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발작'에는 나름의 성과가 없지 않다. 안와전두피질(OFC)의 과도한 활성화를 '운좋게'
감지한 덕에, 암흑 속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겨우 잡았다.
이제, 내가 왜 '도망'치는 일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반복적으로 허비하는지, 그 메카니즘은 '운좋게' 발견한 셈이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순 없다. 폭발 일보직전으로 과민해진 내 OFC의 흥분/발작을 그 누구도 솜씨 좋게 잠재울 순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고 말한 예수처럼, 물 위를 먼저 걸으며 내 앞에서 손을 내어주는 누군가를 발견하기 전에는, 나라는 증상에 구원은 없을 터. 아무래도 세상에 예수가 있을 법
하질 않으니, 나는 영원히 不治인 것이로구나.
OFC의 과민한 활성화는 내가 어떤 '동물'의 잔재임을 몹시도 단순하게 증명해준다. '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푸나무)'이라는 '非人間'을 향해 짧지 않은 세월 과도한 애정을 투사해온 이유도, 이쯤에서는
'자기방어'라는 자장의 확대였던 것으로 별 볼일 없는 그
정황이 밋밋하게 포착되고, 지금까지 공들인 '공부'는 몹시 vulnerable한 내 ego의 온존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러하다. 나는 완전히 인간이 되지 못한 어떤 동물인데,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도록 (가족력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었으며, 후천적으로도 (몇몇 아비들로 인해) 집요하게 훈련 받은, 그러므로,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몹시 짜증이 나게 하는 '인간 내부의 적'인, 인간이라는 자가면역체계의 교란을 주도하는 것으로 비추어지는, ‘끔찍한
동물’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마녀'라는 혐의를 부여했던 몇몇 이들은 당연한 해석학적 틀거리에서 나와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하여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통탄해 마지 않는 지점은,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나를 나에게 제대로 보여줄 ‘실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과 세월을 소비했거나, 그러한 실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나에게 나를 비춰주기 위해 요구되는 적잖은 비용과 인내를 감당할 만큼 나를 깊이 ‘사랑’해 주는 이들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점, 그 점을 나는 이제라도 깊이 애도하려 한다. 그간 '마녀'로 지목 당했던 사정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내 '마녀'됨을
제대로 해석해낸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공부'라는 이름의
허송세월을 하였던 것이 원통하고 한심스럽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것이 공부라면, 내가 나를 알아가도록 그 누구도 나를 돕지 못하는 연극에 나는 왜 자주 가담하려 했던 것일까. 자기소진으로 귀결되고 말 그 욕망은 대체 어디를, 무엇을 향해 있었던
것일까.