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념처 수행을 심수관이라고도 부르며,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정확히 아는 수행법입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마음을 내려놓든, 전환하든 할 수 있으니까요!!!
아래는 맛지마니까야 염처경 중 심념처 수행에 관한 부처님이 말씀입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탐욕을 떠난 마음을 탐욕을 떠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위에서 집중된 마음은 번역 오류로 생각됩니다.
왜냐면 모든 쌍이 대치법, 즉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이죠.
산란한 마음의 반대는 가라앉는 마음입니다. 즉 혼침이죠.
산란한 마음은 들뜬 상태를 말합니다. 즉 도거입니다.
고귀한 마음을 고귀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고귀하지 않은 마음을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 알아 차린다.
이와 같이 안으로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밖으로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안팎으로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마음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혹은 오직 앎(知)만이 있고 확립된 마음챙김이 있을 때 까지,
'마음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위의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을 따라가면서 보기에 심념처를 심수관이라고도 부릅니다.
- 맛지마니까야, MN010, 염처경[Satipatthana Sutta], 초기불전연구원, 대림스님 역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의미...
마음은 크게 생멸하는 생멸심과 초월적인 진여심이 있는데,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마음이 진여심에 기울어져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마음이 생멸심에 기울어져 있는 채로는 생멸심이 생멸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니까요.
맛지마니까야 염처경 중 심념처/심수관 해설. 사진 : pinterest.co.kr
다음은 대승의 심념처/심수관 수행법에 대해 알아봅시다.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찰하는가?
곧 보살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건대,
이 안 마음에 세 가지 모습이 있으니,
생(生) 주(住) 멸(滅)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일정한 실제 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도 없으며,
과거 미래 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성품 없고 모습 없으며,
또한 내는 이도 없고 나게 하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으로는 뒤바뀐 생각[心想]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항상 깨끗한 모습이거늘
객진번뇌[客煩惱]의 모습에 집착되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지말에 진실한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지나간 시간,
다가올 시간,
현재의 시간도 없으며,
빛깔 없고 형상 없고 대할 수도 없다.
다만 뒤바뀐 허망에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진실됨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이라 한다.
마음의 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모습이 없는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아나니,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로 생멸하는 법을 얻거나
더럽고 깨끗함을 분별치 않으니, 마음의 청정을 얻는다. 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객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