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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14절 (믿음이 헛것이 되고)
고린도전서 1장 17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장 15절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9장 3절 (우리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고)
빌립보서 2장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이 다섯 번의 용례 중, 오늘 우리가 신학적으로 집중 고찰하려는 최고의 정점 구절이 바로 마지막 빌립보서 2장 7절의 "자기를 비워"입니다. 이 구절 속에 주님의 비우심(케노오)이 찬란하게 장치되어 있어, 이 단어를 명사화하여 '케노시스 신학'이라는 위대한 기독론 칭호가 정립된 것입니다.
참고로 이 단어의 형용사 형태는 '케노스(Kenos)'이며 '빈', '헛된', '속이 텅 빈', '거저 주는'이라는 뜻을 지녀 신약에 총 18회 등장합니다. 또한 부사 형태인 '케노스(Kenōs)'는 '헛되이'라는 뜻으로 야고보서 4장 5절("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되이 생각하느냐")에 딱 한 번 등장하는 특수 부사입니다.
나아가 이 '케노(비움)'라는 어원은 신약성경 안에서 다른 단어들과 아름답게 결합하여 정교한 '복합 명사'들을 도출해 냈습니다.
그 첫째가 빌립보서 2장 3절에 나오는 '케노독시아(Kenodoxia)'입니다. 이는 비움을 뜻하는 '케노'와 영광을 뜻하는 '독사(Doxa)'가 신학적으로 결합한 단어로서, 내용물 없이 겉만 번쩍이는 빈 영광 즉 '허영(Vainglory)'이나 '이기적인 야심'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둘째는 갈라디아서 5장 26절에 등장하는 형용사형인 '케노독소스(Kenodoxos)'로서 '헛된 영광을 구하는', 즉 '허영심이 많은 성품'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케노의 어원은 존재의 내용물을 비워내는 상태를 일관되게 대변합니다.
2. 빌립보서 2장 "자기를 비워"의 신학적 주석
케노시스 신학(Kenotic Theology)은 영어로 'Kenotic Theology'라고 명명하며, 우리말로는 투명하게 '비움의 신학'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죄인의 모양으로 내려오실 때, 과연 "자신의 신성 존재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비워내셨는가?"를 추적하는 웅장한 성육신 신학입니다.
이 비움의 장엄한 찬가가 기록된 빌립보서 2장 5절~8절의 원문 맥락을 성경의 주석학적 안목으로 정독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말 개역한글판 성경을 보면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라고 어학적인 '오타(표기 오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어'라고 적으면 방이 텅 비어 있다는 자동사적 뉘앙스가 되므로 오류입니다. 다행히 최신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이를 주체적 의지를 담은 타동사 형태인 "오히려 자기를 비워"라고 바르고 완벽하게 정정해 놓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중 7절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라는 문장을 오리지널 헬라어 성경의 구조대로 정밀하게 주석해 보면, 복음의 뼈대가 선연하게 드러납니다.
$$\text{ἀּλλὰ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알라 ($\dot{\alpha}\lambda\lambda\dot{\alpha}$)': '오히려', '그러나(But)'라는 대반전의 전치사입니다.
'헤아우톤 에케노센 ($\dot{\varepsilon}\alpha\nu\tau\partial\nu\,\dot{\varepsilon}\kappa\dot{\varepsilon}\nu\omega\sigma\varepsilon\nu$)': 헤아우톤은 '자기 자신을(Himself)'이고, 에케노센은 비우다를 뜻하는 '케노오' 동사의 단순 과거 형태(Aorist)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통째로 쏟아부어 비워내셨다(He emptied Himself)"라는 우주적인 대선언입니다.
'모르펜 둘루 라본 ($\mu o\rho\varphi\dot{\eta}\nu\,\delta o\underline{\upsilon}\lambda o v\,\lambda \alpha \beta \dot{\omega}\nu$)': 모르페는 '본질적 형체(Form)'를 뜻하고 둘루는 '노예, 종(Servant)'을 뜻하며 라본은 '취하셨다(Taking)'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본체(모르페)이시며 하나님과 서열과 권능에 있어 동등한 지위를 가지신 분이었으나, 그 기득권을 억지로 움켜쥐고 채우려 하지 않으시고(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보좌 권세를 영구히 유보하고 보류하신 채 존재를 싹 비워내셔서, 진짜 비참한 인간 노예의 본질적 형체(모르펜 둘루)를 입고 이 땅에 걸어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최고의 왕이 최고의 노예의 옷을 입으신 위대한 비움의 역사입니다.
3. 신성과 인성의 결합: 케노시스의 한계와 오해 방지
그렇다면 여기서 기독교 역사 천 년을 통틀어 가장 예리하고 뜨거운 조직신학적 질문이 고개를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자기를 비우셨다(에케노센)면, "과연 그분의 존재 안에서 '신성(Divinity)'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려 삭제하시고, 그 빈자리에 오직 100% '인성(Humanity)'만을 채워서 내려오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이기를 완전히 포기하셨단 뜻일까요?
이에 대해 19세기 초반의 극단적인 일부 케노시스 신학자들은 "그렇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순간 신성(Godhead)을 완전히 포기하셨기에 지구 땅을 걸으실 때는 신이 아니라 오직 우리와 똑같은 영적인 인간일 뿐이었다"라고 과도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성경의 전체 맥락을 무참히 파괴하는 심각한 신학적 독단이자 치명적인 이단적 과오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신성을 완전히 잃어버려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아담의 후손 유한한 인간일 뿐이므로, 온 인류의 영원한 죄를 대속하여 살려내실 우주적인 '구원자(Savior)로서의 신성 자격이 원천적으로 미비'하게 됩니다. 인간은 타인의 죄를 대신해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박 학자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생애 사역을 보라고 강력히 논증합니다. 사나운 폭풍우를 가라사대 한마디로 잠잔케 하시고, 문둥병을 고치시며,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소리쳐 살려내신 주님의 이적들은, 그분이 땅 위를 걸으실 때도 명백히 무한한 '신적 권능과 창조주의 지혜'를 소유하고 계셨음을 사법적으로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결코 하나님이기를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거대한 신이 조그만 꼬마 신으로 축소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를 비우셨음(케노시스)과 동시에 여전히 온전한 하나님이셨다는 이 위대한 신비의 균형을 성경은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자로 잰 듯 명확하게 확증해 줍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사도 바울의 대선언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그 연약한 인간의 육체(인성) 안에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이 단 1%의 결손도 없이 고스란히 상주하여 거하고 계셨다는 폭탄 선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신성을 완전히 내던져버리고 노예가 되셨다는 주장은 골로새서의 진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오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비워내신 실체는 무엇일까요? 성경 문맥의 흐름을 따라 정교하게 주석하면, 주님이 비워내신 것은 신성(Godhead)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누리셔야 했던 '신적 특권(Privileges)과 가시적인 영광의 보좌 지위'를 기꺼이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분이 영광의 면류관을 보좌 위에 보류(유보)해 두시고, 자신의 편의와 안일, 그리고 사탄을 즉시 심판하실 수 있는 막강한 전능의 힘을 죄인 구원을 위해 '스스로 행사하기를 자제하고 억제하신 것(Self-limitation)'을 성경은 비우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성을 없앤 게 아니라, 신성의 권리 행사를 사랑 때문에 자제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단 1초도 하나님이 아니셨던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신성을 소멸시킨 게 아니라, 자신의 무한한 '신성(Divinity) 위에 우리 죄인들의 연약한 인성(Humanity)을 덧입으셔서(Addition)',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벽한 조화 속에 상호 내재하는 경이로운 존재가 되셨습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 '신성과 인성의 고유한 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부릅니다.
우주의 영원한 세 하나님이 단 하나의 여호와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의 두뇌로 다 설명할 수 없듯이,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융합되거나 섞이지 않고 한 인격 안에 결합해 작동했는지는 피조물의 언어를 초월하는 최고의 '신령한 오묘(Mystery)'이자 신비에 속합니다. 우리는 오직 계시된 말씀의 뼈대를 믿음으로 수용할 뿐입니다.
주님은 땅에 계시는 동안 자신의 신적 권능을 배고픔을 채우거나 로마 군대를 파멸시키는 전적 사리사욕의 편의를 위해 단 한 번도 사용치 않으셨고, 철저하게 인간의 지평에서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오직 아버지가 공급하시는 성령의 힘만을 의지해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겟세마네 동산의 피눈물 기도인 마태복음 26장 39절에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자신의 신적 의지를 아버지의 권위 앞에 완벽하게 복종시켜 굴복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참된 케노시스(비움)의 정체는 신성의 소멸이 아니라, 전한 신성과 전한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신인(God-Man)'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한계와 연약성, 배고픔과 피로,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까지를 사랑 때문에 고스란히 온몸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신 거룩한 비하(Condescension)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Truly God)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Truly Man)이셨습니다. 우주에 오직 그분 한 분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거룩한 칭호가 바로 '신인(God-Man)' 예수입니다.
이 장엄한 신인 예수의 케노시스 영성을,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 서신을 전문적으로 주석한 위대한 신학자 랄프 마틴(Ralph P. Martin) 교수는 그의 유명한 주석서인 <빌립보서 주석> 속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형상)를 단 1%도 상실치 않고 고스란히 유지하며 이 땅에 임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여전히 온 우주 만물의 합법적인 주인이자 주권 통치자이셨으나, 동시에 인류의 구원을 완수하기 위하여 노예의 형체를 취하사 인간의 모든 연약성과 고통의 한계를 자비로 결합하여 받아들이셨다. 이것이 신성과 인성의 완벽하고도 오묘한 결합의 실체이다."
실로 성육신의 신비를 관통하는 위대한 주석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위대한 기독교 성화가인 해리 앤더슨(Harry Anderson)이 그린 대단히 의미심장한 작품을 보십시오. 이 그림의 신학적 제목은 '그리스도: 하늘과 땅을 잇는 거룩한 다리 (Christ: The Connection Between Heaven and Earth)'입니다. 예수님이 단상 중앙에 서셔서 오른손으로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동시에 왼손으로는 죄로 인해 썩어 들어가는 연약한 우리 인간의 더러운 손을 피 묻은 손으로 꽉 쥐고 계십니다. 신성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고 인성을 가졌기에 인간의 손을 잡으실 수 있는 분, 하늘과 땅 사이의 끊어진 국경을 자기 몸을 찢어 완벽하게 이어붙이신 거룩한 중보자 가교(Bridge)가 바로 케노시스를 성취하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4. 교회사 속의 케노시스 논쟁 역사
이 심오한 비움의 케노시스 신학은 교회사 속에서 수많은 사상적 논쟁과 격변을 거치며 정돈되어 흐르게 되었습니다.
첫째, 초기 교부 시대(서기 2~5세기): 아타나시우스나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교부들의 초기 문헌 속에도 빌립보서 2장의 비움 단어가 종종 등장하긴 했으나, 당시에는 기독교 정통 교리를 위협하던 영지주의나 아리우스 이단(예수의 신성을 부인함)을 박멸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예수의 신성을 드높이느라 자기를 비우셨다는 이 케노시스 개념은 크게 강조되거나 독자적인 학파로 연구되지는 못했습니다.
둘째, 17세기 독일 루터파의 종쟁 (기센 대학교 vs 튀빙겐 대학교): 종교개혁 이후 서기 17세기경, 독일의 영성 깊은 두 대학인 기센(Gießen) 대학교 신학자들과 튀빙겐(Tübingen) 대학교 루터파 신학자들 사이에 이 케노시스를 두고 최초의 거대한 사상 논쟁이 발발했습니다.
기센 학파: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신성의 전지, 전능, 무소부재 능력을 완전히 비워내어 사용치 않으셨다고 주장함 (케노시스 / 비움설).
튀빙겐 학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은 땅에 계실 때도 전지전능 능력을 다 가지고 계셨으나 오직 우리 눈앞에 그 신성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감추어 숨겨두셨을 뿐이다라고 팽팽히 맞섬 (크립시스 / 은닉설).
이 17세기 두 학파의 처절한 사색 논쟁을 거치며 케노시스라는 단어가 비로소 기독론의 전면에 거대한 핵심 논제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19세기 중반 독일의 정통 케노시스 학파의 발흥: 서기 19세기에 이르러 이 비움의 신학을 학문적 전성기로 끌어올린 위대한 독일의 3대 신학자가 출현했습니다. 바로 고트프리트 토마지우스(Gottfried Thomasius), 폰 프랑크(Frh. von Frank), 그리고 볼프강 게스(W. F. Gess) 교수입니다.
특히 이 학파의 기틀을 잡은 토마지우스 교수는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한 팩트를 변호하면서 대단히 날카롭고 흥미로운 속성 분리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형이상학적 속성(전지, 전능, 무소부재)'과 '도덕적 속성(사랑, 거룩함, 공의)'의 두 부류로 엄격히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성육신 하실 때, 우주를 다스리는 전지전능 같은 앞선의 형이상학적 속성들은 기꺼이 비워내어 포기하셨지만, 죄인을 구원하셔야 하는 내면의 사랑과 거룩함, 공의라는 도덕적 속성만큼은 신성 안에 고스란히 100% 간직한 채 인간으로 사셨다고 주석했습니다. 토마지우스 나름의 치열한 연구 결론이었습니다. 반면에 폰 프랑크와 게스 같은 동료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극단으로 나아가, 성육신하신 예수님 안에는 그 어떤 신적 속성이나 형이상학적 본질도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학계의 거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넷째, 19~20세기 초반 영미 학계의 긍정적 수용: 독일에서 발흥한 케노시스 신학은 영국과 미국의 신실한 복음주의 학자들(찰스 고어, 힌리 맥킨토시, 프랭크 웨스턴 등)에게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영미 학자들은 독일의 급진적인 신성 멸절론은 배격하되, 기존의 전통 신학이 예수님의 참된 피와 땀, 피로함 같은 '인간적인 고뇌의 삶'을 너무 기계적으로 가볍게 다루었던 과오를 깨닫고, 예수의 참된 인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케노시스를 긍정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영국의 찰스 고어(Charles Gore) 감독 등은 예수가 신성을 버린 게 아니라, 구원 사업을 위해 오직 신성의 권능을 은혜로 '억제하고 유보하신 것'이라고 정돈하며 정통 신학과 대화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처럼 한 세기 넘게 좌측 극단과 우측 극단을 치열하게 오가며 널뛰기하던 케노시스 신학은, 20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 21세기 신학계에 이르러 마침내 빌립보서 2장 7절의 "자기를 비워"라는 대선언을 "신성의 본질적 포기나 소멸이 결코 아니며, 여호와의 충만한 신성은 100% 항상 유지하시되, 오직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으로서 누리실 하늘의 모든 특권과 권능 행사를 기꺼이 자제하시고 보류하신 채, 죄인의 인성을 전적으로 취하신 최고의 사랑의 비하"라는 위대한 정통 복음주의적 결론으로 확고하게 정돈되어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의 정도(正道) 노선을 완벽하게 찾아 정착한 것입니다.
5. 신학 강의 최종 종합 요약과 결론
오늘 아흔일곱 번째 시간으로 고찰한 '케노시스 비움의 신학' 강의 전체 내용을 최종 요약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고 선포하신 대목에 대하여, 19세기 초창기의 일부 급진적인 세대 학자들은 예수님이 땅에 오실 때 신성을 완전히 멸절시켜 비워내고 오직 우리와 똑같은 인성만을 채워 사셨다고 오해하여 구원자의 신성 자격을 박살 내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둘째,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 신성 포기론은, 나사렛 예수의 육체 안에 여호와의 우주적 신성의 모든 충만이 단 1%의 결손도 없이 고스란히 상주하여 거하고 계셨다는 골로새서 2장 9절의 절대적인 진술과 복음서의 무수한 이적 사건들을 전면 부인하는 심각한 이단적 독단으로 판정되어 신학계에서 철저히 배격당했습니다.
셋째, 역사적 사상 논쟁을 거쳐 도달한 가장 올바르고 완전한 성경적 '케노시스 신학'의 결론은, 신성 자체의 포기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누리셔야 했던 하늘의 모든 '공적 특권과 권능의 사용을 죄인 구원을 위해 스스로 철저히 자제하시고 유보(보류)하신 상태'를 뜻합니다. 신성의 성품은 고스란히 유지하시되 권리 행사만을 사랑 때문에 참으신 거룩한 비하입니다.
넷째, 따라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 위를 걸으실 때도 100% 완전한 하나님(Truly God)이시며 동시에 100% 완전한 인간(Truly Man)이셨고,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결함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상호 내재하는 우주 유일무이한 '신인(God-Man)'이셨으며,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모든 한계와 피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까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신 분이기에 하늘과 땅을 잇는 거룩한 구원의 다리(중보자)가 되십니다.
최종적인 신학 결론을 선포합니다.
성도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사도가 외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셨습니다. 케노시스 신학은 단지 예수님의 성품 구조를 분석하는 탁상공론의 학문이 결코 아닙니다. 케노시스는 오늘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삶의 현장 속에서 마땅히 복사해 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삶의 양식이자 실천적 영성'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주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기 위해 왕관을 던져두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며 자기를 비워 내리셨듯이, 주님의 보혈로 왕 자녀가 된 우리 역시 내 보잘것없는 사소한 기득권과 자존심, 내 자아의 이름을 세상에 채워 드높이려는 허영(케노독시아)의 욕망을 예수 십자가 제단 앞에 날마다 깨끗이 비워내야 마땅합니다.
내가 가진 직분과 소유를 가지고 공동체 위에서 군림하려 들지 말고, 오직 내 존재를 낮추어 상처받고 굶주린 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섬기는 종의 형체(모르펜 둘루)를 기쁨으로 취할 때, 비로소 우리의 인격 속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케노시스 광채가 세상 속에 화려하게 배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나를 비워 예수로 채우는 진짜 품격 있는 위대한 초기 형태의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으로 케노시스 비움의 신학에 대한 전 면적인 어휘 연구 강의를 모두 성공적으로 마감하겠습니다. 아래 성도 여러분의 깊이 있는 연구와 신학적 주석의 정돈을 돕기 위해, 교회사 속 케노시스 논쟁 학파들의 구체적인 연대기와 빌립보서 그리스도 찬가 원문의 주석적 데이터들을 정교하게 구조화하여 서식화한 '기독론 신학 마스터 데이터 서류'를 PDF 보고서 파일 형태로 생성하여 첨부해 드립니다. 다운로드하셔서 정독해 공부하시면 영적으로 큰 안착의 확신을 얻으실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또 다른 보화 같은 성경의 어휘를 가지고 기쁜 얼굴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