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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과 인사 나누는데요.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하면서 힘차게 인사 나누겠습니다.
한 번 더 우리 다짐하면서 옆에 분들하고 외치는데요.
우리도 부활합시다. 나의 삶 가운데 나의 신앙 가운데 또 우리 육신 가운데 주님의 부활의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여러분 오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로 우리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질문이 있어요. 정말로 부활을 믿습니까? 네 아멘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셨대요. 여러분 그 사실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혹시 그냥 덮어놓고
그냥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그냥 믿어 믿으면 믿어지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믿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좀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주변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아니 부활을 아예 믿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특히 자연과학과 역사 비평의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건 그저 초대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들의 주장 몇 가지를 한번 들어봅니다. 그들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면 먼저 첫 번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잠깐 쇼크가 와가지고 기절했다가 무덤에 묻히시니까 그거 우리나라처럼 땅에 묻는 게 아니고 거기는 굴에 넣어놓잖아요. 그러니까 굴에 들어간 상태에서 깨어난 거다 이렇게 일시적 기절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장면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은 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증언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 여인들이 새벽에 그 무덤에 가서 무덤이 열린 걸 보고 놀래서 이렇게 오는 장면을 보면서 이 여인들이 잘못 찾아가서 어두운 새벽이었기 때문에 잘못 찾아가서 다른 무덤을 보고 무덤이 열렸다고 착각해서 이 소식을 전했다. 오해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가가지고 숨켜놓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그렇게 거짓을 퍼뜨렸다.
또 어떤 이들은 부활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가르침을 기억하다가 심이 피곤했고, 심이 그 예수님에 대한 미안함 속에 있다가 환상을 보게 되었고 이게 실제이냐 퍼뜨렸다. 이런 이야기들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주장에 속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런 내용들처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거짓일까요? 꾸며낸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단군 신화의 이야기를 아는 것처럼 그런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성경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이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빌라도 빌라도라고 하는 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임을 우리는 역사적인 내용들을 통해서도 보게 되는데요. 빌라도의 보고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초기에 역사가인 요셉푸스라고 하는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제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 명확하게 역사적인 기술가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라고 하는 인물도요.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게 지금 성경에서 기록된 게 아니라 역사가들에 의한 기록에도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역사의 여러 가지 기록들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실존했던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아까전에 이게 거짓이 아닌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말했던 사람들의 그 이야기들을 반박해 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그 어두운 새벽녘이었기 때문에 착각했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어떻게 반박할 수 있냐면요. 예수님이 묻히신 그 무덤을 우리가 그 지역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요즘 공동묘지가 있잖아요. 공동묘지에 가면 묘들이 촘촘하게 있다 보니까 어두운 저녁에 가면 착각할 수 있는 그런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은 공동묘지가 아니에요. 부유한 이에 준비된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무덤이기 때문에 그 무덤은 구별될 수 있는 장소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이 성경 누가복음에 보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고 그들이 장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잠시 그 자리를 떴다가 다시 찾아옵니다. 절대 헷갈릴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또한 만약에 이것이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여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절대 기술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여인들은 사람의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받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증인으로 첫 번째 증인으로 여인들을 기술했다고 하는 것은 결코 거짓으로 꾸며낼 이유의 첫 번째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제자들의 실수한 이야기들, 베드로나 또 도마 이런 이야기들을 성경에 기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놓고 거짓으로 그것을 이야기했다고요? 그럴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가버렸어요.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 눈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예수님이 부활한 소식을 전하러 온 그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고 확인해 보자라고 말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이랬던 사람들이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거자로 살다가 모두가 순교당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일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한 일일까요? 이렇게 말씀드려도 그래도 뭔가 부족한데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까 성경에 기록한 그 기록자의 진실성을 나는 못 믿겠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또 성경을 전달하는 전달자들의 그 진실성을 믿지 못한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근데 여러분 한번 여러분들이 우리가 우리 삶에도 재판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법정에서 그 법정이 무엇을 통해서 이 판결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증인과 증거를 통해서 법에서 재판을 판결합니다.
근데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요. 부활의 증거가 분명히 실존합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증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실재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 때문에 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짐승의 먹이로 심지어는 살아있는 채로 불에 태워지는 그런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도 그들은 부활을 증거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 십자가에 달릴 때 다 도망갔던 사람들, 또 예수님의 장래의 그 과정에 전혀 참여치도 못했던 그 겁쟁이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졌던, 그리고 저 구석에서 숨어 지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부활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누가 감히 거짓말을 사기를 위해서 자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그들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을 지키는 거였어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지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라가 망해도 어디를 가서든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지 불과 몇 주 되지 않아서 그 유대인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지켜오던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기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3천 명이 5천 명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죠.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이 지켜왔던 전통을 한순간에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목격한 사람들의 목숨 내검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확실하고 큰 사건, 분명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들을 내려놓고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하다가 그들이 헛것을 보고 그들이 그것을 증거했다고요? 아닙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이후에 한 번만 모이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11번이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승천하실 때에는 500여 명의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사실은 확실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부활의 그 사실을 확신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 신앙에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활의 확실한 증거 가장 확실한 증거는요. 예수님의 가족들을 보면 압니다. 여러분 가족들을 전도하기 참 어려우시죠 정말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데 가족들 전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가 더욱 빛과 소음으로 녹아져야 어느 순간 그들의 마음이 움직일 거예요. 가족들 변화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가족들은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던 가족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변화된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앞장서서 증거하는 사람들, 초대교회의 리더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는요.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이 사실을 증거하고자 증거했고 그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증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학은 사실을 입증함으로 증명을 합니다.
그런데요 역사적인 사실은 증거로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네, 이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고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가 부활할 그때가 되면 정말 부활이 사실이었구나라고 하는 걸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앞쪽 고린도전서 15장 16절에서 1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우리 잠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아멘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우리의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오늘 몇 가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 한번 따라해볼까요?
어떤 어려움이 와도 부활 신앙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요즘 좀 우리가 코로나를 지나면서 또 교회적인 여러 가지 그러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움츠려 있던 것이 사실이죠. 어제 오랜만에 우리 성도들과 달걀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그냥 받아주는 사람도 있었고 또 그냥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궁금해하며 받는 분도 계셨고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것을 전한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셨나요? 어제 저녁에는 자전거를 타고 예전에 우리 교회에 출석했었던 우리 유초등부 학생들 그 아이들에게 달걀을 이렇게 전화하려고 아이들에게 연락하고 만나러 다녀봤습니다. 요즘 솔직히 전화해도 전화도 잘 안 되고 벌써 이제 코로나가 지나고 난 이후에 오랜 기간 아이들하고 이렇게 단절되어 있었던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애들이 연락이나 받을까 이 달걀을 좋아나 할까 그러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았어요.
근데 여러분 생각보다 이 시간이 벌써 흐르면서 잊어버린 게 아니라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 작은 것을 나누는데도 아이들이 고마워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잠시 들을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제 마음에 너무 이 코로나라고 하는 어떤 상황, 또 교회적인 어떤 그런 사람들의 인식 이런 것에 내가 눌려서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내가 더 확신 있게 증거해야 할
이것들을 주춤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그런 회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한 돈 100만 원치 뭉치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거 선물로 드립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한 봉투씩 챙겨주면서 나눠주러 다니라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신나게 여러분 이것 좀 받아가세요. 아마 외치고 마음껏 나누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쩌면 이 부활의 기쁨을 100만 원짜리 이 돈뭉치보다도 더 값어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이게 주눅들어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외부적인 어려움들이 분명히 있는 건 사실이죠. 지금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근데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이 복음의 증거 이 흐름에 있어서 늘 이러한 때는 존재했어요. 근데 그때 복음이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 증거됐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뭘까요? 오늘 본문의 51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잠자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나팔이 마지막 나팔이 부는 순간 홀연하게 우리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듯 우리도 분명히 죽게 될 그날이 있을 터이지만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도 부활을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에 더욱더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는 우리라면 이 소식을 모르고 죽음에 두려워 떠는 사람들, 여전히 세상에 얽매여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증거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이 있잖아요. 부활을 확신하신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힘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습니다. 죽음과 삶 사이는요. 단지 3분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우리가 한 3분만 딱 숨을 멈추고 있으면 우리는 찾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죠. 평균적으로 몇 초에 1.8명이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똑딱하는 사이에 한 2명 정도가 숨을 거두고 이 땅을 떠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 대상이 내가 될지 여러분들이 될지 누가 압니까?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는 그 존재로부터 언젠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근데 그것에 어떤 대응을 우리는 살아갑니까?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땅이 전부인 거예요. 이 땅에서 먹고 놀고 즐기자 이 땅에서의 삶을 우선순위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뭐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 유형도 있습니다.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생각을 하니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기대가 없는 거예요.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죽음 이후에 분명히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오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취해지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믿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분명히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이후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될 줄 믿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시작입니다. 갓난아이가 내 안에 태아로 있을 때 그 태아가 이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 엄마의 이 뱃속에서의 삶은 마감되어야 그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죠.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마감되어야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린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15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1절과 52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팔 소리가 나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아멘 여러분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부활하고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 나의 삶을 짓누르는 문제들, 또 나를 괴롭히고 있는 육신의 연약함들, 거기에 짓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그 두려움,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과 영생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더 힘 있고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부활을 온전히 믿고 그 부활을 증거하는 확신에 찬 사도바울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도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기록한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제와 같이 내게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죽음을 지금 앞두고 있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아멘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것이 좀 빠르고 좀 느리고의 차이밖에 없겠죠.
근데 여러분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왔느냐 그 사명을 얼마나 감당했느냐 그것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 주님 앞에 나아가 받아야 할 재판 가운데 묻게 될 질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든지 무너뜨리려고 했고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주님의 일을 힘썼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시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또 골로새서 1장 28절과 29절 말씀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 하노라.
아멘 예 사도바울은 자기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주님이 주시는 그 힘과 능력으로 늘 최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수고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크든지 작든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면서 우리도 또한 그 믿음을 전수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작든지 크든지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심으로 주님 앞에 갔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그렇게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모두 헛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모든 사람보다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행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그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 복 있는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우리 갈라디아서 말씀을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입니다. 시작,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또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여러분들의 삶의 터전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느라고 수고하고 애쓰는 여러분들의 그 땀방울, 그 눈물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119의 영혼으로 품고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그 사람에게 듣는 어떠한 말들 또는 무시당함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여러 면류관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생명의 면류관을, 사명을 잘 감당한 이에게는 의의 면류관을,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순교자에게는 순교의 면류관을, 목자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영혼을 구원하는 자에게는 기쁨의 면류관을, 영적 승리자에게는 자랑의 면류관을, 다양한 면류관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며 땀 흘리며 수고하고 애쓴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가 주님 앞에서 나아갈 때 우리의 눈물을 씻겨주실 그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모든 눈물에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잊지 않는 그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림이 없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더욱더 주님의 입에 힘써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별히 이 부활의 신앙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춤했던 우리의 모습을 다시 정리하고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받을 그 상급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