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의 행적을 찾아서
정현수
전날 밤 잠을 설쳐 머리가 찌뿌둥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포도시 억제하고 나서는 길은, 어떤 일에서 워밍업이 없이 나아갈 때 내 노력을 쇠진시키는 억지인 듯 쓰디쓴 캡슐 속 가루약 같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운명적 상황에서 불운한 희생을 요구하며 페이소스에 젖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연민을 느끼는 것? 그러나 이 아침 어눌한 행보로 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동안 미흡했던 내 안을 용서할 수 있는 일탈의 과정이 아닐까?
내일 비 예보 소식과 미세먼지 주의보 때문인지 하늘은 잔뜩 회색빛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소읍(小邑)의 거리는 입가에 쓴웃음이 가득한 냉소적 조소인 듯 차가움이 짙다. 연로하신 노인들만 보일뿐 버스 정류장도 한산하다. 풍요 속의 빈곤, 젊은이 찾기가 하늘에 별 달기다. 이런 이 사회적 불평등은 비판도 저버린 체 특히 시골의 풍경은 오래전부터 아무렇지가 않은 듯 자연스럽다. 서로 고독하게 만드는 상황이 노인이든 젊은이든 양쪽 마음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서먹하고 어색해 안타깝기만 하다.
비록 가까운 나들이지만 여행이 설레는 것은 매일매일 접하는 것이 아니고 오랜만에 가져보는 작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나와 자연과 함께 가끔 만나 조화를 이루는 참 자연적, 인간적 어울림이다. 자연은 항상 창의적이고 독창적 시각에서 인간에게 행동이나 의지를 분명하게 하며 순수함으로 이끌어 간다. 호수의 잔 물결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기도 하고 때론 몰려오는 쓰나미처럼 무섭고 두렵기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을 준다. 이렇듯 이해관계에 있는 우리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일상의 어울림을 자연은 우리를 성찰케 한다.
내가 이곳 해남 남창이라는 곳에 이사 온 지는 일 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다산(茶山) 선생의 행적 지를 아껴놓음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그분의 입장에서 감상에 빠져 이곳의 수려함이나 선생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알고자 함이다. 그것은 많은 생각과 의지로 나 자신을 더 성숙해하고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또 한 편의 나를 찾는 일일 수도 있다. 또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의 권태를 짓눌러 버리고 나를 만끽하는 충분한 여행이 되기 위함이다.
수수한 마음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내 몸을 다산의 그늘 아래로 첫 발을 네 디딘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 양쪽 동백 숲 사이로 불어오는 소소한 바람은 다산과 혜장의 연(蓮)과 업(業)의 비밀들을 알고 있는 듯 무심하게 내 뺨을 스친다. 마치 두 분이 숲길을 거닐며 교류하던 사색의 숲이며 철학의 숲, 구도의 숲인 양 동백나무 녹색의 짙푸름이 세월을 망각하는 듯하다. 다산 정약용보다 십 년이 아래인 아암 혜장선사는 백련사 주지로서 서로에게 경학(經學)과 차(茶)를 나눔으로써 인연을 맺었다 한다. 그들의 교류(6년)는 그리 길지 않은 연월이었지만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몰랐을 정도의 서로에게 조화로운 삶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서로에게 기품이 있었고 차를 나누는 담소는 서정적이었으며 그런 만남은 운명적이었을 것이다. 선비 다운 교유(敎諭)의 사귐이었다.
한때(조선 후기) 만덕사로 불렸던 백련사의 대웅보전은 추녀마다 4 개의 가는 기둥을(흔한 다른 사찰에 없는 기둥) 세워 건물 전체를 받치고 있다. 전면 2 개의 주두(柱頭)에는 용 머리로 조각되어 있고 구석구석 단청이 잘 칠해져 대웅전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만 가지 풍광을 볼 수 있어 만경루(萬景樓)라 했나. 만경루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은 미세먼지 탓인지 희뿌옇고 개운치가 않다. 오래전 두 분이 이곳에서 경학을 논하며 차를 나눌 때는 시야가 확 튀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확실했을 것이다. 마음이 순화되어 자기도 모르게 서로에게 애틋, 관대했을 것이다. 경내는 다른 절과 사뭇 다르게 곳곳에 꼭 있어야 만 하는 것들만 있는 듯 단출하고 오밀조밀하다.
스님들의 숱한 번뇌가 스민 계단을 내려와 다산 초당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나목이 된 배롱나무가 멋쩍게 서 있고 고목인 느티나무에서 낙엽이 바람에 흩날린다. 떨구지 말아야 할 미련인 듯 느리게 팔랑거리고 있다. 숲 오솔길엔 오래된 나무들의 굵디굵은 뿌리들이 길 곳곳에 돌출되어 박혀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뿌리의 노골적 근성(?)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뭔가를 간절히 원할 때나 평탄하지 않는 길을 갈 때 비록 그것이 험난하거나 이루어지지 않더래도 더 이상 고통에 빠지지 않거나 흔들림에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어떤 경고에 부합되어 있는 것 같다. 어렵지만 극복해야만 하는 나름의 걸림돌이 아닐까?
길 아래 넓은 경사지에 차 밭이 있다. 이젠 거의 돌보지 않는 듯 넝쿨이 차 나무를 감싸 버려 차를 좋아했던 다산 선생이 혜장선사에게 보냈던 걸명소(乞茗蔬)가 언짢고 무색하다.
"나그네 근래 차 버러지가 되어 버렸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오"
하며 애타게 구걸하는 모습이 내 눈에 선하다. 선생이 차를 좋아하고 즐겨 함은 집중이 필요하고 건강한 삶으로 학문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아닌가 싶다.
발아래 지나치는 작은 벌레가 보인다. 감히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꾸준하게 지나침은 숙련된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사람들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과정에서 모로 가서 모래성을 쌓는 사람도 있고 하나하나 경험해 공든 탑을 쌓는 현명한 사람도 있다. 마지막 정점에서 모래성과 공든 탑의 확연한 차이의 사실에서 우리는 수단과 목적 의지를 깨달아야 한다. 거침없고 당차게 실패를 경험해 숙지된 경지에 오르는 것은 결국 자기를 완성하는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오르막의 끝 산허리 등성 삼거리 긴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와 비스킷 두 봉지로 점심을 먹으며 고개를 뒤로 젖혀 뚫린 하늘을 바라본다. 둥그런 하늘에 회색 구름이 유희하듯 하릴없이 창공을 떠돈다. 뜬구름이 잡힐 듯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내 발을 본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게 뭘까?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한편의 아쉬움을 붙잡고 싶다. 갈등에서 헤어나고 싶다. 포기해야 하는 미련에서 눈 만 뜨고 바라봐야 하는 걸까? 지친 발이 무겁다. 그래서 너무나 화가 난다.
백련사에서 다산 초당까지 약 1.2km 밖에 안 되는데 내려가는 비탈길 일부의 뾰쪽한 바위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집중해야 만 하는 험로다. 아마 짚신을 신은 선생께서도 이 구간을 오갈 때 차 생각은 뒷전이고 아암과의 경학 토론은 잠시 미루었을 것이다. 짐작건대 다산의 또 하나의 아호인 여유당(與猶堂)은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내 생각엔 특히 눈 온 한 겨울엔 얼음판 살 어름 걷듯 이 험로를 조심스레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드디어 다산의 흔적이 가장 많이 깃든 초당에 도착했다. 다산이 살았던 시기에는 원래 초가였는데 근래의 후세인들이 기와를 올려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한다. 산 쪽에서 내려가면서 처음 마주하는 다산 4경 중 하나인 연못, 연지석가산은 다산이 직접 연지 가운데 돌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고 물고기도 키우며 유유자적을 즐겼던 곳이다. 유배라는 굴레에서 가감 없이 자신을 해방하고 뭔가 살아오면서 흐트러짐이 없었나 하는 자성의 목소리를 조용히 읊조리지 않았을까 나는 감히 생각한다. 뒤편 약천은 지금은 물이 말라 허전하지만 선생은 이곳에서 물을 받아 차를 끓였다. 앞마당 반석인 다조는 평평하고 큼직한 바위다. 차를 끓이는 부뚜막으로 사용됐으며 다산과 혜장 혹은 제자들과, 즉석에서 격식보다는 그곳 주위에 있는 조각 나무로 간이 의자를 만들어 차를 즐겼을 것이다. 정석(丁石)이 새겨진 바위는 그냥 다산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은 순수한 인간미의 발로가 아닐까? 아무 의미 없이 선생의 성(姓) 씨인 정과 돌 석을 새김은 때론 무료한 나날의 소일거리가 아니었겠나 추측해 본다. 아마 내 생각엔 다산 선생은 그때의 현실에서 은연중 혼자만 가져보는 반항의식이 조금은 배어 있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상항을 직시하면서 그 어려움들을 당신 것으로 승화하고 받아들이려는 반항적 삶이 아닐까? 어쩌면 오늘날 부조리가 만연한 이 시대의 삶에 정의로운 자들이 말없이 자기 할 일을 다하며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피치 못 할 운명에 순응하고 그때를 극복하는 자세로 새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다산 초당에는 네 채의 건물이 있다. 책을 집필하던 초당을 중심으로 좌편에 서암과 우편에 동암, 그 옆에는 천일 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서암은 제자들이 머물던 곳이고 동암은 서책을 보관하고 다산이 기거하며 손님들을 맞이하던 곳이다. 그리고 천일각은 다산이 고향이나 가족을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곳이라 한다. 다산은 이곳 초당에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유배 생활 18 년 중 10여 년을 이 초당에서 기거하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여유당집 등 500여 권이 넘는 책을 쓴 곳이다. 특히 해배 후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천문, 측량, 건축, 그리고 문학, 철학, 법제, 종교, 의술 등 그 시대의 해법의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인간적으로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 등에서 실학자로서 선비의 초연함을 내 보인 곳이다. 그는 승화된 생각으로 후세에 영감(靈感)을 주는 작은 씨앗으로 회화(誨化) 한 것이다.
다산 기념관은 그분의 배경인 출생과 성장, 관직과 유배생활, 해배 이후의 삶을 차례차례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은 곳이다. 그는 1762 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5 살 때 성호 이익의 실학 저서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고 경직되었던 당시의 유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해석하고 거기에서 실용성을 발견해 내 독창적이고 논리적 사고로 재정립한 성호의 학풍을 흠모하게 되었다.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관료의 면모를 다 하며 자기를 연마하였다. 그러다 정조 사후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 때 강진으로 유배 와 이익의 학풍을 완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산은 해배될 때까지 18 년 동안 이곳 강진에서 생활했다. 해배 후 고향에 머물다 1836 년 75 세의 춘추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뭔가를 추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닐까? 그건 우리의 숙명이고 우리가 해야 할 숙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옳다고 생각되는 가지가지 문제에 대해서 서로가 공감, 공생해야 하고 그걸 잘 운용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산은 개인적 궁극의 문제보다는 대아(大我)인 큰 차원에서 보편적 자아(自我)를 찾으려 노력하고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원성이나 양면성이 아닌 어떻게 하면 다 같이 더불어 잘 살아가는 삶을 지향했을 것이다. 누군가 사랑은 자기 헌신에서 발로 한다 했다. 그분은 이 초당에서 끊임없이 정의와 민중을 위하여 연구하고 몰입했지 않았나 하는 결론을 나는 감히 내린다.
다음은 사의제와 보은산방, 별서 정원을 가 볼 요량이다.
2018.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