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浮世絵)’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전까지 유행했던 일본의 풍속화 양식을 칭한다.
주로 목판화 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원색적인 색감과 단순화 시킨 배경, 다양한 소재 차용이 그 특징으로
일본의 전통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키요에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색상으로 찍힌 목판화인 니시키에를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육필화 등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우키요에는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단색 그림들을 시작으로 인기를 끌었다.
초창기에는 인도묵만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 붓으로 색상을 덧입힌 형태가 되었다가 18세기 스즈키 하루노부가
비단에 여러 색상을 사용한 니시키에를 발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키요에는 도시 서민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대량 생산 됐다.
마을의 일상 생활, 특히 유곽의 어여쁜 창부들, 스모 역사(力士)나 유명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
특별한 예술 공연 등의 모습이 주로 담겼고 이후 풍경화도 많이 제작됐다.
우키요에는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했던 반면, 그 작품들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여 일본식 소품과 화풍을 그림에 차용하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화가가 인상파의 거장 모네와 고흐이다.
우키요에 기법은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주었다.
여백과 담을 즐기던 우리나라의 전통 화풍과는 달리 간결한 선, 주관적인 형태감,
독특하고 강렬한 색의 표현을 사용한 일본의 우키요에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만으로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OSEN=생활경제팀







안도 히로시게(Hiroshige Ando) : 1797~1858
일본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출신.소방조(消防組)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무라이가 부업을 가졌듯이 소방조이던 히로시게도 화가를 부업으로 삼았다.
17년 동안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 문하에서 공부,
도요히로가 사망한 1828년까지는 배우와 미인을 주제로 판화만을 제작하였다.
도요히로가 사망한 뒤 풍경화로 눈을 돌린 히로시게는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풍경판화 시리즈를 제작.
1831년에는 10점의 판화로 구성된 에도(지금의 도쿄) 풍경화 시리즈《도토메이쇼[東都名所]》를 출판하였는데,
섬세한 필치와 색상의 조화,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가 뛰어나다.
이같은 특징은 1834년에 완성한《도카이도 고주산쓰기[東海道 五十三次]》시리즈를 통해 한껏 무르익고
작품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1856년에는 총 118점에 이르는 판화 시리즈《메이쇼에도[名所江戶百景]》제작에 착수.2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제작시기에 따라 순서를 매기는 방식과 달리 사계에 따라 순서가 매겨졌다.
시리즈에는 에도의 계절별 풍광뿐만 아니라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이 특유의 과감한 구성과 섬세한 필치로 잘 담겨 있다.
시리즈 제작 중 사망하여 총 118점 중 그가 만든 작품은 115점이고 나머지 3점은 제자들이 제작하였다.
우끼요에는 원색목판그림으로 서구 현대 미술의 뿌리가 된 인상파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67년 프랑스의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도자기를 감싼 싸구려 포장지에 불과했던 우키요에가
인상파화가 모네에게 발견되면서 부터 자포니즘(일본주의) 열풍이 인상파의 주요 배경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19세기경 쓰시마섬 상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화투 그림이 연상된다.
첫댓글 ㅎㅎ 고흐그림이 더 좋네요
얼마나 앞서갔던가, 우리가 재래식 동양화에 머물러 있을 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