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5월 27일
ESG, 뉴노멀이자 굴레…능동 참여로 글로벌장벽 넘어 성장동력 구축해야
韓 기업, 선진국의 ESG 압박 따른 피동적 선택 아닌 적극적 동조로 ‘사다리 걷어차기’ 극복 과제
정부는 민간주도 존중·지원하고 기업은 기술·비즈니스 근본 혁신해야…재계, ‘한국의 BRT 선언’ 필요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한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ESG 성과가 한·미 관계의 근간”이라고 했다. 한·미 동맹이 세계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이 ESG 경영에 있다고 한 것이다.
ESG 경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나 ‘지속가능 경영’의 연장선에서 혁신집단인 기업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 ‘뉴노멀’이지만,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와 글로벌 흐름에 동참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굴레’이기도 하다. 기업은 정부·시민사회와 협력해 ESG 기반의 ‘딥 체인지(Deep Change)’ 즉 근본적 혁신을 이뤄 미래 성장동력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왜 ESG인가
ESG란 기업이 투자를 위한 의사결정을 할 때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이슈 같은 ‘비재무적’ 가치를 기업의 ‘재무적’ 요소들과 함께 고려하는 경영을 말한다. 전 세계의 선진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기업이 기후 위기를 비롯해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이해 관계자들의 요청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특정한 환경에 놓인 조직이 주변 조직들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하는 메커니즘을 ‘동형화’라 한다. 기업의 동형화에는 정부나 이해관계자의 압력에 의한 ‘강압적 동형화’, 교육기관이나 전문가의 제안에 의한 ‘규범적 동형화’, 그리고 성공적인 다른 조직을 벤치마킹하는 ‘모방적 동형화’가 있다.
한국 기업의 ESG 경영은 글로벌 자본시장 투자자들과 이해관계자의 요구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강압적 동형화’ 모델로 설명된다. 하지만 변화가 지속성과 효과성을 갖기 위해서는 ‘강압’만으로는 안된다. 조직의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압력에 의해 변화가 이뤄지면, 기존의 운영 논리와 충돌을 빚고 실제 운영에서 탈동조화(디커플링)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이 변화의 방향성에 공감하고, 필요성을 적극 받아들이며, 전략과 과정을 수립해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능동적 동형화’가 이뤄져야 한다. ESG 경영도 기업 조직 구성원들이 그 가치와 규범을 내재화할 때 비로소 변화의 드라마를 완성할 수 있다.
◇ 글로벌 선도자들의 압력
ESG 흐름을 주도하는 힘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투자자들이다. 글로벌 공적연금, 국부펀드, 자산운용사들은 비재무적 가치인 ESG를 고려해 기업 전체의 가치를 평가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유엔이 이미 지난 2006년에 PRI(책임투자원칙, Principle of Responsible Investment)로 ESG를 내세운 이후, 미국과 유럽은 지난 15년 동안 이에 대한 준비를 꾸준히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코로나19 위기와 관련,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탄소 중립’ 등 대응이 본격화하면서 격랑을 타는 모양새다.
이제 한국 부품제조기업이 유럽 등지의 완제품 조립업체 납품을 위해 수출하려면 ESG 인증을 제출해야 한다. 프랑스 타이어회사 미슐랭은 ‘환경, 사회, 공정운영, 공급망 관리’ 등의 내용을 준수하도록 공급업체에 요구한다. 미국 최대 통신사인 버라이존은 대행기관 에코바디스를 통해 공급업체의 CSR 이행수준을 평가한다. 유럽연합은 환경 이슈를 필두로 ESG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자산운영사 블랙록은 2020년 1월 석탄을 사용해 얻은 매출이 25%가 넘는 기업에 대한 투자를 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한국의 기업 중에서는 해외의 큰손들로부터 투자가 철회되거나 축소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 구미 선진국의 ESG 후발국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가 진행 중인 것이다. 하지만 ESG가 기업경영의 뉴노멀이 된 한, 국제적 분업구조 안에 있는 한국은 이 흐름을 함께 타면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 한국 내 움직임
이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SK그룹은 지난 2017년에 기업 정관을 바꿔 경제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이해관계자들의 행복을 증진하겠다고 선언하고, 계열사들의 사회적 가치 창출 성과를 측정·평가하고 있다. 현대차도 친환경 차를 필두로 ESG를 위한 새로운 전략과 실행에 매진하기 위해 지속가능경영위원회를 확대 개편했다. 포스코는 2018년 ‘기업시민’을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이후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의 변화를 추진하면서 공급사 선정 때 ESG를 고려하고 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 때 최태원 회장이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 협의체인 BRT(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측과 만나 협력을 논의한 건 상징적인 사건이다. BRT는 2019년 8월 181명의 최고경영자가 모여 기업의 목적이 경제적 가치를 넘어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가치 창출에 있다는 선언을 했다.
우리 재계도 ‘ESG 경영을 실천해 사회와 공동체의 번영·발전에 앞장서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의 BRT 선언’을 하는 데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최근 ESG 경영성과 공시 의무화 도입 일정을 제시했고, 한국형 ‘K-ESG’ 지표를 만든다는 방침이다.
◇ ESG 경영의 미래
기업은 ESG 경영이 압력이나 규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공정·포용·혁신이라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환경을 위한 ‘기후테크’, 취약계층의 금융 접근성 제고를 위한 ‘핀테크’ 등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들이 나타나는 중이다. 소셜 벤처나 임팩트 투자를 활용해 단기 성과에 얽매이지 않고 ‘인내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가치생태계를 만들어 갈 필요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ESG를 정보·공유 서비스 제공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민간과 기업의 전문성을 침해하지 않고 민간주도 활동이 잘되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ESG 경영에 대한 공시와 평가가 시장의 자율과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는 중소기업의 활동에 애로가 없도록 지원해야 한다. 모범적인 ESG 경영에 대해서는 선진국과 같이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ESG는 기업이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도록 하는 변화의 드라마다. 한국의 기업들이 ESG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하고,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의 근본적 혁신을 이루며, 미래 성장동력 구축이라는 과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김재구 / 한국경영학회 부회장, 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
문화일보
■ 세줄 요약
왜 ESG인가 : ESG란 기업 경영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 같은 ‘비재무적’ 가치를 ‘재무적’ 요소들과 함께 고려하는 것. 기업이 ESG라는 글로벌 흐름을 적극 수용할 때 미래 성장동력 구축이라는 변화의 드라마가 완성됨.
선진국의 압력과 글로벌 장벽 : 유엔은 2006년 PRI(책임투자원칙)로 ESG를 내세움. 이후 미국과 유럽은 15년간 이를 꾸준히 준비해왔고, 최근 후발국에 ESG 인증과 성과를 요구하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는 중임.
한국기업과 경제의 미래 : ESG는 굴레이자 뉴노멀임. 이런 가운데 최근 우리 기업의 ESG 경영이 늘어나는 건 좋은 신호. 재계가 ‘한국의 BRT 선언’을 통해 ESG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하고, 기술·비즈니스 혁신을 기할 필요성.
■ 용어 설명
‘PRI’ 즉 ‘책임투자원칙’이란 유엔이 연기금 투자 대상 기업의 재무적 측면과 비재무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면서 2006년에 마련한 투자 원칙. 유엔 후원으로 같은 이름의 기구가 만들어짐.
‘BRT’ 즉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은 미국 200대 대기업 최고경영자로 구성된 협의체. 한국의 전경련과 비슷한 성격. 2019년 ‘BRT 선언’으로 기업 경영이 추구해야 할 새 모델을 제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