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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북한산) 무량사
2026년 05월 01일(금요일)
한국불교 법화종에 소속된 사찰로 북한산성 입구에 있습니다.
조선 말 고종(高宗)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 1854-1911)가 창건하여 백일기도를 올리고 영친왕(英親王)을 낳은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당(願堂) 또는 약수암(藥水巖)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무량사(無量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절은 경기도 북한산성의 대서문(大西門) 내 입구에 있습니다. 1895년(고종 32)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가 창건한 것으로 전합니다. 황귀비 엄씨는 지금의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린 후 아들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후 절은 황귀비 엄씨의 원당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는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귀비 엄씨가 영친왕을 임신한 시기는 고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897.2)의 시기여서 그녀가 무량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습니다. 황귀비 엄씨는 영친왕을 1897년 10월에 출산하였습니다. 무량사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이라고 불렸는데, 1980년 무량(無量)이 주지로 오면서 무량암이라 하였습니다. 후에 다시 무량사로 사찰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절의 건물로 1902년에 지은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약사전에는 황귀비 엄씨가 모시고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 있습니다. 경기도 전통사찰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대서문
대서문 각자
辛卯六月十三日 始役 九月初十日完畢 (신묘년 유월 십삼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초십 일에 완성하였다.)
都廳書員 洪萬秋 外策應 書員 林春蕃 外策應 庫直 韓世萬(도청서원 홍민주 외책응 서원 임춘빈 외책응 고직 한세만)
官 官金□□□□□□ 李先立 四牌 (관 관김 석수 □□□□□□ 이선립 사패)
누혈(漏穴)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습니다.
무량사
무량사(無量寺)
북한산성 입구인 대서문(大西門)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고종의 후궁인 순빈(淳嬪) 엄(嚴)씨와의 인연으로 사찰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순빈은 지금의 무량사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바로 영친왕 이은(英親王李垠: 1897~1970)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절은 순빈의 원당(願堂)이 되었으며 일반인에게는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는 약사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북한산성의 방어를 위하여 승병을 주둔시켰던 승영사찰은 아니지만, 1900년 전후에 제작된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어 경기도 전통사찰 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약사불이란 질병 치료, 수명 연장, 재앙 소멸 등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를 말하며, 산신탱화란 비단이나 종이 등에 산신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 수 있게 만든 그림을 뜻합니다.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무량사(無量寺) 편액
무량사 범종
석조미륵불입상
석조미륵불입상은 1984년에 조성되었습니다.
연화대좌에 미륵불을 봉안하였습니다.
무랑당 부도
공덕비
산신당
산신이 호랑이를 따고 앉아 있습니다.
앞에 약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 약수로 인해 약수암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웅전
대웅전(大雄殿) 편액
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전
본래 대웅전으로 사용하다가 2005년에 대웅전을 새로지어 이전하고 약사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사전(藥師殿) 편액
약사전 내부
석조 약사불좌상
약사전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은 귀비 엄씨가 이곳에 산신각을 지을 무렵에 봉안된 것이라고 전하는 불상입니다.
약함을 들고 있는 이 약사불은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약함을 들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으며, 하체의 조각수법은 간략화시켜 신체에 비해 무릎 폭이 좁아 다소 불안정해 보입니다.
또 어깨 부근은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회칠을 해놓아 본래의 모습은 잘 알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약사전 내부에 용꼬리가 보입니다. 황룡과 청룡의 꼬리입니다.
칠성탱
무량사 산신탱
약사전에 봉안된 산신탱은 절의 연혁으로 보아 대략 1895년에서 1906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면 가운데 호랄이의 변신인 산신이 기암괴석 위에 않아있고, 호랑이가 그산신을 감싸고 있는 형식입니다.
색이 퇴색하여 전체적 특징을 살필 수 없으나 조선 말기에 그려진 이 산신탱으로 절과 관련된 순빈엄씨와의 관련성은 귀중한 자료라 하겠습니다.
중성문
부왕사지 삼거리
대남문 2.3km, 부황사 0.5km, 산성탐방지원센터 2.9km, 부왕동암문 0.9km
산영루(山映樓) 주변에 있는 북한산성 선정비군과 북한승도절목
북한산성 수비 최고 책임자의 재임시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현재 26기가 남아 있는데, 이중 80%는 탐관오리로 밝혀진 인물들입니다.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
이 암각문은 1 955 년 철종 6에 새긴 북한승도절목 으로 모두 325자이다. 명문에는 승병대장인 총섭울 임명할때 예상되는 페단을 없애기 위한 규약 3가지를 제시해 놓았다 이를 통해 승영사찰이 피폐하여 승도가 흩어지고 있었던 사실과 그 원안이 총섭의 부적절한 임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때를 전후하여 산성 밖의 승려가 총섭에 임용되기 시작한 것과. 불공평한 임용을 막기 위하여 대수결의 비밀 투표를 요구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산영루 아래 계곡에는 김성근, 심상훈의 이름 각자가 보입니다.
이 자는 1902년 당시 탁지부대신으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심상훈은 갑신정변을 꼰질러 개화파의 정변을 막고, 동학혁명을 진압한 인물입니다.
북한산성 북한천 암반위에 세워진 산영루(山映樓)
경기도 기념물제223호 산영루는 북한산성 내 위치한 대표적인 누각입니다.
산영루의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중기 1603년 문인인 이정귀(李廷龜)가 지금의 북한산 일대를 유람한 뒤 남긴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산영루 옛터로 내려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한산성의 축성시기인 1711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의 산영루는 10개의 주춧돌 등 그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고양시가 고양600년 역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과거 사진자료 등을 통해 원형을 충실히 반영하여 2014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현재 정자는 2014년에 복원한 정(丁)자형 정자로 누하에 사다리꼴 석주를 세우고 위에 마루를 깔고 평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정면 중앙 맞은편 계곡쪽으로 마루를 연결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시
游客住吉樹間(유객주공고수간) 고목 숲속에서 나그네 발걸음을 멈추면,
亂流爭響夕陽山(난류쟁향석양산) 어지런 물결이 석양 저문 산을 울린다.
此亭自勝地(차정자고칭승지) 예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이 정자에 올라,
徙倚華藺儋忘還(사의화란담망환) 꽃난간 기대서니 편히 돌아가길 잊게되네
이덕무는 ‘북한산 유람기’와 별도로 산행에서 얻은 감흥을 시로 썼는데, 41편이나 됩니다. 이 가운데에는 「산영루」를 읊은 시도 들어 있습니다.
寒木深山動九秋(한목심산동구추) 차가운 숲 깊은 산 가을이 서렸는데
石橋東畔得高樓(석교동반득고루) 돌다리 동쪽 언덕 높은 누각 서 있구려
漱泉已有翛然意(수천이유소연의) 샘물에 양치질하니 속세를 벗어난 듯
休向人間說此遊(휴향인간설차유) 이 같은 신선놀음 남에게 말하지 마소
산영루(山映樓) 편액
산영루의 멋드러진 편액은 서예 대가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1941~2024) 선생이 2014년에 쓴 작품입니다. ‘山’자의 가운데 솟은 ‘大’를 닮은 자획과 ‘영(暎)’자의 오른쪽 아래 ‘大’, 그리고 ‘루(樓)’의 오른쪽 아래 ‘女’자가 서로 유사한 모양으로 댓구를 이루며 시각적 운율을 느끼게 되어 한편의 시를 보는 듯합니다.
서각은 목우 조정훈 ( 木牛 趙丁勳)입니다.
산영루 편액 크기는 60cmX140cm입니다.
山眏樓(산영루)/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 1762~1836)
巖蹊在斷見危欄(암헤재단견위란)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雙腋浠浠欲羽翰(쌍액영령욕우한)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十院疎鐘秋色暮(십원소종추색모)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 빛 저물어가고
萬山黄葉水聲寒(만산황엽수성한) 온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차가워라
林中繫馬談戯作(임중계마담해작) 숲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꽃 피우는네
雲裏逢儈外貌寬(운리봉승예모관) 구름 속에 만나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日落煙罪鎖蒼翠(일락연비쇄창취) 해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行廚已報進杯盤(행주이보진배반)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북한산 산영루 복원 중수기
북한산성 선정비군(北漢山城 善政碑群)
태고사로 가는 길목에 북한산성선정비군의 비석들이 보입니다. 이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의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로, 현재 26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비석을 세워 비문을 기록한 선정비가 대부분이며, 따라 비석을 세우지 않고 암벽에 비문을 세긴 선정비도 있습니다. 이들 선정비의 건립시기는 모두 19세기인데, 이 시기 북한산성의 관리는 총융청과 무위소가 맡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문에 해당 관청의 관리책임자였던 총유사와 무위소 제조, 경리사의 선정을 기리고 있습니다.
비석의 인물 중 중요한 인물로는 총융사 신헌, 총융사 김병시, 총융사 김병기, 경리사겸선혜당상 민영준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임오군란(1882)때 모래 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였다가 살해된 무위제조겸도통사 민경호(대원군의 처남이자 고종의 외삼촌)의 애민청덕선정비도 있습니다.
중흥사(重興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末寺)입니다.
북한산중흥사지(北漢山重興寺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성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있는 옛 절터이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내의 승영 사찰(사찰 11곳, 암자 2곳)과 승병 350여 명을 관리하고 지휘하던 승군 사령부가 있던 사찰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인 1103년(숙종 8)에 주조된 금고(金鼓)와 1344년(충혜왕 복원 5)에 만들어진 향로(보물 제321호)에 ‘삼각산 중흥사’라는 명문이 있어, 12세기 초 이전에 사찰이 이미 세워져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북한산성의 축성 경위와 시설물을 기록한 '북한지北漢誌'(1745)에 따르면 중흥사는 30여 칸 규모의 사찰에 불과했지만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성 시기에 대규모로 증축해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숙종이 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벌인 대대적인 축성 사업 중 하나였습니다.
북한산성 내에는 11개 사찰에 승군이 주둔했는데, 승군의 총 지휘자인 도총섭이 중흥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당시 중흥사에는 삼존불상을 봉안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만세루와 산신당, ‘중흥동문’(重興洞門)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 등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915년 홍수로 인해 무너진 후 다시 짓지 못했습니다. 이후 폐허 상태였다가 2012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하였습니다.
최근에 복원한 중흥사
최근에 복원한 중흥사
노적봉 남쪽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위치한 승영사찰(僧營寺刹)로 산성 내 승영사찰을 관장하는 절로 측성 당시 30여 칸의 작은 절이 136칸으로 증축되었습니다.
이곳엔 승영사찰을 총지휘하는 도총섭이 머물던 곳입니다.
북한선성을 축성한 숙종은 승영사찰로 하여금 수비, 관리토록 하였는데 거기에 필요한 승군을 전국8도 사찰에서 징병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승군의 정원이 360명이었는데 1년에 6차례 교대로 중(스님)을 징발하여 산성 내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등 11개 절에 나누어 배속시켰습니다.
각 절마다 수승(首僧) 1명과 승장(首將) 1명을 두고 이들을 총괄하는 승영(僧營)을 설치하여 승대장을 임명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게 했습니다. 그 승대장(僧大將)이 머물던 절이 중흥사였던 것입니다.
만세루
나라가 만세토록 발전하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 긴 누각으로, 이 만세루는 중흥사 대웅전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만세루(萬歲樓) 편액
편액 글씨는 조선 23대 국왕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쓴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순조의 장자였던 효명세자가 쓴 만세루, 전륜전의 편액 탁본입니다.
만세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중흥사 대웅전
중흥사(重興寺)는 북한산성 내의 승영 사찰(사찰 11곳, 암자 2곳)과 승병 350여 명을 관리하고 지휘하던 승군 사령부가 있던 사찰입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인(1103년 속종 8)에 주조된 금고와 1344년(충혜왕 5)에 만들어진 향로(보물제311호)에 '삼각산 중흥사'라는 명문이 있어, 12세기 초 이전에 사찰이 이미 세워져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불로 문수보살,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지장보살
신중탱
전륜전
전륜전(轉輪殿) 편액
만세루 뒷편
템플스테이 숙소
봉성암 갈림길
백운대 2.2km, 북한산대피소 0.6km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3.4km
북한 54-01 이정목 해발 529m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3.5km, 백운대 1.9km
용암사지(龍巖寺址)
용암사는 북한산성 내에 있는 승영(僧營)사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1711년(숙종37) 북한산성을 쌓을 때 전국이세 승병이 동원되었는데 이떄 승병이 머물던 사찰 11곳과 암자 2곳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었습니다.
이 승영사찰의 승병은 산선이 완성된 후에 삼군문(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군사시설을 보조하여 산성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승영 사찰에는 법당과 같은 신앙공간도 있었지만 무기고와 군량 창고 등과 같은 군사시설이 더 중시되었으며, 승병은 산성이 완성된 후에 삼군문의 군사시설을 보조하여 산성 수비를 맡았습니다. 승병 사찰은 갑오개혁(1894)때 승병이 강제로 해산되어 쇠락해졌으며 한국전쟁 당시에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북한지(北漢誌 1745)에서 용암사는 일출봉 아래에 있으며, 87칸이고 북한산성을 축성한 후에 창건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용암사는 승병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인근에 있는 용암문의수비와 관리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암사지 석탑(龍巖寺址 石塔)
용암사 터의 석탑은 남아 있는 부재의 형태와 크기로 미루어 높이 6m정도의 삼층석탑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탑신이 놓였던 기단부의 갑석과 석탑의 중심부였던 탑신 및 지붕에 해당되는 옥개석 일부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용암사지 석탑을 복원하면 9세기에 만들어진 경주 남산 용장사곡삼층석탑이나 창년 퇴천삼층석탑과 유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교의 탑은 인도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교가 이웃 나라에 전파되면서 탑의 형식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각 나라마다 다양하게 발전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