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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터키 이즈미르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임병인 목사입니다. 먼저,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베를린 한빛교회 성도님들을 뵙고 말씀을 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성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제 마음이 참 감사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뜨거웠던 터키의 한 교회와 종교개혁의 바로 그 현장이었던 독일의 한 교회가 성령 안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 시대의 아픔과 회복에 대해서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고 영적인 중보를 시작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시대는 달랐지만 독일과 터키의 부흥이 있었던 그 날의 일들을 떠올려 보면, 참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이 두 교회를 믿음으로 만나게 해 주신 이유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의 터키는 옛 초대교회의 자리의 생명은 사라지고, 99% 무슬림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하고 있는 터키, 토르발르라고 하는 지역은 통계청 인구 대비 믿음의 사람들의 비율은 1%도 아닌, 0.001%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만 남아 있을 정도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이 나라에게 완전히 빼앗겨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계신 지금의 독일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독일로부터 터키로 복음을 통하게 할 수 있는 십자가의 다리가 믿음의 사람들이 띠를 띠고 연결 되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문이 사방에서 꽉 막혀버린 지금의 터키의 내부의 상황은 외부로부터의 믿음의 중보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결된 그 다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을 실어 나르는 교회와 성도들이 자유롭게 기쁨으로 오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나타나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저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여러분들께 소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독일 베를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분명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삶과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면서 세상의 역사를 믿음의 역사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시며, 세상을 축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1년을 살고 2년을 살아도, 독일 베를린 이 도시가 여러분 삶 전체에서 믿음이 구분되어지는 거룩한 기준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믿음의 백성들이 세상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살게 하신 베를린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고, 몸에 병이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그들의 회복을 구하고, 불화가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이 주신 평안으로 그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독일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전체주제와 관련해서 성회 첫째 날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 함께 1절부터 5절까지 읽겠습니다.
v.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v.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v.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v.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v.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본문의 시작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명절이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에서 유월절이었는지, 아니면 초막절이었는지 오순절이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만약에 그때의 명절이 유월절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3년을 넘어 4년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명절이 소개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북동 쪽에 한 작은 연못이 있는데, 본문의 배경이 아마도 그 연못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씌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연못 주변에는 병약한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그 연못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삼십팔 년이나 되는 아주 오래 지병을 앓아온 한 남자도 있었습니다. 다른 병자들과 함께 그 남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사람이 소개되고 있는 이유가 참 흥미롭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그렇게 많은 병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38년 된 병자가 소개된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알아 봤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다른 병자들보다 믿음이 더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직접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자신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매우 흥미로운 점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잘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을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38년 된 병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병 낫기를 위해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기도해 주라고 했는데, 정작 38년 된 병자는 병 낫기를 바란 적도 없고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준 사람도 본문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그는 참 많이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도 그의 이름 조차 소개 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무명한 사람이었고, 오랜 기간 병을 앓고 있어서 마음의 고통도 참 깊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외롭고 힘든 시간을 홀로 지내왔어야 했던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 가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리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십시오. 의로운 사람이 기도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말씀도 그렇게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보다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자신이 가진 병이 너무도 무거워서 병 낫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해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없어서 외로움으로 세월을 홀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보통 국내에 계시는 분들의 시각으로 보면, 해외에서 정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참 부럽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경제적인 부담을 지고서라도 자녀들 유학을 보내는데, 해외에서 자녀와 함께 사는 모습만 보더라도 많이 부럽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습니까? 해외에서 이민을 하는 분들이 현재 사는 모습만 보면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국내를 떠나서 지금 정착해 오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난과 갈등, 눈물, 외로웠던 일들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당장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부터 며칠 밤을 새도 다 말을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이민생활이 참 외롭습니다. 내가 약하고 병들었을 때, 누군가에게 나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알아서 나를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 있는 친척들과 지인들은 우리가 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 내면은 참 외롭고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오늘날 터키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큰 고비들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사람들 마다 삶에서 겪는 고비들이 저마다 다르고 다양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뇌에 물이 차 오르는 뇌수두증이라는 병을 앓으면서 삶의 고비들이 여러 번 왔습니다. 그 때문에 한 번을 해도 위험한 뇌수술을 무려 세 번이나 머리를 절개하고 받아야 했습니다. 말씀과 관련하여 저의 개인간증을 여러분에게도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 뇌수술은 1988년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증상은 여러 개로 나타났는데, 뇌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을 안 것도 2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국내 유명한 대학병원들과 한방병원을 다니면서 검사하고 또 검사했는데, 병원들의 답변은 똑같았습니다. 희귀병이니 죽을 때까지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의 나이가 9살밖에 안 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걷지를 못하는 겁니다. 옆에서 부축을 해 주면, 열 걸음을 못 가서 주저 앉고 또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언어와 지각능력도 가면 갈 수록 자꾸만 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7살, 5살, 4살… 나중에는 글도 말도 못하는 뇌성마비 증상과 같아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친구들이 따라다니면서 저를 놀려댔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내 몸의 변화는 너무도 큰 고비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면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기도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치료 하시오니 말씀을 붙잡고 계속 기도하라는 말씀만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습니다. 그때 저야 말로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누운 채로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던 본문 속 남자와 같았습니다. 누구한테 원망을 한들, 저의 하소연을 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이대로 죽으면 천국에서는 편안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극단의 일을 하려고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데스다 연못에서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저의 이모부의 실수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예약을 위해서 서울에서 사는 이모부에게 부탁을 하셨는데, 원래는 신경과로 예약을 했어야 했답니다. 그런데 이모부가 실수로 신경과가 아닌, 신경외과로 예약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셨을까요? 이모부의 실수가 오히려 저를 다시 웃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정말 포기하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가 아닌 신경외과로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MRI 촬영을 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똑 같은 MRI 촬영을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수십 번을 더 하면서 그 어떤 의사도 저의 병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신경외과에서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저의 주치의 선생님이 MRI 사진을 보시더니 상태가 너무 중하니 당장 수술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가 1988년도 올림픽이 열리던 해, 제가 첫 번째 뇌수술을 받던 해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수술을 받기 전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부모님께 여러 가지 사례로 주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술이 성공을 할 수도 있지만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오직 나을 수 있다는 상황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삭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의 마음은 다르셨던 것 같습니다. 삭발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냥 말 없이 우셨습니다. 내 아들이 이대로 수술실로 들어가면 잘 될 수도 있지만, 지금보다 더 아프고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모의 마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도 부모의 마음은 똑같으실 것 같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대신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게 바로 부모니까요.
주님의 은혜로 수술결과는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입술에서는 수년 동안 하지 못했던 “나를 고쳐 주신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감사합니다.”는 고백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한 이후에도 회복이 빨라서 다시 걸을 수 있었고, 쓰고 말하는 것까지 완전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전교 부학생회장을 했었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목소리가 좋아서 방송국활동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총학생회장까지 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후로 대학교 대학원도 한번의 낙오 없이 장학금까지 받아 가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로 군대도 다녀왔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이렇게 새롭게 회복된 내 삶을 날마다 자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저의 모습이 매우 교만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충북 제천에서 초임목회를 시작해서 그곳에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은 저에게 인생의 큰 두 번째 고비를 겪게 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데, 두 번째 뇌수술을 받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한 채로는 저를 주의 종으로 세울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상황을 보고 받으셨는지 지방 감리사님이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지금은 괜찮느냐고” 하시면서 목회는 계속 할 수 있는지를 물어 보셨습니다. 그때 저도 모르게 감리사님 앞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감리사님께 “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름 부은 종으로 삼으시고자 더 겸손해지라고 주신 경고인 줄로 믿습니다.”고 하면서 두 번째 뇌수술을 받고서 목회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때가 2007년도였습니다.
사랑하는 베를린 한빛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첫 번째 두 번째 뇌수술을 받기까지 오직 베데스다 연못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신 게 아니라, 연못 물이 나를 고쳐 준 거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야만 하는 내 몸만 중요했지, 나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몸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만 부끄럽지 않으면 됐지, 나를 낫게 하기 위해서 벌거벗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전혀 눈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베데스다는 어떤 곳입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서 베데스다 연못을 이미 거친 분들도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베데스다는 병을 고침 받은 곳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을 진짜로 고쳐주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신 곳이 베데스다입니까?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조차 자신이 회복되고 치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곳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6절부터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v.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v.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v.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v.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가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저보다 앞서서 물 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이 남자의 대화에서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것 몇 가지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이 남자를 알아 보셨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예수님을 몰라봤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이 남자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남자는 베데스다 연못 물로 들어가야 한다고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연못 물이 자기를 낫게 할 거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남자 사이에서 동문서답이 서로 오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남자에게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 남자는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남자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38년 동안이나 걷지 못했던 그 남자는 얼마나 기쁘고 좋았을까요?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남자는 그렇게 고침을 받아서는 안 됐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가 자기의 헛된 믿음으로 낫게 된 것이라고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뇌수술을 두 번씩이나 했었으면서도 수술을 받기 전까지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목사 안수를 곧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뇌 수술은 철저하게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아무개 교회 전도사가 뇌수술을 했다더라는 소문이 나간다면 그것은 앞으로 목회에 있어서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나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고쳐 주실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수많은 아픈 환자들 틈에서 나를 숨겨 줄 수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베를린 한빛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구하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병자들 틈에서 지난 날 여러분들의 수치와 부끄러움, 고통 외로움을 다만, 감추어 줄 수 있는 베데스다 연못입니까? 아니면 지난 날 나의 부끄러움을 이제는 당당하게 벗고 일어나게 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십니까?
저는 지난 날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했고, 아프게 했던 그 부끄러움을 다시 드러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까지 당당하게 세워주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 보혈의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시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했고, 그리고 부끄럽게 했던 여러분 안에 상처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모든 아픔과 상처들이 우리 주님 앞에서 모두 고백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6장 24절-26절 말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의 말씀이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도 가득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이어서 10절부터 16절까지 읽겠습니다.
v.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v.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v.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v.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v.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v.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v.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38년 동안 오랜 지병을 앓고 있었던 이 남자가 고침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갑자기 이 남자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은 이 병자를 위해서 축하해 주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남자가 침상을 들고 걸어갔던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율법이었던 ‘미쉬나’에 따르면, 침상은 그 위에 병자가 있었을 때만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침상 위에 있어야 했던 병자가 직접 침상을 들고 걸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남자가 위기를 당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율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고침 받지 못했던 자신의 장애가 치유된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군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문제는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그는 3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걷지를 못하다가 이젠 걸을 수 있게 됐는데, 정작 걷고 나서 보니 이제부터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연못으로 데려가 달라고 구걸했던 하루의 목적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목적이 없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베데스다의 은혜는 있으나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고쳐 주셨는데, 베데스다 연못이 나를 고쳤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을 낫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건강은 회복됐지만, 정작 나를 고쳐주신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사는 것입니다. 살아도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증을 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뇌수술을 받게 된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뇌수술 말씀을 세 번이나 드리니까 이제는 간단한 타박상 정도로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죠? 뇌수술은 한 번을 받아도 평생을 조심해서 살아야 하고, 두 번을 받았다면 그냥 그 상태로만이라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뇌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하면, 이제 내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의 이 말씀은 제가 세 번의 뇌수술을 받아오면서 이제는 절대로 부인할 수도 없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베데스다 연못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나를 고쳐 주신 분은 분명히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제가 터키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문의 마지막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16절 말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아픈 자는 고치시고 박해를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먼 이국 땅에서도 평안할 수 있고, 건강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고치시고, 고난을 받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께도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이 자리에 서기까지 아무도 모르게 몸과 마음도 많이 아팠고, 슬펐고, 좌절했던 시간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들을 모두 낫게 할 예수님이 계시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초대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우리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독일 이 땅에서 여러분 모두를 강건하게 세워주실 것이고, 이 땅을 축복할 수 있는 복의 사람들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강건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모든 고난을 받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날마다 가득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2017. 10.13, <터키 이즈미르 한인교회 독일 베를린 한빛교회 집회>, 설교: 임병인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