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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인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5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행복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뵈니까 더 반갑고 기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한 주일에 우리의 사경회 기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게 새겨지셨습니까?
네 보여요. 우리 성도님들의 얼굴 표정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그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또 마음속에 누리고 있는 그 모습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입니다.
근데 제가 참 희한한 거는 우리 삼패동교회에서는 우리 학생들의 모습 가운데서도 그런 모습이 보여요.
제가 너무 놀랐어요. 어떻게 이 교회는 이렇게 특별할까?
제가 뭐 많은 교회를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삼패동교회의 성도님들의 얼굴 가운데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새겨져 있는 모습들이 보이고 그리고 학생들이 사경회 기간 동안에 나오는 걸 보면서 제가 너무 놀랐어요.
안 나오면 밥 안 준다 뭐 그런 거 하신 건 아니죠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자비의 기별을 주시고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한없는 감사로 바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감사를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 귀하고 거룩한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원래 안식일을 지켜야 되죠? 우리를 안식일은 어떤 날이죠?
창조하신 날이죠 그렇죠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10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 우리가 왜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여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10계명이 두 번 나오는 거 아시죠?
한 번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고 똑같은 10계명이 우리 목사님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신명기 5장에 나옵니다.
똑같아요. 신명기 5장에서는 모세가 죽기 직전에 신명기는 마지막 설교 마지막 당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이제 죽잖아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돼서 그 마지막 설교 가운데서 모세가 다시 한 번 그 신명기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신명기와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신명기가 똑같은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신명기와 신명기 이렇게 했군요.
출연기 20장에 나오는 10계명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10계명이 완전히 똑같은데 다른 부분이 딱 한 곳이 있어요.
뭔지 아십니까? 왜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지에 대한 그 이유가 달라요.
출애굽기 20장에는 왜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했습니까?
창조한 창조주이기 때문에 이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그랬죠.
근데 신명기에 보면 왜 지키라고 했냐면 내가 너희를 종 되었던 땅 이집트에서 구원해낸 여호와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안식을 지켜야 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신명기에서는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 거예요?
우리를 사단의 손에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셨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거예요.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추가된 거예요. 우리가 만약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한 세대 동안에 무슨 이유만을 가지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거예요.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시라는 걸 인정하는 표로서 우리가 선악과를 먹지 않고 영원토록 그분을 섬긴다는 표로써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며 영원한 세대를 살아갔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그 구원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셨어요?
다시금 재창조해 주시는 거예요. 지금 이 과정이 재창조의 과정이잖아요.
그쵸 그래서 우리를 재창조하신 다음에는 창조의 기념과 재창조의 기념일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거예요.
우리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렸던 우리를 다시 죄 가운데서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그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안식일을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나왔잖아요.
그죠?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그 믿음을 안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럼 몸은 와서 있지만은 안식일에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못 누릴까요? 못 누리는 거예요. 안식일의 축복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 안식일의 기쁨이거든요.
이 기쁨 안에 들어갈 때 치료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 기쁨 안에 들어갈 때 우리의 이 전 이 온 몸에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기쁨 가운데서. 그러나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잊어버리면 우리는 몸은
교회에 와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시간은 이 안식일이라는 시간 안에 들어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심령과 마음에는 참된 안식을 경험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단은 우리에게 딱 한 가지만 하는 거예요.
뭐만 하냐면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그 하나만 해요.
그거 하나만 딱 가려놓으면 그다음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행위들이 다 돼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어제도 얘기했죠. 우리가 끊임없이 누구를 바라봐야 된다고요?
예수님 그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다고요?
생명을 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이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꿩 안경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꿩 안경 꿩 꿩들도 안경을 쓰더라고요.
근데 그 꿩 안경은 꿩들이 쓰는 게 아니고 그 꿩을 사육하는 사람들이 안경을 끼워놔요.
사진이 있으면 좀 보여드리면 좋은데 나중에 한번 검색해서 찾아보세요.
되게 희한한 플라스틱인데 이 불이 있는 쪽에다 딱 꽂으면 이렇게 올라가서 눈 위로 이렇게 딱 가립니다.
이렇게 그러면 꿩이 하늘을 보지 못해요. 그래서 꿩을 사육하는 데 가보면은 위에를 막아놓지 않았어요.
그냥 옆에만 이렇게 막아놨어요. 꿩 날 수 있잖아요.
위에가 다 뚫려 있거든요. 아무도 날아가지 않습니다.
다 뭐 하고 있어요? 거기서 닭처럼 모이 쪼아 먹고 거기서 사육 당하다가 마지막에는 꿩만두 만드는 데로 가는 거예요.
얼마나 비참해요? 꿩만두 맛있죠 그렇게 해서 이 꿩들이 사육을 당하다가 좋죠.
사육을 당할 때는 좋죠. 왜냐하면 밖에 가서 먹이 안 찾아도 되거든요.
주는 거 먹으면 돼요. 거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목이 비틀어지고 그런 결말을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아무리 잘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는지, 내가 지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의 은혜를 느끼고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돼요.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그랬잖아요. 여러분 오늘 하루 사시면서 어떻게 좀 자신을 살펴보셨습니까?
생각이 틈틈이 들지 않으세요? 내가 지금 예수님의 은혜를 감상하고 있나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나 내 안에 그런 기쁨이 있나 이런 마음들이 틈틈이 틈틈이 드시지 않으세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하시는 일이에요.
그래서 혹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비와 사랑을 한동안 생각을 안 했네.
그러면 얼른 예수님 제가 이렇게 분주하게 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요?
돌아가셨잖아요. 얼른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믿음의 고백이라고 불러요.
믿음의 고백. 계속 믿음의 고백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
내가 부족함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마음속에 두려움이 들 때마다 예수님 제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어요.
저는 역시 죄인이 맞아요. 그런데 이런 나를 위해서 2천년 전에 돌아가 주셔서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거예요.
믿음이 없이는 뭐 하지 못한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기쁘시게 못해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분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는데 우리가 믿지 못하는 거예요.
그럼 얼마나 슬프시겠어요? 얼마나 행복하지 않으시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건 그분이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이 사실을 마음속에 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성서에 가면은 그 향단의
그 향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잖아요.
그와 같이 우리의 기도가 향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쁘신 바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감사와 기쁨을 하나님께 표현해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원하는 우리 산패동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심령마다 이 거룩한 안식일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매일 읽었던 말씀이죠. 요한복음 3장 3절에 있는 말씀 다시 한 번 읽고 기도하고 말씀을 더 나누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 이 거룩한 안식일 첫 시간에 주 앞에 또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은혜와 그 자이의 풍성하신 그 생수를
우리가 충만히 마시고 싶습니다. 하나님 주의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찾아와 주시고 우리의 심령과 마음이 이 한 시간 주님과 긴밀히 연결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죄악들을 내려놓게 하시고 오로지 하늘만을 바라보는 귀한 한 시간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도 여전히 저희가 이어서 로마서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중요했고 또 어제까지 정말 중요했지만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의 이야기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에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제 다룰 이야기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어떻게 죄가 버려지고 어떻게 새로운 삶이 이어지며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누려지는지를 다루는 장입니다.
그러니까 5장까지는 어떻게 보면 좀 이런 표현이었다면 6장과 7장과 8장은 사실은 실전편이에요.
실전편 그래서 실전에 우리가 강해야 되잖아요. 그죠?
실전에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여태까지 깨달은 이 복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역사에서 우리를 실제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그 원리를 우리가 오늘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기대가 되십니까? 오늘의 오늘의 이 원리를 잘 이해하고 적용하면 그다음부터 우리의 신앙은 쭉쭉쭉쭉 성장해 나갑니다.
우리 6장 1절부터 또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장까지 우리 확실하게 이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거 여러분 분명히 이제 기억하셨죠?
이거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사단이 와가지고 우리를 공격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확고부동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금 3장부터 4장 5장에 걸쳐서 계속 믿음만 강조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 속에 또 어떤 마음이 들 수 있냐면 그러면 그냥 믿기만 하면 되냐 그러면 죄 짓고 이런 건 아무 상관이 없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에 먼저 6장 1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왜냐하면 죄인에게 은혜가 풍성하게 베풀어지잖아요.
그죠 내가 죄인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 하나님 이런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까 감사합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으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죄가 있어야 돼요. 그럼 내가 은혜를 더 많이 받으려면 뭘 많이 지으면 돼요?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 그럼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짓겠느냐 사도바울이 뭐라고 얘기를 해요 2절에 그럴 수는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이놈의 죄 때문에 그 희생을 치르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고의적으로 그런 죄를 더 짓겠느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라고 얘기를 하면서 이제 3절부터 정말 중요한 얘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죽으셨습니까?
나는 죽은 사람입니까? 나는 죽은 사람이 맞습니까?
자신을 잘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로 죽은 사람이 맞는지 나는 확실히 죽은 사람이 맞다.
손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손을 들라고 하니까 오늘 오늘 아내랑 오기 전에 한 게 막 생각이 나시죠?
그렇죠 오늘 했던 죄악들이 막 떠오르시죠 그렇죠 그래서 손을 차마 양심적으로 들기가 굉장히 어려우시죠.
그렇죠 근데 저한테 물어보신다면 저는 번쩍 들 거예요.
저는 죽은 사람이 맞다고 왜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지금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랬냐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어떻게 했다고요?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뭐와 함께요?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았다.
그다음에 또 뭐라고 얘기하냐면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뭐 했다고요?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뭐 되었다고요?
장사되었나니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여러분은 이미 죽어서 장사 치르신 분들 맞습니까?
대답이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계속 며칠 동안 뭘 살펴봤냐면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누구도 함께 있었다고 지금 살펴봤죠.
누가 함께 있었는지 선으로 한번 가르쳐 보겠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누가 있었어요?
맞습니까? 내가 함께 있었잖아요. 그죠? 그럼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죽으실 때 누구도 죽었어요 근데 왜 아까 제가 손 들으라고 그랬는데 아무도 안 드셨어요?
여러분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죽음이 누구의 죽음이었다고요?
나의 죽음이 나의 죽음 사도바울이 그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 사실을 믿고 깨닫는 사람이 그 죽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슨 예식을 치르는 거예요?
침례 의식을 치르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질문하겠습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 맞습니까? 아멘 근데 왜 이 자아가 자꾸만 올라오죠?
그건 제가 조금 이따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확실히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맞다는 거예요.
그건 내 자아가 지금 올라오느냐 안 올라오느냐 이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온 인류를 품고 주무셨기 때문에 나도 그 안에 함께 죽은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이마에 예수 이렇게 쓰여 있었을까요?
그럼 누구 이름이 쓰여 있었을까요? 여기에 예수님의 이마에 누구 이름이 쓰여 있는지 다 같이 한번 큰 소리로 한번 그 사람 이름을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한민호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고 있었다는 사람이 누구였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외치고 그 죽은 사람이 누구였어요?
죄인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그 자리에서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거기에 죄가 없는 예수님이 달리신 게 아니고 죗덩어리인 내가 달려 있는 걸로 보신 거예요.
거기에. 그래서 그게 이 온 인류의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거예요.
단 한 번도 분리되었던 적이 없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셔서 그 분리의 고통을 느끼신 거예요.
그래서 엘리엘리 라마사막단이 어찌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 했고, 예수님께서 소리치셨던 이유가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님과 분리되셨던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 달린 것이 의로운 예수님이 아니고 죄덩어리였다니까요.
구리뱀 그 죗덩어리 사단이 시작해 놓은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 달려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죄와 함께 예수님께서 죽으셨어요. 그러니까 우리 죗값을 치렀습니까?
안 치렀습니까? 사단이 와가지고 너 죗값 치러야지 너 죄 지었잖아라고 얘기를 하면 뭐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돼요?
나 치렀는데 난 이미 그 죗값 치렀는데 언제 치렀는데?
2천 년 전 예수님이 대신 치렀으니까 누가 치른 거예요?
내가 치른 거죠 옛날에
프랑스에는 뭐 그런 제도가 있었대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제가 모르겠지만 언젠가 어디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이렇게 부잣집 사람들 중에 전쟁에 나가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대신 사람을 사가지고 나를 대신해서 나가게 할 수 있대요.
어떤 부잣집의 젊은 청년이 입양통신서를 받았는데 이제 다른 사람을 돈을 주고 사가지고 그 사람을 대신 보낸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전사였어요. 안타깝게도 근데 어느 날 또 나라에서 군대 입대하라는 입양 통지가 온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입영 통지서를 받아들고 병무청이겠죠.
병무청에 가가지고 뭐라고 얘기했을까요? 나는 전쟁터에 나가서 이미 죽었어.
그랬더니 아니 당신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도대체 뭘 보고 당신이 죽었다고 얘기하는 거냐 나를 대신하여 군대 간 사람이 죽었으니 그 죽음이 내 죽음이요.
그러니 내가 군대에 갈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내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신 거예요. 더 이상 죄의 문제 때문에 내가 죽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 죽음을 대신 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문제에 관한 한 사단이 나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언제든지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그리고 무덤에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누구도 함께 부활한 거예요.
나도 함께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인 거예요.
그러면 오늘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은 뭡니까?
이건 누구의 생명인 거예요? 예수님 생명을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 생명이 이미 시작된 거예요. 여기서 2천년 전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 생명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됐으니까요? 죽었잖아
나는 죽었어요. 이미 2천년 전에 나라는 사람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겁니다.
이게 내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인 거예요.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럼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차는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학력은 누구의 것입니까?
아멘 내가 가진 재능은 누구의 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소유한 것 중에 우리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만약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해야죠.
난 안 죽었다고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난 안 죽었다.
안 죽은 사람만 나라는 존재를 내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없이 나를 내 존재를 내 것으로 여기는 순간 어떻게 되는 거예요?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한다는 뜻은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이 자아를 내 뜻대로 붙잡고 살지 않겠다는 뜻이랑 똑같은 거예요.
내 것이 없어요.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죽어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5절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조금 전에 설명드렸죠. 우리가 죽었고 죽은 것을 믿으면 그분과 함께 부활한 것도 믿는 거예요.
6절에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시작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잠깐만요.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뭘 안다고요?
지금이요 옛 사람, 옛사람 나는
어디에 못 박혔다고요? 내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혔죠?
예수와 함께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음 안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에요. 왜 그렇게 하셨는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게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절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에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오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1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시작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러분 이 구절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어떻다고요?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
죄 가난한 나는 죽은 사람이다. 여러분 이 사실이 분명합니까?
아멘이죠. 저는 죽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하겠습니다.
손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확실히 죽은 사람이 100% 맞다.
손 한번 들어보시기 바 제일 먼저 번쩍 들어요. 우리 이름 뭐예요?
요리 요리가 제일 먼저 번쩍 들었어요. 이거 다 이해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죠? 복음은 이렇게 쉽습니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어요.
맞아요. 우리는 죽은 사람이 분명해요.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죽음을 내 것으로 선물로 주신 거예요.
이따 너의 죽음이 여기 있다. 우리가 조금 건너 뛰어가지고요.
7장 1절부터 있는 이 비유를 한번 좀 먼저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좀 말씀을 볼게요. 이 죽었다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이 비유를 우리에게 들어서 다시 얘기해 주는 거예요.
비유로 혼인 비유로 얘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7장 1절은 뭐라고 얘기했냐면 법이 언제까지만 그 사람에게 주관한다고요.
살아있을 때만. 그래서 검사들이 누군가를 신문하다가 피고가 뛰어내려서 죽는다든지 그러면 모든 사건이 그 시로부터 어떻게 돼요?
종결돼버려요. 왜냐면 죽은 사람한테 죄를 물을 수는 없어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예요. 더 이상 죄는 죽어있는 사람한테 가가지고 그 죗값을 요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죄는 살아있을 때만 그 죗값을 물을 수 있다.
2절의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우리가 지금 오늘날에는 결혼 관계가
이혼이라는 제도가 있어가지고 벗어날 수 있잖아요.
그쵸. 그러나 사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이혼이라는 건 없는 거예요.
그쵸 한 번 맺어지면 끝까지 맺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한 번 이 법으로 결혼이라는 제도 가운데 메어지면 지금 이 비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메워지면 이건 아무도 깰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묶어놓으신 내가 결정해서 법으로 메워지면 안 돼요.
그러면 이 법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이 뭘까요? 여기 지금 답을 뭐라고 하셨습니까?
남편이 죽는 것밖에 답이 없다. 보통은 이제 내가 죽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데.
네 아 맞습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요. 그렇죠.
남편이 죽든지 내가 죽든지 그죠? 아니 이혼은 안 된다 그랬잖아요.
지금 묶여지면 못 깨는 거예요. 이 법이 이걸 갈라놓을 수 있는 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뭐라고요? 사망 사망 외에는 안 된다고 지금 사도 바울이 그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내가 죽었다
그럼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남편에게서 벗어나 내가 결혼을 했는데 이 남편이 정말 나쁜 남편이에요.
벗어나고 싶어요. 근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죽음밖에 없어요.
죽었어요. 의미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현명하시게도 아까 누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남편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남편이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남편은 결코 죽지 않아요.
여기서 말하는 이 남편은 누구를 상징하는 걸까요?
율법을 상징하는 거예요. 율법을 안에는 우리죠.
우리 우리와 율법이 법적으로 메워져 있는데 이 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예로 들어서 그런데 이 남편인 율법은 어떤 남편이냐 하면 사랑은 안 해줘요.
정제만 하는 남편이에요. 정제만 요거 틀리면 요거 정지하고 저거 틀리면 저거 좀 계속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남편인데 여러분 그런 남편이랑 살면 행복하겠죠.
어떤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할 때 남편이 100개의 리스트를 준 거예요.
여보 당신은 매일같이 이 100개의 리스트를 다 해야 돼.
만약 여기에서 하나라도 부족하면 혼날 줄 알아 하는 정말 요즘 시대에는 없는 그런 남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100개의 리스트를 체크해가지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꼭 혼을 내는 거예요.
아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정말 벗어나고 싶은데 이 남편의 굴레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너무 불행한 거예요.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면 좋겠죠.
그렇죠 너무 안타깝죠. 근데 그런데 이 이 남편이 어느 날 감사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사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에게서 벗어나가지고 너무 막 이렇게 숨이 쉬어지는 거예요.
이제 너무 행복해요.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됐어요.
너무너무 이 여인을 사랑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해달라고 또 청원을 받았어요.
근데 이 남자는 안 그럴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면밀히 따져보고 따져보고 따져보다가 이 사람 정도면 믿을 수 있겠다 하고 결혼을 딱 했는데 진짜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인 거예요.
너무나 아내를 행복해하게 해주는 거예요. 너 일터에 갔다 오면 막 하루 종일 힘들었지 않냐고 막 어깨도 주물러주고 다리도 주물러주고 막 물도 떠다주고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모든 거를 막 기쁨으로 다 해주는 그런 이상적인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행복할까요? 안 행복할까요? 정말 행복하겠죠 그죠?
그래서 너무 행복했어요. 전 남편이랑 너무 비교가 되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회사 간 사이에 청소를 하다가 옛날 전 남편이 주었던 그 100개의 리스트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쭉 읽어보기 시작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그렇게도 하기 싫었던 그 100개의 리스트를 기쁨으로 모두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 율법은 우리를 완전히 올감해가지고 이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돼야 되냐면 죽어야 돼요. 죽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잖아요. 그쵸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품고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거예요.
그 사실을 믿으면 이 죽음이 누구의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옛 남편인 이 이 율법이 우리에게 죽음을 요구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그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우리는 예수님만을 우리는 죽었잖아요.
그렇죠 새 생명을 얻었잖아요. 이제는 우리의 남편을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누구를 선택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남편으로 새롭게 선택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선택하면 예전에 그렇게 힘들던 그 모든 율법들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기쁨으로
그리고 감사로서 그런 모든 율법들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3절에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료가 되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뭘 당했어요 우리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르니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누구에게 가는 거예요?
예수님께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기 위하여 그 일을 행하셨다고 사도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그분께 드리기만 하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행하게 되시는 거예요.
다시 6장으로 좀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부터 12절부터 살펴볼 텐데 여기서부터가 진짜 실제적인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11절에 뭐 하라고 그랬습니까? 기억나십니까?
역이라 그랬죠 역이라고 우리가 뭐 했다고 역이라 그랬습니까?
죽었다고 여기라고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었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으라.
여기라 내가 지금 새로운 생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라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고 여기는 사람들이 반드시 하게 되는 일이 뭐냐 하면 자신의 삶을 이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게 돼요.
왜요? 이 생명이 누구 거니까? 하나님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한 악독한 주인이 있었어요.
너무나 악독한 주인인데 거기에 이제 종이 그 집에 한 명 살고 있었는데 이 주인이 얼마나 악독한지 매일같이 이 종을 괴롭히는 거예요.
잠도 안 재고 일을 시키고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너무너무 고생하는 그런 종이었어요.
근데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보니까 이 사람이 너무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주인한테 가갖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 주인장 얼마면 이 종을 내가 살 수 있겠소 그러니까 이 주인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5천억이요 그랬어요.
5천억. 근데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재산이 5천억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5천억을 주고 그 종을 사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자네 내가 자네를 5천억원이나 내 전재산을 주고 산 것은 자네를 내 종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고 자네를 내 아들로 삼기 위함이라네.
이제는 자네가 내 아들이 되었으니까 자유인이 되었고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네.
그러니 자네는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나와 함께 살아도 되고, 자네가 자유를 찾아서 그동안 못 누렸던 자유를 누리고 살고 싶다면 나를 떠나서 가서 사는 것도 얼마든지 괜찮대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종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리시겠습니까?
5천억을 다 주고 나를 사셨어요 5천억 전 재산을 털어서 나를 사줬는데 여러분 우리가 정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주인을 내 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더 이상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해야 되겠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저는 앞으로 제 평생을 이렇게 좋으신 주인님을 모시고 제가 정말 잘 섬기는 종이 되어 살겠습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을 가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5천억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값없이 구원하셨다면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말씀을 드려야 되겠어요?
예수님 이제는 예수님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예수님 이제는 이제는 내 자아는 모두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오로지 예수님께 나의 모은 자아를 드리고 주님의 뜻대로만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예요.
그 태도가 우리의 삶 가운데 올라오느냐 올라오지 않느냐를 통해서 내가 진짜 믿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13절에 12절부터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자 같이 누구께 드리라고요?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 말하는 불의의 무기라는 거는 죄를 생산해내는 그런 무기를 얘기하는 거예요.
죄를 생산해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고 의를 생산해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께 뭐 하라 그랬습니까? 드리라. 더 이상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내 주권을 가지고 내 자아를 붙잡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모든 자아를 굴복하고 내려놓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라는 뜻이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받치다는 뜻을 가지고 있대요. 밭이다.
우리의 온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예요.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1순위가 예수님이 맞으십니까?
아멘 그분이 우리의 삶의 1순위가 되셔야 돼요. 그것이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예요.
더 이상 세상 것이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시골교회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처음 깨달았을 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 하나를 깨달았어요.
제가 일기를 안 쓰는 사람이거든요. 글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근데 이게 얼마나 감격적이고 기뻤던지 제가 일기라는 걸 다 써봤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뭐라고 썼냐면 난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않고 살 것이다.
나는 평생 동안 이 좋으신 하나님을 내가 첫 1순위로 섬기고, 내가 영원토록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에 예수님 아닌 그 어떤 것도 들어오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막 이렇게 글을 썼어요. 그리고 제가 이제 거기 임기 5년을 마치고 제가 이제 비엔나 교회 선교사로 4년을 가게 된 것입니다.
간 지 2년이 지났을 때 이제 제1회의 액트 수련회를 저희가 유럽에 있는 청년들을 다 모아서 액트 수련회를 한번 했고, 그다음에 제2회 액트 수련회를 하기 위해서 지회 청소년부장님, 연합회 청소년 부부장님 그리고 동조연합회 청소년 부장님을 초청해가지고 저희가 이제 여러분 모차르트의 고향인 그 짤츠부르크라는 것 아시죠?
그곳에서 행사를 하기로 다 준비를 해놨어요. 근데 그 행사가 시작하기 이틀 3일 한 3~4일 전에 신천지발 코로나가 딱 터진 거예요.
근데 하필이면 그때 오셨던 모든 그 강사 목사님들이 그 당시에 유럽에서 코로나가 제일 심했던 두 도시가 밀라노와 미넨이었는데 그분들이 밀라노로 입국을 해가지고 미넨에 와 계셨어요.
그래서 이 행사를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만약에 여기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되거나 하면 우리가 교단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겠다 그런 판단 하에 하루 전날 저희가 행사를 취소하고 다 돌려보내고 그리고 이제 인사는 드려야 되기 때문에 제가 운전을 하고 5시 반간 반을 운전을 해가지고 제가 미행까지 갔어요.
그래서 이제 목사님들 만나서 인사하고 제가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리고 그다음 날 돌아왔어요.
돌아온 지 며칠 안 돼서부터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막 고열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그 당시에 저희 보험에 문제가 있어서 제가 병원도 뭐 어떻게 가야 될지를 모르고 있었어요.
근데 막 하루는 막 너무 막 기침도 나고 막 열도 나가지고 가족들은 다 방으로 몰아놓고 제가 거실에서 혼자서 누워서 막 자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는 거예요.
이게 숨을 들이쉬면은 이게 시원해야 되잖아요. 아무리 숨을 들이쉬도 숨을 들이쉬지 않은 것처럼 답답함만 막 계속 있고 숨이 아주 겨우 막 조금씩 조금씩 힘들게 수영할 때처럼 막 그렇게밖에 안 쉬어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막 숨이 거의 막 안 쉬어지니까 막 숨이 막 넘어가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쯤 되니까 갑자기 제 안에 불안감이 확 하고 엄습해 오는데 이러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오늘 밤이 나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그 생각이 탁 드는 그 순간에 제가 뭘 깨달았냐면 내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너무 두렵고 무서웠어요. 내가 이러다 죽으면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까 내가 재림의 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이 두려움이 저에게 막 너무 막 공포로 다가오는 거예요.
근데 너무 더 무서운 것은 제가 분명히 2년 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아니 그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제 비엔나 온 건 인연이 됐고 그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 안에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의 그 일기장의 고백이 뭐였냐면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는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취하셔도 나는 그리스도의 날에 그분께서 나를 살리실 것을 나는 반드시 믿는다.
제가 이렇게 써놨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 나는 나의 이 생명에 연연하지 않고 그분께서 가라시는 대로 가고 그분께서 멈추라고 하는 곳에 멈추고 그분께서 전하라고 하는 기별을 전하고 내가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고 제가 100% 헌신하고 서약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에 저에게 있었던 그 구원의 확신이 없고
제가 죽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기간 동안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깨달았고 내가 거듭났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사람이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사단이 뭘 끼워놓은 거예요? 안경을 끼워놓은 거예요.
그때 그날 제가 깨달았어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경험에 얽매여서 살아갈 수 있구나.
내가 과거에 거듭난 거 확실하고 내가 과거에 예수님 만난 거 확실하지만 오늘 그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없으면 그때 깨달았던 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저도 그 은혜를 깨닫고 그 구원을 경험했었지만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고 이걸 어떻게 회복시켜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도무지 그러니까 더 두려운 거예요. 제가 막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제가 다시 돌이키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게 속고 있으면 십자가가 안 보이는 거예요.
제가 십자가를 잊고 살았던 거예요. 근데 그날 막 절망 가운데서 제가 유튜브를 켜고 한 설교를 듣게 됐는데, 우리 교단의 목사님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찰스 스테이라는 이제 얼마 전에 작고하셨는데 남침례교회 목사님이 계세요.
근데 그분의 설교 가운데 온전한 굴복의 삶이라는 설교가 있었어요.
그분이 그 설교를 막 하고 있는데 제가 막 너무 아프고 기침이 나가서 옆에다 틀어놓고 막 그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날 밤에 다 깨닫게 되었어요.
그게 뭐였냐면 내 자신을 언젠가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서 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분명히 내가 예수님을 만났었던 그때에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고백하고 완전히 다 드렸었던 것이 분명했지만은 언제부턴가 다시 내가 하나님께 드렸던 내 생명과 내 자아를 다시 찾으러 와서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 밤에 그것이 다 깨달아지더라고요. 그 순간에 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말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제가 다시 한 번 제 생명까지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기로 결심합니다.
여러분 그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 그리고 이런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께 나의 모든 죄를 그분께 드리는 그 순간에 제 마음속에 평안이 순식간에 싹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든지 그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그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서 완벽하게 하늘을 딱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때 제 마음속에 딱 깨달아진 것이 무엇이냐면 이것이구나.
우리가 한 번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도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그 거듭남이 매일의 삶 가운데 유지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 앞에 고백하고 드리고, 나의 삶 전체를 그분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삶의 일순위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산페동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속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그러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명령에 굴복하기로 결심한 상태가 맞습니까?
혹 나의 삶 가운데는 내가 버리지 않고 여전히 붙들고 있는 죄악이 있지 않습니까?
한 개라도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죄악을 만약 하나라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내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해서 드린 삶이 아니에요.
왜냐 여전히 내 자아가 내 삶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삶에는 결단코 평안이 있을 수 없어요. 그 삶에는 결단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참된 행복과 만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엘렌 와잇은 시대 소망 532페이지에 523페이지가 32페이지에 뭐라고 얘기했냐면 자기를 포기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지라고 분명하게 얘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모든 자아를 포기하는 거예요. 더 이상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붙잡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 그 삶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그분이 단 하나라도 자신의 뜻대로 사신 삶이 있으세요?
없어요. 그분은 33년 반 동안 오로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그의 주인으로 사시는 삶을 사신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능력들은 다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삶을 사셨나요? 그분이 신이셨기 때문에 그런 능력들을 베푸시고 그런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에요. 우리랑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모든 자신의 자아를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해 드리고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삶을 지배하면서 끌고 가실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여전히 그가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게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 내게서 옮겨달라고.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기도하셨어요?
마지막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누구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이것이 이것이 자아 폭이에요.
자기를 굴복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하지 않고 누구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로 결심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결심이 확고부동해야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거예요.
근데 이 이 결심을 확고부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십자가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마음속에 새기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로 굴복하기를 매순간 결심하고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그러나 여전히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있고, 내가 여전히 미워하는 사람을 여전히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고,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내가 알고 있는 숨겨진 죄악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에요.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아와 우리 뜻대로 하고자 하는 모든 열망들이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 온전히 굴복되어질 때 그때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수 있고 삶을 생활하실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삶이 놀랍게 변합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하지 않냐면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100% 우리를 차지하실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삶은요. 하나님이 100%를 차지하시든 아니면 사단이 100%를 차지하든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어요.
중간 단계는 없어요. 50 50 이런 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든지 사단이 주인이든지 둘 중에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근데 누가 주인이 되는지는 누가 결정할까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오늘 우리가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모든 열망 몇 퍼센트여야 될까요?
100%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의 주인은 누가 될까요?
사단이 될 수밖에 없어요. 99.99%는 하나님께 바치고 0.001%를 사단에게 주면 여전히 사단을 우리가 붙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없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사단을 몰아내는 능력은 하나님만 행사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가라고 해야 사단이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99%는 하나님께 드렸지만 1%를 사단을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오셔서 사단아 방을 빼라.
내가 들어가겠다 하면 사단이 뭐라고 얘기할까요?
그러면 강제하시는 건데요. 여전히 1%는 나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그러니 저는 방을 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가지 않겠습니다.
100%가 아니면 사단을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말씀하실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100% 하나님께 확정되어서 드려지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거예요?
나가라 사단이 나가는 거예요. 그럼 누가 들어와요?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우리의 마음이 평안을 누리는 거예요.
여러분 거라사의 광인 얘기 아시죠? 거라사의 광인 이야기를 보면 되게 좀 재밌는 장면이 나와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딱 배에서 내리실 때 광인들이 막
예수님을 막 죽일 것처럼 막 달려들잖아요. 그렇죠 그러다가 예수님 앞에 딱 와가지고 딱 부복해가지고는 부복을 했는데 그다음에 말을 어떻게 하죠?
나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막 이렇게 해서 사단이 막 얘기를 해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저를 했죠?
왜 그 광인들이 와갖고 절을 하고 예수님 섬길 것처럼 하다가 막 갑자기 사단이 나타나고 이해가 되십니까?
시대 소망에 보면 그 순서가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먼저 예수님께서 내립니다. 그랬더니 이 광인들이 예수님한테 달려들려고 막 쫓아와요.
제자들은 다 도망갑니다. 아무도 안 남았어요. 예수님이 혼자 남겨두고 그때 예수님이 손을 딱 드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광인이 사단이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만 나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때 광인이 깨달았어요. 귀신 내 속에 들어가 있는 귀신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저기 있구나.
그러니까 이 광인에게 희망이 생긴 거예요.
저분에게 도움을 구하면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왜냐하면 광인도 벗어나고 싶지만 그 능력이 압도되어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처지거든요. 우린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 죄악 가운데서 사단의 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때 광인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해서 예수님께 달려가서 딱 꿇어 엎드린 거예요.
여러분 그때 이미 싸움이 끝났다는 사실을 사단이 알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사단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하기 시작한 거예요.
내가 나아가야 내가 나가야 된다면 어디로 가게 해달라고요?
이미 사단이 깨달은 거예요. 내가 이 사람 방을 빼야 되는구나.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 점령할 수 없겠구나. 왜요?
이 광인이 누구를 선택했어요?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겠다고 100% 자신의 마음을 그분께 드렸다는 사실이 명확해졌거든요.
그러니 가라 한 말씀에 사단이 나가고 그 사람이 평화를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영적 투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의 죄를 용서하신 그분을 우리가 깨달았다면 우리의 삶을 100% 그분께 드려야 되는 거예요.
100% 100%를 드리지 않으면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주인으로서 임하실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결혼을 하시는데 이렇게 예식장에서 주례하시는 분이 묻잖아요.
신랑 신부는 신랑은 신부를 검은 물에게 화풀이 될 때까지 죽을 때까지 100% 사랑하겠는가 신랑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 하고 대답해요. 신부 신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이 신랑만을 생각하며 이 신랑만을 위해서 살고 평생을 100% 이 신랑만을 위해 살겠는가 하고 물었는데 신부가 잠깐만요.
저기 주례사님 제가 99%는 살겠는데 1%는 조금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1년 365일 이 남자를 1년 364일은 이 남자를 위해 살고
하루만 예전에 만나던 그 사람한테 제가 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 결혼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아니 하나님이 100%를 요구하는 건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그것이 맞은 것입니까? 우리의 배우자가 우리한테 여보 당신은 죽을 때까지 나만을 생각하고 나를 첫째로 삼아야 되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야 돼.
여러분 이 요구가 너무 많은 거예요. 이걸 지키기 너무 힘든 요구입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시고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분께 우리의 삶의 전체를 드리는 것이 여러분 그것이 너무나 큰 요구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드려야 되는 우리의 재물이요.
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에요.
우리의 삶 전체를 그분께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그분에게 드리기를 거절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거예요.
더 이상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경험 하나만 좀 말씀드리고 좀 많이 늦었지만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경험들이 제가 되게 많은데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이 은혜 안에 이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 원리를 가지고 우리의 생각과 뜻을 굴복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바꿔주시는 실제적인 능력들과 경험들이 매일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제가 한번은 초창기에 이런 그 원리들을 제가 막 이해하고 깨닫고 이렇게 이제 따라가려고 하고 있을 때 이제 비엔나에서 이 세면대가 좀 높아지고 저희 아이들을 위해서 이 발판을 제가 이렇게 마련해 놨었어요.
그래서 이제 아이들이 그 발판 위에 올라가고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저도 키가 꽤 큰 편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저도 그 발판 위에 올라가서 하면 참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발판 위에 올라가가지고 제가 막 저녁에 양치질을 막 하고 있었어요.
근데 저희 딸 아이가 뒤에서 오더니만 갑자기 제 엉덩이를 이렇게 막 때리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날 되게 기분이 우울했거든요. 우울해지고 막 이렇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엉덩이를 때려요.
근데 저는 우리 딸 아이가 왜 엉덩이를 때리는지 알아요.
왜냐면 예전에 저희 아이가 엉덩이를 때릴 때 제가 이렇게 막 흔들어줬거든요.
그랬더니 막 너무 좋아했었어요. 그러니까 이거 왜 때리는 거예요?
지금 흔들어 달라고 때리는 거예요. 근데 저는 전혀 흔들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우울한 감정이 있잖아요. 그러면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벗어날 힘이 없어요.
그래서 그 감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있는데 이거를 움직이면 되는데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이 감정이 다운이 돼 있으니까 이거를 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막 닦고 있는데 똑똑 하나님 말씀하시기 시작했어요.
야 너 지금 그 우울한 감정 가운데 머물러 있고 싶어 그래서 제가 양치를 하면서 하나님 저는 이 우울한 감정 가운데 머물러 있기는 싶지는 않아요.
그래 그러면 너의 마음을 나한테 한번 줘봐. 그럼 내가 너의 마음을 바꿔줄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가 감정이 우울하고 평안이 없고 지금 이런 감정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왜 그러는 거예요?
누가 들어와 있는 거예요? 사단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면 예수님의 정신과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뜻이 우리와 합병이 되는 거예요.
같이 예수님 것이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분 안에서 죽었고 그분 안에서 부활했으니까 이젠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내 생각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생각인 거예요. 그게 성령을 통해서. 그런데 지금 분명히 예수님의 생각이 없잖아요.
그죠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께 내 마음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 니 마음을 나에게 주고 내가 시키는 대로 순종해 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한번 해봐. 그러면 내가 너 안에 들어가서 너의 마음과 생각과 이 기분을 바꿔줄게 예수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주님 정말요? 제가 한번 해볼까요? 그래서 막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막 고민하는데 흔들어봐.
나를 믿고 흔들어봐. 계속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요. 진짜 생각이 바뀐다고요 이 기분이 바뀐다고요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하고 제가 용기를 내가지고 탁 움직이는데 갑자기 뒤에서 막 까하고 뒤집어지는 저희 딸 아이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에 그
그 모든 기분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거예요. 제 마음과 갑자기 기쁨과 화평과 만족이 확 몰려들어오면서 예수님의 평안이 내 마음속에 착 자리 잡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 바꾸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죠? 순간이에요.
순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 건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딱 굴복되어지는 순간 바뀌어요.
제가 첫날 분당에서 있을 때의 경험을 말씀드렸었죠.
그렇죠. 그 평안의 경험을 말씀드렸죠. 그 원리가 바로 그거예요.
내 마음이 확정 하나님께 절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확정이 딱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마음이 바뀌는 거예요.
마음이 순식간에 바뀌어버리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했는데 안 바뀌는 이유는 100%를 거기에 확정 짓지 않은 거예요.
마음이 여전히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내 마음이 1%라도 여기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자아가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모든 열망이 하나님 나는 죽었습니다.
2천년 전에 난 죽은 사람이에요. 더 이상 내 자아를 붙들지 않겠습니다.
내 모든 권한을 포기합니다.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모든 권한을 주님께 이양해 드립니다.
누구께 드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든 권한을 취하시는 거예요.
이제는 누구가 주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야 내가 주인이야 너 이제 나가.
근데 내가 여전히 사단을 1%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이 그 권한이 없으신 거예요.
사단을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내가 안 드린 거예요.
예수님께 그걸 못 들어오시는 거예요. 우리의 삶의 모든 고난을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것 이것을 자아 굴복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매일의 삶 가운데 깨닫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재림 교인들이 정말 초점을 맞추는 것 중 하나가 뭐냐면 품성 변화예요.
품성이 변화해야 된다.
근데 여러분 품성 변화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품성 변화를 위해서 애쓰지 마세요. 품성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시지 마시고 우리가 노력해야 될 건 뭐냐면 마음을 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돼요.
왜냐하면 마음이 변한 결과로 맺혀지는 열매가 풍성의 열매예요.
내가 오늘 예수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마음이 바뀌어져 있잖아요.
기뻐요 안 기뻐요 기쁘죠. 그럼 오전에도 기쁘고 오후에도 기쁘고 저녁에도 기쁠 수 있죠.
계속 내 마음이 그리스도께 바쳐진 상태에 있다면 그분의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고 계실 테니까요.
그러면 계속 행복한 거예요. 마음이 그러면 행복한 마음에서 무슨 생각이 들어요?
올바르고 행복한 생각이 들어요. 계속 그러면 거기서부터 어떤 행동이 나올까요?
올바른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그 행동이 계속 반복이 되면 뭐가 돼요?
습관이 되는 거예요. 그 습관이 계속 반복이 돼서 10년 20년 30년 지나면 그게 뭘로 남는 거예요?
품성으로 남는 거예요. 품성은 하루아침에 절대로 안 변합니다.
근데 우리 재림교인들은 마음을 바꿀 생각은 안 하고 뭐만 바꾸려고 해요.
자꾸만 품성을 바꾸려고 그래요. 여러분 품성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에요.
매일같이 바뀌어진 마음을 예수님 안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때 10년 20년이 지나면 어느 순간인가 나도 모르게 그분의 품성을 닮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나아가야 될 길이에요. 그러니까 품성을 바꾸려고 노력할 품성을 신경 안 써도 돼요.
그건 열매로 어차피 맺힐 거니까 우리는 지금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화평과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의 삶의 전부인가 나는 그분께 나의 삶 온 삶을 내어드렸는가 이것만 계속 집중하고 그런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2천년 전에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선물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그런 예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이제까지 나에게 품었던 모든 죄악들, 내가 모르고 있는 건 할 수 없습니다.
그거는 앞으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거예요. 내가 준비가 되는 대로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죄악들은 반드시 버리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믿음이에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거듭나게 하시고 참된 기쁨과 화평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누리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될까요? 은혜로우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쪽으로 봐도 죄밖에 없고, 저쪽으로 봐도 죄밖에 없고, 이기심과 교만과 더러움과 추악함으로 가득한
우리들. 그러나 이 죄악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위하여 2천년 전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갑없이 용서해 주셔서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을진데, 이제는 우리의 삶에 우리 스스로를 죄인으로, 우리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기지 않게 하여 주시고, 이제는 우리의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온전히 100% 내어드리기로 결심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더러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용서를 붙잡고 우리가 깨닫고 알고 있는 모든 죄악들을 버리기로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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