기 위해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강화도에 있던 최원은 수원 부사겸 창의사 김천일과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의 설득으로
군관, 종사관들과 자원병력 8천여 명을 선거이에게 내어 준다.
주기학파 최원은 1580년부터 전라 병마절도사를 11년 넘게 하고 있었던 백전노장이었다.
1천여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최초로 왜군 선봉부대를 격파한 인물이다.
최원은 조인, 형대원을 진압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호남인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첫 전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전라 병마 절도사 최원의 공적은 이치 전투에서 영덕, 영해 전투까지 참여하고도 너무 저평가되었다.
이치 전투시 광주 목사 권율은 실권 자체가 없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치 제1차 전투의 사령관은 5만 의병을 거느린 고경명 창의사겸 부사였다. (종 2품)
이치 제2차 전투는 황진이 주도하여 금산에서부터 상주 전투까지 마무리하여 전주 부윤을 거쳐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오른다.
황진 병력은 전주성에서 모집한 의병이 주축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전라, 충청 2도총사였던
이광에 의해 충청 병마절도사의 조방장 직위로 조선 주력군이었기 때문에
전라도 절제사 권율이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결코 아니었다.
전라도 절제사로는 최고 직급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권율 한명으로 처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최원은 강화도에서 1만 군세를 행주대첩이 벌어지기까지 유지시킨 조선에서 유일한 장수였고,
최원 병력으로 행주대첩을 치루기 때문에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용인과 수원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모두 패하고 남하하여 전주성, 남원성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왜군은 보급품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 배후 안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호남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1592년 7월 7일 진안 웅치 (곰티재/모래재)에서 왜군은 웅치를 우회하여 진안 장승면에서
신촌리 웅치 전적지를 거쳐 화심, 소양면으로 돌아 나온다.
완주 용진면 안골포 전투와 전주 인후동 안골 전투는 천변을 사이에 두고 벌인 전투이다.
웅치 제2방어선 주장 나주 판관 이복남이 웅치에서 철수하면서 안골포 전투를 치루고
황진이 용인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인후동 안골에서 강둑을 사이에 두고 적 선봉 장수를
활로 사살하면서 반격전이 벌어진다.
그당시에는 아중리 저수지가 없어서 고려병원 앞을 지나 전주역 방향으로 큰 천이 흐르고 있었다.
왜군의 화약이 떨어진 틈을 이용하여
최원 전라 병마절도사 [1593년 3월 진안 죽도 죽산성, 성주봉 성주성 전투 참가vs 후쿠시마 왜군 제6군],
황진, 최경회, 이복남 등 이치, 웅치 승리 의병들이 진안, 무주, 장수, 상주, 거창, 성주, 합천, 고령,
영덕, 영해, 울산루트와 창녕, 진주성 살천까지 쫓아가 김시민의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
남원성에서 지원온 임계영, 민여운(태인) 등의 부대와 합류하여
살천에서 2천 사수부대로 왜군을 격파한 후 적 후방을 들이쳐 진주성을 구원한다.
왜군은 대군이 들이치는줄 알고 퇴각해 버린다.
사건 정황상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은
왜군이 개전 초기 전주성을 그냥 지나치고 나아가자 척후를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자 했을 것이다.
왜군이 금산 이치에서 여산방향으로 나아가자,
첩보를 입수하고 1천 기병을 이끌고 출병하여 왜군 선봉부대를 격퇴하였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판단된다. (1천 기병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
1592년 개전 초기 동인 주리학파 정권 시기에 황해도 출병 거부로 좌천되었다가
1593년 영덕, 영해 전투에서 승리하여 상호군 [정3품]으로 승진한 이후 여주 목사로 갔다가
여주에서 하급관원을 발로 차서 사간원의 탄핵을 받은후, 1596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97년 왜군이 천안 직산까지 북상하자, 훈련도감 후위대장에 임명되어 도성 방어에 들어간다.
최원은 조인, 형대원을 진압한 일로 최초로 여산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그의 임란 공적은
평가절하되었다.
이일은 1585년 여진족 니탕개의 잔당들이 쳐들어 올 때 이순신을 버리고 도망간 장수였다.
그래서 녹둔도에서 조산보 만호, 녹도 만호(종 4품/대령과 준장 사이의 직급) 이순신 혼자
여진족을 막으며 싸워야만 하였다.
패전 책임을 이순신에게 덮어 씌워 이순신이 좌천되어
1586년 니탕개의 잔당 소탕작전에 백의종군하였다.
그런 이순신을 1587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발탁하여 이광의 조방장(정 3품~종 3품)으로 활동한다.
그 후 중앙 요직인 선전관(정3품~종7품), 비변사에서 복무하다가
1591년 2월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된다.
1592년 2월 정읍 현감을 마치고 비변사로부터 보직 변경되어 고사리 첨사, 만포 첨사,
진도 군수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4월 이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다.
정읍 태인에서 주기학파 이항이 김천일 등 다수의 제자들을 길러 내었다.
정읍에서 이순신이 주기학파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치, 웅치, 슬치 전투의 관군 최고 사령관은 전라 충청 순안어사겸 전라 순찰사
이광이 지휘한 것이고, 용인 전투 패전으로 바로 권율로 바로 교체된 것이 아니다.
이치,웅치,슬치 전투의 승전장은 고경명 (이치), 정담, 황박 (웅치), 양대박 (슬치)의 공적이다.
의병 최고 사령관은 고경명 창의사 (종 2품 예우)였다.
그당시 전라 감영은 전주이고 지휘권도 없는 일개 지방의 광주 목사가 어떻게 이치, 웅치,
슬치 전투의 지휘권을 가지고 전투를 지휘하겠느냐 이말이다.
광주 목사 권율은 1592년 7월 8일 이치고개 전투 이후 나중에 1592년 10월 도순찰사,
1593년 2월에 전라 관찰사로 제수되어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최원의 전라 병마절도사 군
1만 병력 중에서 8천을 인수하여 행주산성으로 김천일 1천 사수부대, 1천의 처영 승병과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이치, 웅치, 슬치 전투시 도절제사라 하여도 절제사 [종3품]병력은 향토 방위군 사단급에
해당하기 때문에 최고 지휘관은 여전히 전주 감영 감사겸 전라 관찰사, 전라 충청 순안어사 [정 2품],
전라 도순찰사를 책임지고 있는 이광이었다.
도절제사 [종 2품]는 전주 부윤 휘하의 도사 병력[대대급]을 인계받아, 절제사 (지방 방위군/종3품),
첨절제사 병력(해안 방위군/종3품)을 임시로 지휘하는 직책이다. [전주진,경주진 절제사만 정3품]
정2품 순안어사가 행정, 민간 인력 동원 권한을 가지고 있고, 도순찰사 [정 2품]는
군사 인력, 군수물자 징발권한을 가지고 있다. [순찰사는 종 2품]
이치전투 현장 지휘권은 의병 총사령관 고경명 창의사였고,
웅치 현장 지휘관은 김제군수 정담(종 3품.제3차 방어선 주장)이었으며,
슬치 전투 현장 지휘관은 양대박 부창의사였다. (전라도만 군수 이상부터 한품계 우대 받음)
(그래서 전시가 되면 군수급은 전쟁 참여시 자동으로 장군 반열로 들어감).
총사령관 이광도 관군 지휘권자라 공적에 오르지 못하는데 이치, 웅치, 슬치 전투의 공적이
어떻게 해서 광주 목사 권율의 공적이 되느냐 이말이다.
전라도 절제사는 향토 예비군에 해당하며 전라 충청 순안어사, 전라 도순찰사, 전라 관찰사 이광이
조선 주력 육군으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총사령관이다.
관군의 공적으로 쳐야한다면 이치, 웅치, 슬치 전투의 공적은 이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광의 직급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율로 처리하는 것은 아주 큰 실례가 된다.
황진은 조선 주력 육군 충청 병마절도사가 되기 전의 조방장으로 이광의 휘하 장수였다.
더군다나 이광은 그당시 전라 감영 감사까지 겸하고 있었다.
(광주는 감영 없이 목사가 다스리는 목만있었음)
조선 선조시대까지 감사 직급도 전라 감사가 다른 지역 감사보다 한등급 높은 직급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용인 전투가 조선 최악의 패배였다며 주장하는 자체가 넌센스다.
(전라 감사는 정2품 정헌대부, 전주 부윤은 정 3품이지만 종 2품 가선대부,
정3품 통정대부 직급을 더받아 한품계 위임)
행정, 군대 체제 역시 전라도는 호남의 곡창지대로 평시에도 한등급 높은 계급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라 순안어사, 전라 순찰사, 전라 병마절도사, 전라 절제사, 전라 방어사, 목사, 부윤, 군수급까지
전라도는 한등급 높은 품계로 배치되었는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
중도 방어사만 한품계 높은 정 3품으로 전라도 방어사와 동품계였다.(기타 지역은 종 3품)
정3품 목사직에 가선대부이면 가선대부 1품계를 더해 종2품 예우를 받게 된다.
그래서 종2품 관직을 바로 이어받아 전시에도 권한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전라 충청 순안어사, 전라 감사, 전라 순찰사 이광은 전시 총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황진이 선전관 출신인데 용인 전투에서 광주목사 권율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선전관은 왕명을 등뒤에 업고 내려오는 무관 중의 무관으로 선전관 명령에 불복하면
직급이 높은 자라도 현장에서 참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내려온다.
명령 거부시에는 가족들까지 체포되어 다치기 때문에 선전관의 힘은 최강이었다.(정3품~종7품)
1592년 7월 7일 이치, 웅치, 슬치 전투중 고경명과함께 이치 제1차 전투에 참여한
광주 목사 권율 보고 1592년 10월 전라 순찰사, 1593년 2월 전라 관찰사로 올랐기 때문에
권율의 공적이라 한다면 이순신이 승전한 전투도 전라도 관할이니 권율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치 제2차 전투는 황진이 주도하여 금산에서 상주까지 왜군을 몰아내는 전투였다.
이 승전으로 황진은 전주 부윤직과 중앙요직 병조참의 [정 3품]를 제수받은 뒤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오르게 된다.
황진의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력은 모두 전주성에 집결했던 호남 의병중에서 차출된 병력이었다.
[동인 주리학파 (1597년 칠천량 해전 패전으로 남인으로 분열하는 류성룡계파)가
전주 부윤직을 막으려고 사간원을 장악하고 탄핵하며 갖은 수단을 동원했었음].
도절제사 병력은 조선 주력 본군 절도사 [연대급]아래급 지방군인 정3품~종3품 절제사,
종3품 첨절제사 (해안 방위군)가 이끄는 병력만을 지휘할 권한을 갖는다.
종2품 도절제사 병력은 부윤 [정 3품/시장]휘하인 도사 [종 5품]아래 무관 몇몇이 농사를 병행하는
현지 지역인을 관리하며, 부역민을 징발하여 현지인을 토대로 구성되는 향토 예비군이다.
도절제사 권한으로 조선 주력 육군 본군인 도병마절도사 [종2품 군단급], 좌우 병마절도사 [사단급],
절도사 [연대급] 병력을 지휘할 권한이 없었다.
도병마절도사 군은 육군 본군으로 직업군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마군까지 거느리고 있는 조선 주력군이고,도절제사 군은 사단급으로 지역 고정 병력이며
농사병행병으로 의병이 채워주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군대이다.
도절제사는 원래 없는 직책으로 전시에 비변사에서 임시로 파견하여
현지 부윤(전주시장)의 휘하인 도사가 가지고 있는 군대를 임시 지휘소에서 지휘하는 군대를 말한다.
전라도 전주진, 경상좌도 경주진, 제주도에만 있는 직책이었고
주로 수군(수군 절제사, 첨절제사)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
첨절제사 [종 3품]는 적이 침투하기 쉬운 해안 요충지에 성을 쌓고 성안에서 수성하는 절제사를 말한다.
왜 이치, 웅치, 슬치 전투의 주인공이 누가 되어야하는 지를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치의 고경명 창의사겸 부사, 웅치의 정담 김제 군수,
황박 장군 (이치 제1차 방어선 주력 장수/장군 출신/김제),
슬치의 양대박 부창의사가 주인공이되어야한다.
이치전투가 이치와 이치고개 두개의 전투 중, 권율은 그 다른 하나 이치고개 전투만을 맡은 것이다.
6.5일 용인 전투 패전 이후 7월7일 호남 의병들이 전주성과 남원성에 각각 5만 명씩
집결해 있는 상황에서 해안을 모두 비워놓고 임시 도절제사 휘하인 수군 절제사,
첨절제사 (해안 방위군)를 소환할수있는 전략적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전주진의 절제사, 도사(종5품)병력만을 가지고 이치고개 전투에서 전투를 치룬 것이다.
(개전 초기에 해안을 모두 비워 놓고 소환해서 이치 사령관으로 싸웠다는 주장이
애초에 말도 안되는 소리이고 전주성에서 이광, 곽영 (왕족 부마), 고경명, 권율, 남언경, 유팽로,
양대박 등 최고위직들이 모여 회의한 결정으로 이광에의해 고경명이 의병사령관 창의사로 결정되어
조헌,영규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임.
원래 조헌, 영규가 명령을 어기고 출정한 것을 만류하기 위해 후발부대로 6천 의병을 출병시켰다가
이치전투가 벌어지는 것임).
5만 명중 6천 의병을 이치 전투에 투입한 의병사령관 고경명이 이치 현장 전투 사령관이었고
조헌, 영규대사를 구원하다 소조총융경(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 이끄는 1만5천여 명의
왜군 제6군에 800여 명만 살아남고 창의사 고경명(종2품)이 전사하였다.
이 당시 전라도를 책임지고있는 최원 전라 병마절도사가 이끄는 1만 대군은 강화도에서
군탈영을 막는다는 명분을 대고 평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한 황해도 출병을 거부하며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치, 웅치, 슬치 전투가 바로 끝난 것이 아니라 1593년 3월까지 무주, 진안, 장수 일대에서
난타전을 벌인다.
용인 전투는 애초에 호남 관의병 10만이 호남 방어를 위해 싸울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조총 소리를 듣고 전주성, 남원성으로 퇴각하는 전투이며 동인 주리학파 정권시기였기에
조정에는 패전으로 장계를 올린 전투이다.
조인, 형대원의 난동으로 한양 방어 및 선조 어가호송 반대 명분을 찾다가
왜군의 조총 사격에 놀라 퇴각하는 전투였다.
[싸우는 방법론을 두고 일으킨 난동이기 때문에 반란 성격은 아님]
가장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전 1591년 2월에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는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릇쳤다며 정치공작을 벌여 강계, 강진, 강릉(명주)등으로 유배를 보내
권력을 장악하고 비변사, 선전관 요직 등 호남인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가
고향지방 한직으로 직급 강등되어 좌천되는 상태에서 개전 초기 1592년 4월 13일부터
평양 몽진지에서 선조는 왜군 침공책임, 개전 초기 패전책임, 수도 함락책임을 물어
6월12일 동인 정권에서 서인 정권으로 교체한다.
이때부터 동인 정권이 들어서는 1593년 10월 27 [한양 환도 사흘후]까지 연전연승을 한다.
한양 환도 사흘후 1593년 10월 27일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 등은 정철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게 하는 정치공작을 벌여 선조의 미움을 사서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동인 정권으로 다시 교체되자, 연전연패하며 강화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용인 전투가 벌어지는 시기는 동인정권
이치, 웅치, 슬치, 이치 제2차 전투가 벌어지는 시기는 서인정권.
1593년 3월 행주대첩이 벌어지는 시기도 서인정권 시기였다.
동인 정권 시기에는 패전의 연속이었고 서인 정권 시기에는 항상 승전하는
임진왜란사였다는 사실이다.
동인 정권 시기에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북상을 황해도로 나가 막으라는 명령에 불복한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이 강화도에서 움직이지 않은 이유를 잘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서인 정권 때는 나가서 항상 승리하지만 동인 정권 때는 항상 패배하는 임진왜란사였다.
동인이 권력을 장악했으면 동인 병력을 내세워서 싸워야 하는데 싸울 병력이 서인 병력과
호남 관의병, 남인 수군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서인 병력, 동인 병력은 선조를 보호하기 위해 임진강 이북과 평양 이북에 있었고
전투는 서인 중 호남 주기학파 관의병과 남인 수군만이 전투를 치룬다.
이광은 1593년 2월 전라 관찰사에서 파직되자 한양 탈환작전에 백의종군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당하였다
p/s
백과사전에 올라있는
용인 전투에서 아주 잘못된 기록을 보니 황당함을 느끼게 한다.
순변사 (종 2품) 이일 경상 우도방어사 조경 (종 3품)은 1592년 4월 20일 경 800여 명을 이끌고
상주 전투에서 패해 이일 순변사는 신립이 있는 탄금대로 도주하고 이일을 따르는 무과 급제자 군관들과
사병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와해되어 버렸다.
양광도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이일은 1585년 여진족 니탕개의 잔당들이 쳐들어 올 때
이순신을 버리고 도망간 장수였다.
그래서 함경도 경흥 조산보 만호 이순신이 녹둔도로 출정하여
녹도만호 (종 4품/절도사와 같은 대령급이지만 그지방 관민의 부역과 세수까지 관리함/
대령과 준장사이의 직급)을 겸해, 혼자서 여진족을 막으며 싸워야만 하였다.
패전 책임을 이순신에게 덮어 씌워 이순신이 좌천되어 1586년 니탕개의 잔당 소탕작전에
백의종군하였다가, 1587년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이광의 조방장(정3품~종3품)으로 활동한다.
그 후 선전관(정3품~종7품)으로 보내 중앙 요직에서 복무하다가
1591년2월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된다.
1592년 3월 정읍 현감을 마치고 비변사로부터 보직 변경되어 고사리 첨사, 만포첨사, 진도 군수를 거쳐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다.
정읍 태인에는 주기학파의 정신적 계승자 중의 한명인 이항이 살고 있었다.
이항의 제자 중에는 남언경, 김천일 등 호남에서 집결한 다수의 주기학파 제자들이
이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주기학파의 영향을 받지 못하였을 수도 있었다.
주기학파는 근대 이성철학을 깨우쳐 "이성주의""경험주의""현실주의""합리주의"
사상철학을 배운 학파였다.
주기학파는 주자학 내에 있는 도교적인 학문인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을 퇴출시켜
근대화시키려던 세력이었고,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동인 주리학파 등은 고수하려던 학파였다.
광해군 때 정권을 잡았던 대북 정권은 도교 학문인 노자의 도교철학, 장차철학,
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 신봉학파였기 때문에, 정치적 보복이 무서워 주기학파 40여 명이
현실주의를 내세워 일시 협력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200여 명이 유배갈 때 유배지에서 심장이 타들어 가는 시기를 보내며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지구에서 가장 먼저 근대 이성철학을 완성하여 개화할 수 있는 선조 시기에 왜군의 침공을 받은 것이다.
사회 이성철학인 기대승의 주정설과 주기론적 상호 통제론.
종교 이성철학인 이이의 주기론적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으로 근대 이성철학을 완성하였으나,
십자가를 목에 건 고니시의 침공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제1차로 사라진다.
주기학파가 대북 정권의 등장으로 제2차로 위축되고
양광도 서인 인조반정으로 제3차로 쇠퇴하고 유배되어 조선의 근대화가 완전 사라져 버리고 만다.ㅠ,ㅠ
이일은 4월 26일 신립이있는 충주 탄금대로 도망갔다가 전투에서 패하자, 임진강으로 도망쳐
5월17일 동인 도원수 김명원이 이끄는 임진강 전투에 합류해서도 다시 패하였다.
경상 우도방어사 조경은 가벼운 부상을 입고 가평으로 달아나는 장수이다.
가평에서도 흩어졌던 병력을 모아 왜군을 대적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가 왜군이 와서
총포를 쏘아대자, 변응성과함께 도망쳐 가평 군민들이 왜군에 대거 희생되게 만들었다.
면책을 피하기 위해 선조 어가를 호송하여 살아남아 호성공신에도 올라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입지적인 인물이다.
정기룡은 조경 휘하에서 종 8품 봉사 직책으로 출전하였다.
경상 우도방어사 조경 병력은 흩어져 가평으로 도망가서 완전 와해되어 있었으며,
경상도 관찰사 김수 (종 2품)는 5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 등이 단행한 비변사, 선전관 요직에서
호남 출신을 좌천시킬 때 김경로는 김해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김수의 조방장으로 출전하여
개전 초기 지리멸멸하고 있었다.
조경병력 군관 몇몇이 김수 휘하로 들어간다.
동래 부사 송상현 (정읍)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정기룡은 조경이 가평으로 도망가자, 경상도에 남아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인물이다.
1592년 7월 7일이후 진주성에서 전라 좌의병 부장겸 사천 현감 장윤이 이끄는 300 병력과
고령 성리학자 김면을 따라 고령 의병을 모집한 다음, 거창으로가서 의병 800명을 모집할 때
처음으로 300명을 배정받아 상주 전투에 투입된다.
이 전투는 6월 4~5일 용인 전투 이후 7월 7일 이치, 웅치, 슬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격퇴시키는 전쟁이다.
1592년 6월 4일 오산 독성산성에서 경상도 관찰사 김수를 따라 진을 치고 왜군을
공격했다는 것도 신뢰할 수가 없다.
병력이 있어야 공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관군이나 의병들은 자기 지역대표가 아니면 절대 명령을 듣지 않았다.
충청도 관군을 지휘했다는 말인지,경기도 의병을 지휘해서 공격했다는 말인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방어사병력은 자기 지역 방어를 우선시 해야하고 흩어진 병력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더군다나 방어사 병력은 특수 병력으로 방어진지를 수시로 이동하며
해당 작전구역을 방어해야 하는 병력이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들어가는 병력이므로 방어사 병력이 패하면
군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전라 병마절도사 사령관 최원 (종 2품), 광주 목사 권율 (광주 목사만 종 2품),
김천일 담양 부사 (정 3품)등은 수원 행고산성에 진을 쳤다.
(목사는 정 3품 계급이지만 광주 목사만 종 2품임. 무관이 목사를 맡으면 종3품/
전라도 방어사, 중도 방어사만 정 3품/그외 지역의 방어사는 종 3품.
방어사는 자기 병력을 가지고 독자적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음)
이 당시 호남 의병사령관 고경명 창의사(종2품예우)는 전주성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백과사전 "전투 과정"내용을 보면
군사전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라 충청 순안어사겸 전라 순찰사 전라 관찰사 이광이 관군으로서는 최고 지휘권자이고
총사령관인데, 무슨 군율을 어겼다는 것인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광주 목사 권율, 김천일 담양 부사 등은 전주성에서 부터 출발하여
특별 사수부대를 이끌고 수원 행고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라 병마절도사 [군단급] 최원은 좌, 우 병마절도사 [사단급], 절도사 [연대급]가
직속 휘하 병력이고 목사 병력, 부사 및 의병 병력을 거느린 사령관이었다.
[선조 시기에 광주 인구가 전주 감영 인구보다 많아지기 시작하여 송사 문제로 불평이 많아져
감영을 옮겨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옮기지 못하고 광주 목사에게 종 2 품직을 주어
광주목에서도 상급 항소 및 항고 송사 문제를 직접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직급을 올려주는 것임.
서열 순위는 전라도 관찰사 [행정권]> 전라 병마절도사 [조선 주력군/군령권]> 광주 목사순임
[지방방위 예비군/임시 군령권/도절제사]].
총사령관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정3품) 곽영(왕족)과함께 본군을 지휘하는 장수였다.
광주 목사 권율은 수원 행고산성에서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들어가 있었고,
이광, 곽영 병력은 용인 에버랜드에서 용인 시내 김량장리로 들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
전력 집중화 전략으로 많은 수로 왜군에게 위협을 가해 세력 과시를 통해
왜군을 막아보려 하고 있었다.
호남 의병은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말한대로 "봄놀이 소풍가듯이"
8십리 (40키로) (조선은 조선 후기에 10리에 5키로 축적 사용/
일본은 키가 작아 10리에 4키로로 축적 사용함)에 걸쳐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한곳에 모이게 하여 대군이 있는 것 처럼 해서
왜군이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호남 의병들은 각각 자기 지역대표 의병장 지휘 아래 산발적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조인 ,형대원의 난동을 겪은 터라 싸울 의지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호남으로 들어오려는 왜군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은 그당시 의병들은 모두 알고 있는 전황이었다.
그런데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부장 조방장 백광언과 백광언의 선봉장 이지시가 명령을 어기고
선봉대 병력을 이끌고 왜군을 선제공격하다가 왜군의 집중 조총사격으로 전사하며 패하고 만다.
처음듣는 왜군의 조총 소리에 놀라 이광의 전력 집중화 전략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아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흩어져 퇴각하기시작하는 것이다.
한곳에 모두 모이기도 전에 조총 소리를 듣게 해서 질겁을 하니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략을 바꾸어 산개해서 퇴각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전주성으로 남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뒤에서 올라오던 의병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남하하였다.
당연히 왜군은 에버랜드 방향에서 공격해오고 조선 의병군은 안성 방향에서 올라오다가
다시 안성 방향으로 퇴각하여 남하하면서 전주성으로 들어간다.
독자적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전라방어사 곽영 병력의 휘하 부장들이 선제공격했다가
패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왜군의 조총 무기를 알게되어 퇴각하는 것이다.
이당시 왜군 본군은 용인 북쪽 광주에서 용인 수지면 광교산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곽영의 조방장 백광언, 선봉장 이지시 등이 선제공격해주지 않았더라면 몰살을 당할 뻔하였다.
(사단급 안으로 연합공격을 하기 위해 들어온 공수부대 여단 병력이 명령을 무시하고
선제공격한 격으로 꼭 군율을 어겼다고만 볼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사단장이 독자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공수 여단장을 처벌할 권한이 없는 이치와 같다.
사단급이 군영을 함부로 옮기면 명령위반이지만, 방어사 병력은 적 이동상황을 봐가면서
필요에따라 군영을 수시로 옮겨가면서 해당 지역 진지를 방어하는 병력이다.)
백과사전에서는 조선군 3만 2천여 명이 전사했다고 나오는데,이것은 완전 날조라고 단언한다.
만약 실제로 3만2천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면 이치, 웅치, 슬치 전투에서는
싸울 병력이 없어 단연코 패하고 말았을 것이며 전주성은 무혈입성 당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주성의 이광, 고경명은 틀림없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7월 7일 웅치, 이치(7,8),슬치 전투시
전주성 안에서 수성전으로 대처했을 것이었다.
결코 3만 2천여 명이 왜군에게 희생된 적이 없었다.
호남군은 첫 선봉대가 패하자 전주성으로 들어와 남원성에서 지원온 병력을 그대로
남원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배치시킨다.
(1593년 6월 진주 제2차 전투에 남원성 병력 절반을 빼내어 2만7천 명을 진주성으로
들어가게 해서 왜군이 최대로 동원한 10만 명을 상대한다.)
용인으로 향하면서 충청도 2~3만 명을 이끌고갔다고 하지만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호남 의병은 확실한 정황증거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왜군의 호남 공격을 모두 막아냈기 때문이고,
이치, 웅치, 슬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무주, 진안, 장수, 상주, 거창, 성주, 영덕, 울산, 함안,
진주성 살천전투, 진주성 제1차 전투까지 파죽지세로 화약이 떨어진 왜군 제6군
소조총융경(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복도정측(후쿠시마 마사노리),안국사혜원(안코쿠지 에케이)군을 추격하며
섬멸하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1593년에는 진안 죽산성, 성주봉 성주성에 갇혀 있다가 포위를 뚫고 빠져 나가려던
왜군 제6군 후쿠시마 군대를 최경회가 후쿠시마를 상대하는 사이에 최원,황진이
죽산성과 성주봉의 성주성을 탈환하였고, 진안 동향면 성산리로 달아다던 왜군이 성산전투에서
격파당한데 이어 거창 사랑암으로 달아나 쉬고 있던 왜군을 격파하며, 영덕,영해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 포로 2백여 명을잡아 개선한다.
최경회 남원부사 병력은 울산까지 추격하여 울산 전투를 치루고 개선하며
영덕,영해부사 직함을 받는다.
또한 한양방어와 선조어가 호송반대를 주장했던 조인,형대원의 난동 기록까지 존재한다.
무주 설천에서 왜군들이 하도 설쳐댄다고 해서 "설천"이라는 말이 붙었고,
무주, 진안, 장수에는 이치, 웅치, 슬치에서 패주하는 왜군과 관의병들이 뒤섞여서
난타전을 벌였기 때문에 "무풍지대"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무주, 진안, 장수에 왜군이 득실거려 하도 많아서 왜군들이 "무진장 많다"라는 말이
현재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도깨비처럼 모여있을 때 "무진장 많다"라고 사용되어지고 있다.
웅치 전투에서 패한 왜군 소조 총융경과 안국사 혜원이 표지석을 세워
"조 조선국 충간의담"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김제 군수 정담, 김제, 전주 의병장 황박의 용맹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퇴각한다.
(일제시대 때 일제는 정담과 황박 의사당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황폐화시켰다.
황박은 니탕개의 난을 토벌하는 주역이었으며 1591년 2월 동인정권이 들어서고 선전관,비변사 요직을
동인으로 채우고 서인을 고향지방과 남인지역으로 좌천시키자 유일하게
김제로 낙향을 해버리는 장수였다.)
왜군 제6군 후쿠시마 군대를 진안 죽도 성주봉에 1593년 3월까지 포위하여 가둬놓고 있었다.
여기에서 최경회가 후쿠시마를 활로 사살하고 언월도를 획득한다.
한쌍 중 반쪽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후쿠시마군은 죽도 죽산성과 성주봉 성주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일부가 진안군 동향면 성산리로
달아나다 성산 전투에서 대패당하고 거창 지레 사랑암으로 달아나고 만다.
화약이 떨어진 왜군은 최원, 최경회, 황진이 이끄는 관의병들의 화살밥이나 다름없었다.
풍신수길이 유일하게 남강에서 최경회와 서예원의 시체를 찾아 일본으로 가져가는 이유이다.
서예원을 김시민으로 착각하여 가져간다.
장수급으로 유일하게 일본으로 수급을 가져가는 것으로 봐서 김천일, 최경회 ,황진, 정담, 황박,
김시민,장윤,이복남, 김경로, 오응정, 신호, 고득뢰, 송대창, 변사정, 임계영, 민여운, 최억남, 이원춘,
왕득인 등의 활약이 조선 육군,의병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전과를 올렸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무진장에서는 야간에 왜군들과 조우했을 때 머리채를 잡아 상투가 잡히면 아군이고,
안잡히면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무주 진안 장수에서 무풍대첩을 치루고나서 무풍지대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행하게 된 말이었다.
3만 2천 명이 죽었으면 전주성에 무혈입성했을 것이고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사실상 완결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사기가 떨어져 어느 누구도 싸우려 들지 않는다는 것은 기본상식일 것이다.
웅치방어에 나섰던 정담, 황박, 황진, 이복남,고득뢰 등 호남 선전관 출신들이 전면에 나서고
한성에서 비변사 참모조직인 비변랑과 호남 선전관 출신들이 모두 좌천되어 승리로 이끌게 된다.
이들이 모두 용인 전투에서 패전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이치, 웅치, 슬치에서 승리하여
진안산성 탈환 전투를 시작으로 후쿠시마 군을 죽도 죽산성과 성주봉에 1593년 3월까지 가둬놓고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금산 전투, 무주 설천, 무풍 전투를 시작으로 해서
대대적인 반격전을 벌인다.
이치에서 조헌, 영규대사 병력의 첫 전투 개시를 시작으로 해서 고경명이 조헌, 영규를 구원하기 위해
측면 지원했다가 6천 의병이 대패하여 큰 희생을 치루게 된다.
소조 총융경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 이끄는 1만5천여 명의 왜군도 타격이 커서
화약이 떨어져 퇴각하는 틈을 이용하여 대패시켜 가는 것이다.
상주 전투, 성주군 성주성 전투, 고령군 개령 전투, 창녕군 성산 전투, 함안 수군 전투,
진주성 제1차 전투, 살수/살천 전투를 치루며 진주성이 함락되기전 최경회, 임계영[남원],
민여운 [태인] 2천부대가 적후방을 들이쳐 구원한다.
(1592년 7.7일 이후 8월 성주성 전투, 9월 상주성 전투,진주성 살천 및 구원전투)
이후 1593년 3월 진안 죽도 죽산성, 성주봉 성주성에서 달아나던 왜군 잔당들은
거창 지레 사랑암에서 최원,최경회에게 대패한데 이어 영덕, 영해에서 마무리된다.
최원이 200여명을 포로로 잡고 돌아와 강등되었다가 정 3품 상호군으로 다시 승진한다.
최경회 남원 부사는 영덕, 영해 부사를 겸하게 된다.
(직함만 받고 보고는 아전을 통해 남원에서 받는 것을 말함)
선전관은 20여 명 남짓되었는데 무과 급제자 교육훈련, 왕의 호위시위, 군사 전략연구, 왕명전달 등을
맡아보던 부서였으나,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선전관청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선전관은 왕명을 전달하기도 하며 거부시에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가족까지 처벌받게 만드는 요직이었다.
결코 용인 전투에서 3만2천 명이 전사했다거나 5만이 죽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음을 밝힌다.
어떻게든지 호남 관의병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선전하여 사기를 꺾어보려는 식민사학에 치를 떨 뿐이다.
호남인 전공은 다른 지역 출신들에게 전공을 다 가져가게 만들어 놓는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져야만 할 것이다.
이런 잘못된 역사왜곡은 오로지 왜군이 호남 관의병에게만 패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기학파의 본 고장인 호남은 적지않은 관의병들이 근대 이성철학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주기학파의 성리학은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를 밑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이다.
또한 인간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상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p/s
조선에서 유일하게 1만 대군을 유지시킨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은 조선에서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비변사와 선조는 최원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하였다.
최원은 북상하는 왜군을 황해도로 나가 막으라는 명령에 불복하였다.
[선조 평양 몽진지 ,동인정권 시기]
강화도를 이탈할 경우 탈영병들이 속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인 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비변사에서는 반란을 우려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하다가,
김천일 수원 부사겸 창의사,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로 하여금 설득시켜
1593년 전라 관찰사(종2품)로 오른 권율에게 병력 8할을 내주어 행주산성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권율이 무슨 수로 호남 관의병을 이끌 수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동 권씨에 강화도 출신인 외부인이 와서 백날 외쳐봐야 호남 현지관료나 의병장들의
도움없이는 관의병을 이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김천일 담양 부사겸 의병장이 고경명 사후 종 2품에 해당하는 호남 의병총대장 창의사겸
수원 부사였기 때문에, 행주대첩은 김천일 대첩이라고 불리워져도 무방하다,
(김천일은 주기학파 이항의 대표적인 제자)
모두 호남 관의병과 김천일을 따르는 의병들이었기 때문이다.
1591년 전라 수군절도사, 1592년 전라 병마절도사 출신이었던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보성)가 시흥에서 6천 병력 중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관군을 승전장으로하면 선거이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가야 한다.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 이후 선거이는 전라 수군절도사로 공식 임명되어 호남으로 내려가
1593년 6월 21일 진주 제2차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함안 전투에서 왜 수군을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과 함께 물리쳐 함안을 수성하는 장수이다.
1592년7월7일 벌어지는 이치 전투, 웅치 전투, 슬치 전투에서 광주 목사,전라 절제사 권율은
실권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게 용맹했다면 정유재란시 왜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 전투를 피해
임진왜란 때 왜군이 휩쓸고 지나간 대구 팔공산으로 주둔지를 옮겼겠는가?
도원수가 그것도 모르면 안되는 전시 상황이었다.
조선, 명 vs 왜군의 강화 실패 후 왜군이 호남을 도모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있는 전황이었다.
남원의 변사정 의병장은
임진왜란 당시 1593년 6월 진주 제2차 전투가 막 끝난 직후, 하동에서 살아나온 최억남,
해남 방답 첨절제사 고득뢰 등의 관의병들을 거두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전투에 패해 도망간
도원수 권율과 관의병들을 모두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진주 2차 전투는 모두 2만 7천의 호남 관의병들이 남원성에서 진주성으로 이동하여
왜군 10만 명과 싸운 가장 큰 전투였다.
모든 것은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유일하게 호남 공략에만 실패하였다.
호남 관의병들은 왜군 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이 봐줘서 지켜낸 것이 아니다.
이순신이 아무리 남해안을 수군으로 잘 지킨다고 호남이 지켜지겠는가?
조선 호남 육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호남 동부전선에서 왜군 본군과의 전투에서 당당하게
승리한 원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호남 방어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선조시기 1591년 2월까지만 하더라도 호남 출신들이 비변사의 중간직 핵심 요직인 비변랑과
선전관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는 1591년 2월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릇쳤다는 상소가
빗발치게 만드는 정치공작을 벌여, 강진, 강계, 강릉(명주) 등으로 유배를 보내 정권을 독차지하고
호남 출신 군인들과 선전관들을 직급을 강등시켜 호남에서 김해지방에 이르는 지역으로
모두 좌천시키며 지방 한직으로 몰아내는 인사조치를 단행한다.
[호남 동부지방 출신은 김해, 부산지방으로 까지 좌천된다. 송상현,김경로,이종인..]
비변사 요직과 선전관을 지내고 있던 이순신도 강등되어 정읍 현감 (종 6품)으로 좌천되기에 이르른다.
이순신은 서인 주기학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서인을 고향지방으로 직급 강등시키며
정읍 현감으로 좌천시켰으므로 조부 이백록 또는 현조부가 정읍 출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니탕개의 난에 참여했던 정담은 김제 군수, 웅치 제1방어선 주장 황박은 낙향해버리고
황진은 동복 현감, 이복남은 나주. 전라 병마절도사/전라 수군절도사 선거이, 해남 방답 첨절제사
고득뢰..등의 대부분의 문무관들은 주기학파 이항의 제자들로 직급 강등당하며 좌천되었다.
이순신은 한성부에 태어나 용인 수지면 심곡리를 거쳐 아산에서 성장한 인물이고
권율은 강화도 출신이다.
조선왕조는 호남에서 출시된 정권이고 호남지방에만 유일하게 모든 관직이 한등급 위의
품계를 지닌 직책을 가지고 중간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외부인이 와서
호남인을 맘대로 지휘하고 그랬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니 기가막힐 따름이다.
[호남 주기학파 문관, 무관 제자들이 중간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
호남인이 잘해서 호남지방을 수성하고 왜군이 유일하게 호남지방만 공략에 실패하였던 전쟁이었다.
유일하게 이순신만 주기학파의 영향을 받아 수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 [중구 인현동] 남인 지역에서 출생한 인물이기 때문에
조상이 전라도 남해안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조부 이백록이 기호사림파 조광조의 개혁파에 가담하였다가 기묘사화로 제거되자 용인 수지면 심곡리로
들어가서 은둔 생활을 하고, 부친 이정은 아산으로 옮겨 아산에서 성장하게 된다.
서울로 진출하면 당파 형성을 위해 자기 출신 지역으로 가서 자리잡는게 오랜 관행이었다.
중종 시기 조광조의 기묘사화 당시에 기호사림파는 당파 형성 초기시대라 잘 몰랐기 때문에
남쪽에서 올라갔으니 남인(정신적 기조는 나주~부산/기타 지역은 비주류) 중에도 호남인이있으니
서인에 속하는 줄로 알고 중구 인현동 남인 지역에 그냥 자리잡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기학파는 기호사림파 후신으로 탄생한다]
이순신은 조부가 남인 지역에 자리잡았지만 서인 기호사림파에 가담하였고
정읍으로 7품계 강등당하며 좌천될 때는 서인에서 동인 주리학파 세력으로 권력이 교체되어
죄가없이 좌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리학적 예의상 원래 출신지였던 조부 또는
현조부의 고향으로 좌천당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으며 유교적 질서는 현조부까지 제사에 모시고
현조부의 본향과 관향을 제향하는 유교적 질서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았을 때-현조학생 부군신위) (벼슬을 했을때-현조 000/관직명/성씨 이름 부군신위)
-자식으로부터 6대조. (그래서 지방을 쓸때 고조,증조,조부모,부모 앞에 현조부가 맨앞에 붙는 것임)
현조부에 제향하는 유교적 관습은 고조, 증조, 조부모, 부모, 나, 자식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옮겨 살았을 때 현조부를 기준으로 삼아 그사람의 출신 이력과 승진, 좌천, 제사, 학파, 당파색,
정치적 성향 등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제사를 지낼 때도 현조부가 살았던 관향을 기준으로
제향하며 절을 하거나 묵도하고 출정한다.
[이순신의 부인 방수진은 전남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이라고 서간첩(書簡帖)에서 밝혀졌다고 함.
이순신은 육군에서 시작했고, 조부 이백록이 주기학파의 전신 기호사림파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성 이남 남인 출신이라기 보다는 서인 주기학파(태인의 이항)로 활동했으므로
정읍 출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음.
서인 이광이 나주 이남의 남인을 전라 감영의 군권과 군수 및 전략 전술 담당 핵심참모인 조방장으로
일부러 발탁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임].
이순신은 서인중 근대식 개혁학파인 주기학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전라관찰사 이광은 이순신이 무직으로 있을때 조방장으로 발탁하여
서인 주기학파로 활동하다가 이광에 의해 다시 선전관, 비변사 요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호남 출신들이 호남지방으로 5~7품계 직급 강등당하며 좌천될 때 같이 좌천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전라 좌수사를 맡으면서 1597년 정유재란 부산 출병 거부로 옥고를 치루고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남서인화가 된다. [수군은 그당시나 지금이나 누구나 가기 싫어했음]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사실상 호남과 왜군과의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