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반송 효자마을 하리마을
영양 천씨 입향조 천찬석 피난 정착한 마을
하리마을은 석대를 기점으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리(下里, 아랫마을)라 불렀다. 하리마을은 최근에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지금의 반송1동 일대 지역이다. 이 마을에 정착한 영양 천씨는 임란(1592년) 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나라 장수 화산군 충장공 천만리 장군의 후손들이다. 병자호란(1636년) 때 조선에 귀화한 명군의 후손을 잡아들이라는 명령 때문에 동래 석대로 피난하여 온 천찬석은 하리마을의 입향조이다. 하리마을에 정착한 천찬석은 광주부윤, 안악군수, 황주목사 등의 화려했던 시절을 잊고 깊은 산골 이곳의 촌부가 되어 손수 기와를 구워 집을 지었다. 그곳은 이팝나무(수령 500년)가 서 있는 천찬석의 12대손이 살았던 영양 천씨 종택(반송1동 455번지)이다. 370년 동안 몇 번 중수되었는지 몰라도 1,443평에 안채, 사랑채, 별채, 마구간, 방앗간 등을 갖춘 당시로서는 큰 집이라 볼 수 있다. 입향조인 천찬석의 묘소는 12대손의 주택 앞 추마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영양 천씨 문중에서 시사(時祀)는 매년 음력 10월 첫 주 일요일에 봉행한다.
1904년 간행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의하면, 하리의 가호수는 13호로 영양 천씨 동성마을이다. 일설에는 옛 석대동은 천호(千戶)가 살 수 있는 자리라고 하는데 뒤에 천씨(千氏)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씨 일가는 “가정을 잊고 나라 일을 걱정함은 충(忠)이요, 적을 이겨 난리를 극복함은 장(壯)이며,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것은 효(孝)이니라”라는 천만리 장군의 가헌(家憲)을 이어오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하리마을에 거주하였던 천학주 씨가 보관한 영양 천씨 찬석계 고문서를 2006년 2월, 2007년 12월 2회에 걸쳐 호구단자·준호구 87점, 행정문서 24점, 교지 9점, 소지류 15점, 첩망단자 12점, 토지 매매문서 13점, 제사류 5점 등 고문서 165점과 고서 45권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마을은 일찍부터 비닐하우스 농사로 꽃과 채소류를 생산한 원예단지였다. 1970년부터 옛 석대동 입구 도로가에 100여 가게가 생겨 꽃·나무를 판매하는 화훼단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은 전국의 꽃·나무가 입하하여 부산에서 소비되는 꽃·나무 대부분을 석대와 전국 화훼단지에서 충당하고 있다. 1년에 취급하는 꽃·나무 종류가 1000여 종이 된다. 석대 화훼단지에서는 매년 봄철에 꽃 축제를 개최하여 각양각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를 뿜어내어 대자연의 아름다운과 신비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옛 석대동의 화훼단지는 이곳을 비롯하여 선두구동, 철마면 등지의 원예인들이 정성을 다하여 가꾸어 온 노력이라 하겠다. 이 화훼단지는 부산을 비롯하여 영남·제주도까지 공급하여 꽃의 소비를 조달하고 있다. 석대 화훼단지에서는 매년 3~4월에 꽃축제를 개최하여 시민들의 봄꽃 향기를 만끽하는 알찬 전시장으로 각광받은 적이 있다. 이 마을의 역사와 속성을 따져 볼 때 영양천씨 기증 고문서에서 마을의 역사, 경제, 생활, 신분, 습속 등이 나타나 있어 아주 모범적인 전통 효자 마을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