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아 청춘아’ 가수 강민
광주 주재기자. 대덕중28회 장정윤(장은실)
2014년 11월 21일 오후 7시 광주 달콤 커피전문점에서 강민 가수(회진, 대덕중23회 동문) 후원 음악회이자 팬 사인회가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이주남 재광 동문회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동문님들과 팬클럽 회원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열띤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강민 가수는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었지요. 삶의 철학과 사연이 담긴 시 같은 가사에 예술적 감성과 혼을 불어 곡을 만드는 싱어 송 라이터였습니다.
섹소폰과 기타를 연주하며 청중을 매료시키는 감동의 아이콘 그 자체였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강민 가수이자 자랑스러운 선배님과 담소를 나누며 그가 걸어온 외길 인생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선배님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릴 적 회진 언둑길(회진과 명덕을 연결한 방파제)에서 저녁마다 선배님들과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지요.
중1때부터 선배로부터 기타를 배웠는데 빌린 기타까지 아버지가 일곱 개 정도 부숴버렸을 겁니다.
가수 꿈을 키우게 된 계기도 고향과 밀접해요.
명절이면 열리는 콩쿨대회 참가하여 냄비도 타고 솥단지도 타면서 언젠가 이런 콩쿨대회에 정식으로 초청받는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1989년도에 제가 최초로 작사 작곡한 노래 <꿈속의 고향>에 그 마음이 그려져 있어요.
회진 고향 바다가 개발로 자연의 갯벌도 사라지고 그 시절 그 사람도 떠나고 없기에 꿈결 같은 고향의 정겨움을 노래하고 싶었을 겁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요.
고향하늘 노을 빛, 굴뚝의 하얀 연기, 어머님의 된장국 냄새, 언둑길 노래 등 간절한 그리움의 모티브들이었죠.
그래서 첫 번째 팬사인 음악회도 내 고향 대표 도시 광주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꿈을 키워 온 여정, 강민 가수의 히스토리가 궁금해요.
광주 석산고 다니던 시절, 당시 유행하던 막걸리 고고장에서 가발 쓰고 밴드활동을 했는데 때마침 놀러온 담임선생님에게 적발되어 정학를 당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음악이 좋아서 어디서든 발산하고 싶었었지요.
군인이 되고 싶어 육사에 지원했다가 불합격되자 해병대에 자원입대합니다.
그곳에서 김흥국, 최정범 등의 가수들과 인연을 맺게 되고 군대에서 음악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제대하고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한 스테이지 노래하면 1,000원을 받았지요.
종로에서 미아리까지 걸어 다니며 그 돈을 아끼고 모아서 좋은 악기 구입하는데 썼습니다.
그러다 일본 야마회사의 째즈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론과 실기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였죠.
그 후 김태화의 “라스트 챤스”와 지금은 고인이 된 김현식 “돌개바람”밴드와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가수 활동과 앨범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세요.
현재 6집 앨범까지 발표했습니다. 저는 싱글 음반보다 정규 앨범을 고집해 왔어요.
스스로 나태해짐을 막고, 음반에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였죠.
이번 앨범은 “위대한 탄생” 밴드가 연주 세션을 도왔는데 다소 제작비가 많이 들더라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
요즘 이쪽 PD들이 성의 없는 가수들을 향해 강민처럼 만들어 오라 주문할 정도랍니다.
더 기쁜 소식은 제 노래 <세월아 청춘아>가 방송 횟수, 에어 모니터 집계하는 저작권협회의 “챠트 코리아”
성인가요 부문에서 3주 연속 탑 텐에 진입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2위에 랭크되어 있네요. 제가 하는 대중음악의 가치는 언젠가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과 자부심이 오늘을 있게 한 것 같아요.
성인 가요 중 트롯의 장르는 단순하면서도 경쾌하고 기쁨과 슬픔의 감성을 표현하기 안성맞춤이죠.
우리 문화적 정서에 맞기에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 받아왔답니다.
축하합니다. 앞으로 계획과 천관지 향우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세요.
저를 태어나게 하고 키워내고 꿈을 길러준 고향은 제게는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습니다.
따뜻하고 소박한 고마운 공간이었지요.
이제는 제가 고향 후배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34년 노래 외길 인생동안 타향 가수들이 부럽고 아쉬운 적이 많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향우 행사 때 고향 출신 가수들의 처우는 좀 홀대에 가까웠습니다.
지명도 있는 인기 가수의 출연료는 급에 맞게 책정하면서 출신가수는 응당히 와서
출연하되 그 대가는 아는 처지라고 헐값의 출연료를 지불했었지요.
역지사지 해보면 무명의 설움을 내 안방에서 더 아프게 받는 격이라 할까요?
더는 아니더라도 정상적으로 처우를 개선해준다면 고향의 무대에서 혹은 향우들 앞에서
더욱 기 펴고 신명나게 실력 발휘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이름나고 성공하면 무형의 자산 봉사, 재능 기부하면서 고향의 존재를
더 깊이 새기고 누군가의 언덕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기에 말입니다.
강민 대표곡 : 세월아 청춘아, 남자의 일생, 남자답게, 해운대 밤거리,
나 아직은, 큰소리 뻥뻥, 꿈속의 고향, 한, 강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