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형제, 부모·자식 관계에서 의외로 불협화음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아버지 자식이 3남 4녀였지만….
큰어머니 소생 4명과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갈등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소생인 우리 삼남매가 세 살 터울로 같은 생활권(대구)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니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에 부모가 가세하면 불화가 커진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누님(조옥 0)이 대구로 시집을 온 후 나는 고등학교를 대구 누님 집에서 다녔다.
3년을 같이 살았죠.
서울 취업해서 1년, 군 생활 3년, 4년 후에는 또 같이 살았다.
결혼해서 독립할 때까지 동거인으로....
형(조0연)은 파월 병으로 군 근무를 마치고 1973년에 제대했다.
1974년 26세에 선봐서 덕개 처녀와 결혼을 했다.
24세 나하고 동갑이었다.
나는 휴가를 나와서 형수 동네서 하는 전통 혼례에 참석했다.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귀대해서는 결혼 선물로 여성 교양 전집 24권 세트를 할부로 사서 부쳐 주었다.
이듬해 큰 조카가 태어났다.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셨다.
2년 후 둘째 조카가 태어났고, 우리 부부도 첫딸을 낳았다.
형은 이왕 가업을 이을 것이면 가장답게 성의 있게 영농해야 하는데.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해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처음 결혼 해서는 새마을 지도자 교육도 연수하고 의욕을 보였는데 미혼 때 하던 버릇이 재발했나 보다.
형수가 시골 생활이 싫다고 도시로 나가 살자 하니 더욱 마음을 못 잡았다.
농사도 건성으로 지었다.
논은 거의 당갈림 이라는 소작 주고 밭은 거의 어머니가 지으시고,
형수는 농사일은 전연 안 했다.
형이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형수가 자꾸 대구에 가서 살 방도를 구하라고 하니 대구에 내려와 우리집 단칸방에 한두 달씩 있다가 갔습니다.
입성도 없이 단벌로 몇 달을 지낼 수가 있나요.
아내가 시숙 양말, 속옷, 등도 사와야 하고….
내가 소개(삼익 쌀통, 삼화 열기, 등)한 공장에 면접 보기 위해 Y 셔츠와 양복도 맞혀 주고 했습니다.
구직이 쉽지 않았습니다.
기술 없는 형이 주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노동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피를 나눈 형제로서 뭐든지 도움을 주려고 고심 끝에 내가 하는 전기, 전자 판매점을 차려 줬습니다.
달성동 달성 시장 입구에 성일전자(큰조카 이름)로 간판을 달았습니다.
가게엔 방이 달러 있어서 형 집 4식구가 살게 됐습니다.
형수가 소원을 푼 셈이죠!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0만원에 계약했습니다.
보증금 200만 원은 자형한테 부탁해서 구했고,
시골에서 300정도 지원을 받았습니다.
진열, 상품구입은 전적으로 내가 했고, 수리, 판매까지 거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형수는 셋째를 낳았습니다.
우리도 같은 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1년 반을 하더니 못 하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나는 우리 가게 일도 바쁜데 죽을 힘을 다해서 거들었는데 허무했습니다.
못 하겠다는데, 도리가 없죠.
진열 상품은 아내의 반대에도 할 수 없이 내가 다시 회수해 왔습니다.
그 금액이 200만 원 정도 됐습니다.
우리 가게 골목에 방 2칸짜리 한옥을 200만원 전세로 이사 왔습니다.
또 만기로 구평리 아파트 250만 원 전세로 이사를 시켰습니다.
그곳도 만기로 내당아파트를 전세 300만 원에 이사했습니다.
미결 금액이 100만 원 정도 남았습니다.
형은 집만 이사 갔지, 직업이 없이 놀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사형(누님 시4촌 동생)하고 아파트 모델하우스 본보기 사무실 내겠다고 50만 원 가져가서 동업 하다가 그만두고 1년 동안 나머지 50만 원을 거의 다 받아 갔습니다.
노는 것을 보다 못한 누님이 자형 공장(대한특수)에 취직을 시켰죠.
누님이 칠성동 광명아파트로 이사 가고, 이 층 건물 독채 누님 집을 형에게 무상으로 살게 했습니다.
각종 세금도 내주고,
고향에서 아버지에게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은 누님이 두 동생의 언덕이 되어 주는 형세입니다.
자의든 타의든지 형은 누님 덕분에 한 세상 잘 살았습니다.
본인은 알고 있을지?
형수는 어려운 시골 친정에서 큰 사람치곤 순수하지도, 착하지도, 남을 배려 할 줄도 모르는 사람 입니다.
이기심만 가득했죠.
내가 제대하고 대구에 독립해서 나올 때 아버지가 주신 200만 원과 내가 모은 200만 원으로 동업하고 약간의 실패도 하며 나 스스로 다른 도움 일절 없이 일구어온 삶인데….
형수는 우리를 시기 질투했습니다.
형수는 결혼하고 6년을 고향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작은아들(나)에게 양식 부쳐주는 것도 반대했습니다.
큰아들 먼저 독립 시켜주는 게 우선인데 시동생 먼저 독립시켰다고 늘 불만을 했습니다.
나는 전기, 전자 기술이 있는 사람이고, 16세 이후는 대구가 생활 터전이었으니까 이른 독립을 했죠.
형은 기술도 없었고, 부모 의존적인 사람이니까 스스로 독립할 엄두도 못 내는 사람입니다.
잘난 누님 덕분에 직장, 집도 구하고 고성동에 정착을 했습니다.
몇 년을 잘 살았습니다.
누님이 돈이 급해서 형에게 이사비를 주고 그 집을 팔았습니다.
형수는 잘사는 시누가 친정 대를 이을 장남에게 집을 사줘도 모자라는데 쫓아낸다고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부근 삼진아파트로 이사는 갔습니다.
없는 살림에 자식 3명 키우기 힘들다고 부모님께 늘 돈을 요구했습니다.
땅도 제법 팔았습니다.
1984년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병석에 누워계셨습니다.
장남 사랑이 대단 하신 어머니는 나한테는 말도 없이 급히 형 앞으로 상속했습니다.
고향마을 사람이 귀띔을 해주어서 알았는데 병석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다툴 수가 없어서 참고 있었습니다.
한 달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선산의 큰 어머니 산소를 파묘하고 아버지와 합장을 해서 모셨습니다.
어머니께 상속에 관해서 제 뜻을 얘기했습니다.
어머니1/2, 나머지는 3남매가 똑같은 지분이라고, 내 지분만큼은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약 8마지기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세 마지기를 나한테 상속해 놓았는데 섭섭하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형이 가게로 찾아와서 나한테 쌍욕을 하고 슬 주정을 부렸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현금 500만 원을 주셨습니다.
누님은 애초에 상속에 전연 욕심이 없었고….
제사를 형이 대구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 후부터 형수가 노골적으로 싫은 띠를 냈습니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내려오시면 아파트 문을 안 열어 주고 홀대했습니다.
시골서 바리바리 싸 온 농산물은 수위실이나 현관 앞에 놓고 우리 집으로 오셨습니다.
어머니만 보면 쥐꼬리 월급에 살기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푼돈 모아놓은 것 죄다 가져다 바쳤습니다.
폐물도 몽땅 건넸습니다.
큰집 권리, 제사 부심이 도를 넘었습니다,
50년 동안 적잖이 선물도 했슨데 감사하다, 고맙다 말 한마디를 한 번도 할 줄 모르더군요!
자기는 조카들에게 양말 한 켤레 사준 적도 없으면서….
2005년경엔 어머니를 넘어뜨려서 뇌진탕으로 문성병원에 7개월 입원도 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동산병원에 눈 수술 했습니다.
급성 맹장 수술후 근 한 달을 입원했습니다.
형수는 병원비 한번 낸 적이 없습니다.
퇴원 하루 전부터 오지를 않습니다.
어머니가 버릇을 그렇게 들였습니다.
형 집에 있다가도 병원 갈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시키더라고요.
얼마나 추잡을 떠냐면~ 병원에 형 내외가 다 따라와서 수납 창구 앞에 가면 돈 안 쓰려고 한 손엔 현관문 손잡이 한 손은 형의 허리띠를 꽉 잡고 있다가 내가 계산을 끝내면 놓아 줍니다.
그런 행동은 명절에 고향 오갈 때도 여러 번 연출합니다!
기차 매표소에서, 버스 매표소에서, 슈퍼에서, 식육점에서도, 열 천안에서도 벌어집니다.
뭐든 자기 식구만 사서 먹습니다,
우리 애들은 처다보고 있는데….
2013년~19년까지 6년간 어머니 투병 중일 때 간병 한번 안 했습니다.
평생직장 한번 안 다닌 사람입니다.
병원 방문도 다섯 손가락 안입니다.
지금은 제사 일절 안 지냅니다.
안보니 우리가 살 것 같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형이 더 밉습니다!
2022년에 우리 부부와 딸네 가족, 아들 가족 다해서 10명이 문경 쪽으로 2박3일 휴가가 잡혀서 고향 집에 묵으면 좋겠다 싶어서 형에게 이틀 집 좀 쓰겠다고 하니 형수한테 물어보고 연락한다고 합니다.
잠시 후. 안 된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이게 가족입니까?
남보다도 못한 거죠!
2년 동안 소식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